내가 왜 이순신이죠? 202화
69. 태평성대 (2)
“어르신! 잡아왔습니다!”
수노가 잡아끌자, 석돌은 눈물만 흘리며 관아로 들어섰다.
김 진사는 석돌을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침을 찍 뱉고는 으르렁거렸다.
“버러지 같은 놈이, 기껏 큰돈을 빌려주었거늘 나를 등쳐먹으려 들어? 어디 한번 죽어봐라!”
김 진사가 주먹을 드는 순간!
“그만.”
대청에 앉아 있던 수령이 피로한 투로 명했다.
다른 곳도 아닌 관아에서의 행패다.
수령의 권위를 무시하는 만행이었으나 김 진서는 친척인 의빈을 믿고서 평소에도 방자하게 굴었다.
지금처럼.
“이보십시오, 현감 나으리! 어찌 나라의 일이라며 말도 없이 대뜸 저놈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겁니까?”
“전하의 특명이 있으셨네.”
“전하께서 그냥 백성들의 빚을 다 갚아주라 하명하셨단 말이오? 성군 나셨구려!”
김 진사가 빈정대자 수령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언행에 주의하시게.”
“됐고, 나는 나라에서 무엇을 하건 따를 생각이 없소! 현감께서도 그리 아시고 더는 간섭하지 마시오!”
“나라의 일을 거스르겠다는 말인가?”
“나라의 일? 흥! 고작 현감이 무슨 자격으로 나라의 일을 논한단 말이오!”
현감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임부터 김 진사는 고을의 평판과 자신의 명성을 갉아먹는 쥐새끼 같은 종자였다.
처음 목민관이 되어서 깊은 뜻을 품고 선정을 펼치려 하였으나, 사사건건 김 진사의 방해와 겁박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수령 노릇도 지쳤다.
그리고 과거 자신이 욕했던 자들처럼 임기만 채울 뿐인 무능한 목민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진사는 자신이 나랏일을 논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가?”
“고작 현감보다야, 지체 높은 의빈을 모시고 있는 이 사람이 나랏일에 더 가깝지 않겠소이까?”
김 진사가 빈정대자 현감은 피식 웃었다.
지체 높은 의빈이라…….
“곤궁한 자들의 빚을 대납해 주는 것은 전하의 특명으로 시행된 나라의 일이오. 무고한 백성에게 있지도 않은 빚을 청구하며 계속 괴롭힌다면 국법으로 죄를 물을 수밖에 없소이다.”
“하아! 뻔뻔한 소리 좀 작작 지껄이시오, 현감! 고작 종육품 나부랭이인 주제에 감히 나에게 왈가왈부하겠다는 거요? 의빈 대감의 진노를 몸소 느끼기 전에 처신에 힘쓰는 게 좋을 거외다!”
“하하…… 처신이라.”
현감이 웃으며 김 진사의 말을 곱씹자, 덜컹, 하면서 객사의 문이 열렸다.
“무슨 소란입니까?”
제도가 잘 시행되는지 파악하고자 중앙에서 온 어사와 수하들이었다.
“아, 송구하게 되었소이다. 저쪽은 김 진사라고, ‘지체 높은 의빈’의 친척 되시는 분이시오. 그런데 전하의 특명에 불만이 많은 듯하외다.”
“지체 높은 의빈?”
어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김 진사가 콧대를 높였다.
“도성에서 온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그대들도 청원부원군 대감의 드높은 명성은 들어보았겠지!”
청원부원군, 한경록.
저질스러운 행실로도 유명했으나 최근에는 방납업자들과 결탁하고 왕의 면전에서 개혁을 반대했다.
간 큰 행동의 대가로 한경록은 결정적인 치부들이 공공연히 알려져, 결국 사약을 마시고 지옥으로 떠났다.
그런 자의 친척이랍시고 콧대를 높였으니 어사는 우습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청원부원군의 친척 되시는 김 진사께서는 전하의 일에 불만이 많으시다?”
“지금 빈정대시는 건가!”
김 진사가 따지자 현감이 끼어들었다.
“김 진사께서는 무고한 양민들에게 임의로 빚을 지워 착취하였고, 평소 목민관을 겁박했을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는 전하를 입에 올리며 불충한 소리까지 하셨소이다.”
“그대가 진정!”
김 진시가 현감을 향해서 언성을 높이는 순간.
-퍽!
칼자루가 김 진사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억?!”
김 진사는 벌러덩 넘어져 옆구리를 껴안고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사는 환도를 칼집째로 꺼내 쥔 채 쓰러진 김 진사를 내려보았다.
“처신에 문제가 있는 놈이로군.”
“이, 이놈들이……, 감히 청원부원군 대감의 친척인 나에게 손을 대다니!”
“흥, 그 잘난 청원부원군께서는 땅에 묻힌 지 좀 되셨소이다.”
“따, 땅에 묻혀?!”
“얼마 전에 사사 당하셨거든.”
“사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청원부원군 대감께서는 지체 높은 왕실의 어른이심을 모르느냐!”
“잘 알고 있지. 그럼 어디 한 번, 잘난 청원부원군 대감께서 어떻게 진사 나리를 비호해 주시는지 볼까.”
어사는 환도의 손잡이로 김 진사의 입을 찍었다.
-빡!
박살 나는 소리가 관청의 뜰을 울렸다. 김 진사는 다급히 입을 감쌌으나, 기침할 때마다 누런 이가 벌겋게 젖어서 튀어나왔다.
“추포해라. 죄질이 악독한 자이니 의금부로 압송해야겠다.”
어사의 동행들이 명을 받들어 김 진사를 포박했다.
팔이 뒤로 가자 김 진사의 박살 난 면상이 드러났다. 코와 입에서 피가 빗물처럼 흘렀고 앞섶은 시뻘겋게 젖은 채였다.
제대로 얻어맞은 김 진사는 꿈이라도 꾸는지 풀린 눈으로 눈물만 흘렀다.
그 광경에 김 진사의 수노는 기겁하며 물러났다.
“히, 힉!”
인기척에 어사의 시선이 돌아갔다. 현령은 싱글벙글 웃으며 조언했다.
“저쪽 놈은 김 진사의 수노로, 앞장서서 양민들을 착취한 자입니다.”
“어르신! 살려주십시오!”
수노는 부리나케 무릎까지 박고서 빌었으나 소용없었다.
두 사람이 포승에 묶이자 현령이 대소했다.
“하하! 멍청한 놈들, 한경록이 그새 죽은 것도 모르고서 호가호위에 허장성세까지 부리는 꼴이라니!”
“현감께서도 죄인들의 악행을 증언하셔야 할 겁니다.”
“얼마든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증언하겠소이다! 하하하!”
현감이 시원하기 그지없는 파안대소를 터뜨리자 석돌이 상황이 정리된 것을 알고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어, 어르신……?”
현감이 허리를 숙이며 석돌을 내려다보았다.
“자네 이름이 석돌이었던가?”
“예, 어르신.”
“버러지 같은 놈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아닙니다요…….”
“부정할 필요 없네. 사실 나도 자네와 처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거든. 그동안 얼마나 눌리고 살았는지! 참으로 한심하지. 빚은 걱정할 필요는 없네! 두 놈이 돌아올 일도 없을 테고!”
대놓고 왕을 모욕했으니 목숨이 두 개 있어도 살아남기는 어려웠다.
“그래, 자네도 버러지 둘이 박살 나는 꼴을 보고서 속이 시원했겠군. 이봐!”
현감은 주변의 공노비를 불러세우고는 명했다.
“석돌에게 술 한 병 내려주어라! 좋은 안줏거리가 있는데 술이 없어서야 쓰나!”
* * *
새로운 정책으로 어딘가의 백성들이 구원받을 동안.
조정에서는 벌써 새로운 일이 논의되고 있었다.
“경기도 백성들 모두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백만 자루 이상의 농기구가 필요할 줄로 아옵니다.”
호조판서 이산해가 보고했다.
백만이라니!
백 개의 농기구를 만들기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만 단위까지 붙자 홍섬이 물었다.
“터무니없는 수치일세! 팔도 전체도 아니고 고작 경기도의 백성들에게만 임대하는데 백만 개가 넘는 농기구가 필요하다니?”
“송구하오나, 대감. 농사란 단순한 작업으로 보일지 몰라도 필요한 기구만 해도 수십 종입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결정적인 문제는 농사에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날한시에 필요해졌다가, 한날한시에 필요가 없어지니 돌아가면서 쓸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백만 자루 이상이라는 무식한 추산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괜히 소작농들이 지주에게서 농기구를 빌리는 게 아니었다. 필요한 농기구를 전부 갖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전하께서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백성들을 위해 내탕금을 열어주기로 하셨으나, 당초 계획대로 이행하신다면 막대한 양의 비용이 들 줄로 아옵니다.”
“경이 나의 재산을 걱정해 주니 고맙군.”
“그냥 드리는 말이 아니옵니다. 정말 필요한 농기구만 생산해서 임대하더라도 족히 수만 섬이 필요하옵니다.”
“내가 고작 수만 섬이 없겠느냐?”
나의 당당한 대답에 이산해는 물론,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도 벙찐 표정을 지었다.
도성의 기와집마저 백 섬이 채 안 되는 세상에서 수만 섬이란 거의 일국을 경영할 수 있는 재산이었다.
그런데 고작 수만 섬이 없냐고 한다.
좋은 취지를 가지고서 사유재산으로 나랏일을 추진한다지만 돈 지랄도 이런 돈 지랄이 없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내탕금이 방대하다고는 하여도 당장 수만 섬을 유용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당장은 없지. 허나 그와 맞먹는 자산은 있다.”
“일사칠궁(一司七宮)의 궁방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일사칠궁(一司七宮)은 내수사를 포함해 왕실 자산을 경영하는 수진궁, 어의궁, 명례궁, 용동궁, 육상궁, 선희궁, 경우궁을 말한다.
이들의 부동산인 궁방은 논밭만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어장, 염전, 산림 등 종류별로 방대한 부동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종실의 자산인 궁방전을 처분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라고 재산이 없겠느냐.”
“하오나.”
이산해는 과거부터 왕과 잘 알고서 지냈다.
왕에게 성저십리와 금천 일대에 땅이 제법 있기는 하였으나, 다 처분하더라도 절대 수만 섬에 미치지는 못한다.
“경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왕이 자신이 있다는데 어쩌겠나.
엄청나게 대단한 비자금이 있긴 한가보구나, 하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대한 경비가 든다는 것은 우려스럽구나.”
“예.”
“비용이 주로 어디에서 발생하느냐?”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철이옵고, 다음이 땔감이옵니다.”
미래라면 인건비가 문제겠지만 사람 거저 부려먹는 이 시대에서는 현물이 문제였다.
땔감이야 당장은 어쩔 수 없다지만 철의 수급은 개선의 여지가 가득했다.
현재 조선의 철은 각읍채납제(各邑採納制)로 운영되고 있다.
말은 멀쩡하지만 ‘알아서 맞춰 내라.’는 소리였다.
각읍채납 이전에는 철장제, 염철법, 철장도회제 등의 제도가 시대에 따라 시행되었다가 교체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성종 치세 후반기에 들어서는 손을 놔버리고 ‘이쪽은 받기만 할 테니까 니들 꼴리는 대로 알아서 내’가 되었다.
각 고을이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철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으니 처지가 조금은 나아졌으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라에서 철을 마련하는 제도가 지극히 미진하여 백성들의 노고는 큰데 수효는 크지 않아 문제다.”
나의 말에 신하들은 당혹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영의정 홍섬이 조심스럽게 의향을 확인했다.
“혹시…….”
“마땅히 제도를 개혁해야지 않겠느냐?”
신하들은 역시나, 라는 듯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수취제도를 개혁하겠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제도를 바꾼단 말인가! 나랏일에서 왕의 역할이란 까라고 말하는 게 전부지만, 그걸 실현하는 것은 전적으로 공무원들의 몫이었다.
특히 호조는 장관인 이산해마저 넘치는 업무로 며칠 동안이나 집에서 쉬지 못한 상태.
제도 실행에 필요한 예산을 보고하래서 보고했다가 일만 얻은 신하들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백성들의 노고를 덜자는 좋은 취지로 제도를 개선하려거늘, 어찌하여 경들의 면상은 썩어가는가?”
“아, 아니옵니다.”
“왕에게는 부지런하기를 기대하면서 스스로는 부지런하지 못하다니. 허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