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01화
69. 태평성대 (1)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있었다.
노을 아래 주변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가득한데 이 집에서만은 연기가 나지 않았다.
“엄니, 나 배고파요.”
이제 열 살 남짓 됐을까.
새파란 꼬맹이는 나무사발에 담긴 풀떼기를 뜯고는 칭얼거렸다.
맞은 편에 앉은 여인이 말했다.
“이놈아, 아침밥 먹고도 배고프다 그래?”
“엄니, 그게 어떻게 밥이오. 풀이지. 나는 밥 먹고 싶소. 힝힝.”
“나가서 농사 짓는 아비도 먹기 힘든 밥을 식충이인 네가 왜 먹으려고 해?”
“내가 잘 먹고 잘 커야 아버지 농사 거들어드릴 것 아니오. 히잉.”
꼬맹이는 징징대면서도, 어린 나이에 고생을 제법 했는지 원숙한 투로 말했다.
과연 거처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고 하나뿐인 방은 한 평 반 남짓에, 어미와 자식이 사이좋게 거지꼴을 하고 있었으니 고생이 적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일가의 사정이 이렇게까지 곤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한 해 농사의 수확이 끝난 가을에는 남들처럼 보들보들한 흰 밥을 먹을 정도의 사정은 되었다.
‘빚만 아니었어도…….’
아낙은 칭얼대는 자식을 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몇 년 전 아낙은 독질을 겪었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기운이 없어지는 병이었다. 의원이 병명이랍시고 무어라 떠들긴 하였으나 환자였던 아낙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식한 지아비는 자식을 애미 없는 놈으로 만들 수는 없잖냐며 있는 가산, 없는 가산을 처분해 아낙을 백방으로 보살폈다.
자신을 위하는 지아비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결과가 이것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
“엄니, 밥 주시오, 밥!”
“제 아버지 먹을 것도 없는데 자식이 되어서 밥을 달라고 그래?! 이놈! 버르장머리 없는 놈!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
아낙은 과장된 몸짓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매를 찾겠다면 단숨에 찾아내고도 남았지만, 순진한 아이는 그저 두려운 마음으로 손을 빌었다.
“잘못했소, 엄니! 잘못했소!”
“이놈아, 아버지가 고생하고 돌아오셔도 밥을 달라고 징징댈 거냐?”
“아니오. 조용히 있겠소.”
“아버지 앞에서 한마디도 하지 말어라. 자신이 없으면 자는 척이라도 하라는 말이야!”
“예…….”
아낙은 관심법의 주술은 몰랐다.
하지만 지아비가 자식의 징징대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기분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픈 부인을 살려낸 대가로 일가는 하루에 한 끼 먹는 것도 어려워졌다. 이런 마당에 자식이 밥을 타령하며 징징댄다면 지아비에게는 원망의 소리로 들리지 않겠는가.
“……후우.”
아낙이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빚부터 갚고 원래의 삶을 회복하자던 목표도 이제는 흩어지고 사라진 지 오래다.
해마다 불어난 빚은 이제 일가가 자매를 하더라도 갚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신세를 진 김 진사의 수노가 이따금 얼굴을 비치며 빚의 존재를 상기할 때, 머리를 숙이다 못해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실거리는 아낙과 지아비의 신세는 어쩌면 이미 노비와 매한가지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처지가 되어서 아낙은 차라리 자신이 죽어야 했다고 수도 없이 한탄하고 되뇌었고 스스로를 원망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지극한 사랑과 희생을 보여준 지아비가 자신 때문에 상심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무이, 그럼 나 자오.”
“그래. 자거라.”
풀반찬으로 배를 채운 꼬맹이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이불을 덮었다.
그럼에도 꼬르르, 하는 배꼽 뒤틀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아낙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척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새벽.
아낙은 도정되다 만 보리밥 반 그릇과 풀 반찬을 내놓았다.
“드시오.”
덜그렁, 하는 소리에 지아비는 한참이나 밥상을 바라보더니 코로 묵은 숨을 토하고는 어렵사리 젓가락을 들었다.
“자식 법은 잘 먹이고 있지?”
“걱정하지 마시오.”
“올 때마다 자고 있던데. 요새 기운이 없나?
“잠이 많은 녀석이라 그렇소.”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자식을 일찍 재우는 이유는, 아이가 징징댈 때마다 아비가 제 먹을 밥을 양보하기 때문이다.
자식 사랑도 좋지만 아비가 밥을 먹지 못한다면 농사는 어떻게 짓는단 말인가.
“내가 김 진사랑 수노 어른에게는 항상 잘 부탁을 드리고 있으니까, 애는 굶기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고 밥이나 드시오.”
아낙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 * *
“…….”
농기구를 챙겨 나온 석돌은 막상 밭은 찾아가지 않고 멀뚱히 서서 길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개미 몇 마리가 태평하게 흙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미물에 불과하다지만, 놈들의 신세가 어쩌면 석돌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굶은 일은 있을지언정 빚은 없을 게 아닌가.
‘자네가 진 빚이 벌써 서른 섬을 넘었어. 다음 해가 되면 마흔 섬이 넘을 턴데, 어떻게 갚을 생각이신가?’
김 진사의 말이 석돌의 머리 안에서 붕붕 울렸다.
석돌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으며 자비를 구걸했지만 김 진사는 남의 일이라는 듯 태평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자네가 어떻게든 안사람을 살리고 싶대서 가상한 마음에 큰돈을 기꺼이 빌려주었거늘, 어찌 자네는 인의와 도리를 저버리고서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빚을 면해달라고 생떼만 부리는가?’
석돌은 진심으로 빚을 갚고 싶었다.
하지만 갈수록 반 곱절 넘게 늘어나는 빚을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사태가 이 지경이 되어서야 석돌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 빚 자체가 아니라 빚을 져서라도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결심이 실수였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있으시다면 이 놈 좀 살려주십시오. 아니, 나는 죽어도 좋으니 안사람과 자식놈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천지신명님, 천지신명님……. 제발…….’
석돌은 속으로 연신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천지신명은 답이 없었다. 단지 눈물만 찔끔 흘러나올 뿐.
그렇게 한참이나 제자리에서 서 있던 석돌은 결국 눈물을 훔쳐내고 밭으로 향했다. 날이 가물어서 서둘러 물을 대지 않으면 안 됐다.
-웅성웅성.
석돌이 고을을 지나칠 즈음
‘무슨 소란이지?’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고을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었다. 인파가 모일 일이란 정말 흔치 않았다. 관심이 동한 석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잠시 확인만 해보자는 생각으로 발을 돌렸다.
소란의 진원지는 관아였다.
수많은 농군들이 가던 길을 포기하고서 각자의 농기구를 어깨에 지거나, 혹은 땅을 짚은 채로 계단 위에 선 아전만을 보고 있었다.
아전은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주상 전하의 특명이 있어 빚을 진 자, 가세가 지극히 곤궁한 자, 땅을 개간하려는 자에 한해 농기구와 쌀을 대여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주지하시오!”
석돌은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귀신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인파로 파고들었다.
“어르신, 참말이십니까?! 쌀을 빌려준다고요?!”
아전은 유난히 시끄러운 석돌을 발견하고는 감흥 없는 어조로 답했다.
“아. 자네 석돌이 아닌가. 마침 잘 찾아왔군. 당연하지만 내가 자네들 상대로 농담이나 따먹을 생각은 없네. 사실이야.”
아전의 확언에 인파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고을에는 작건 크건 알음알음 빚을 자가 많았다. 그런데 나라가 빚을 대신 갚아준다니 경천동지할 사건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서광 같은 소식이었다.
“바, 바로 요청하면 됩니까요?”
“저녁에 다시 찾아오게.”
아전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발을 돌리자 솟을대문이 꽝, 하고 닫혔다.
졸지에 버려지듯 남겨진 농군들은 한참이나 남아서 웅성댔으나 결국 각자의 논밭을 찾아 흩어졌다.
석돌 역시 밭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기분이 달랐다. 마치 무언가 잘 못 먹기라도 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빚이 쌀로 삼십 섬을 넘는데 전부 갚아줄까?
뭐…….
안 된다면 조금이나마 받은 쌀로 당분간 실컷 먹고 죽을 수는 있겠지.
석돌은 일단 밭부터 돌보기로 했다. 때가 되면 알아서 결판 날 터이니.
* * *
“부인!”
석돌이 외치자, 아낙이 다급히 방문을 열고서 나섰다.
그러고는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어머나, 이게 다 뭐란 말이오?!”
“관아에서 나눠준 쌀이야!”
석돌은 자신이 지고 온 쌀섬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식이라도 본 듯, 흐뭇한 얼굴로 쌀섬을 두드렸다.
“나라에서 쌀을 주다니?”
아낙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느닷없는 소란에 안에서 자고 있던 꼬맹이도 나왔다. 그러더니 마당에 덩그러니 놓인 섬을 발견하고는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부지, 이게 뭐예요?”
“쌀이다.”
“싸, 쌀!”
꼬맹이는 보화라도 발견한 듯 달려가 쌀섬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짚으로 꼰 끈이 거칠지도 않은지 뺨을 비벼댔다.
아낙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은 흰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아버지께서는 섬을 가지고 오시느라 지치셨을 테니 네가 힘 좀 써라.”
“네!”
꼬맹이는 당차게 말했으나 자신보다 배로 무거운 쌀섬을 끌기란 불가능했다.
거의 지렁이 기어가는 속도로 쌀섬이 질질 끌려갈 동안, 아낙은 석돌에게 보채듯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쉬시오. 할 말도 있으니.”
“그럽시다.”
두 사람은 아들을 바깥에 격리하고는 방으로 들어섰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아낙이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쌀섬을 편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 없었다.
“어디서 난 쌀섬이오? 혹시,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거 아니오?”
“이 사람아. 나를 어떻게 보았기에 나쁜 짓을 운운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말로 나라에서 그냥 주었단 말이오?”
“그럼. 갚아야는 하지만 이자가 없어.”
“나라님께서 빌려주신 거라면 먹고 죽을 수도 없잖소.”
“죽기는 왜 죽어?”
석돌이 가당찮다는 듯 말하자 아낙이 중얼거렸다.
“갚아야 할 빚이 많으니…….”
“빚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라님께서 빚까지 다 갚아주셨다고!”
“……?”
아낙은 다른 세상의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석돌도 쩌렁쩌렁 웃으며 아낙을 흔들어댔다.
“이 사람아, 나라에서 빚을 전부 갚아주었다고! 빚을 다 갚아주고도 다시 빚을 지지 않도록 쌀섬을 더 내어주었다는 말이야!”
“생전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이라고는.”
“다 나라님 덕이야! 공납도 없애주시고, 빚도 없애주셨다고! 태평성대다, 태평성대!”
석돌이 두 팔 벌려 외치자 아낙은 지아비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울었다.
그날 저녁밥은 쌀밥이 고봉으로 나왔다.
* * *
다음 날 아침.
석돌은 가뿐한 마음으로 나섰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보였다. 모든 것이 우중충했는데 지금은 구름 낀 날마저 화창하게 보였다.
하지만.
“세상 참 좋아, 응?”
“수, 수노 어르신…….”
김 진사네 수노였다.
신세는 노비였으나 그를 감히 노비 나부랭이로 치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관아에서 빚을 대납해 달라 구걸했다면서. 자네가 진 빚으로 감히 나라에 폐를 끼쳐?”
“소, 소인이 죽을 때까지 일하더라도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 같아…….”
석돌은 눈물이 핑 돌았다. 길고 길었던 고생이 이제 끝나나, 싶었거늘 김 진사는 여전히 자신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수노가 외쳤다.
“이미 주인 어르신께서 자네가 부당하게 대납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관아에 고하러 가셨네! 자네도 가서 증언을 하게! 감히 원님과 나라님을 속였다고!”
수노가 석돌을 끌자, 석돌은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