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00화
68. 강병의 전제 (2)
“흠.”
나는 콧바람으로 운을 떼며 물었다.
“우의정 생각을 우의정이 직접 말하지 않고 경이 대신 전해주는 이유는 뭔가?”
“의정부에서 한 차례 논의되었는데 신 등이 실효가 없음을 지적하자 우의정이 대안을 생각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사옵니다.”
“그게 나와 관련이 있나?”
“우의정은 전하께서 하명하신 바가 있는데 아뢸 말이 없어졌으니 지극히 곤란해할 줄로 아옵니다.”
“하.”
나는 가볍게 웃었다.
딴에는 이이가 뭐라도 하려 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건가.
“신하들이 싸우지 않고 서로 아껴주는 모습을 보니 좋구나.”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정작 대안이 없군.”
“송구하옵나이다. 의정부에서는 전하의 지엄한 명을 수행하고자 매일 주요 의제로서 논하고 있나이다.”
“영의정.”
“하명하시옵소서.”
나는 어좌에 늘어졌다.
“천만 백성이 사는 이 나라에서 오직 일곱 사람을 뽑아 삼의정과 동벽, 서벽으로 삼아 왕의 바로 아래에 두고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게 하는데, 달포가 걸려서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꼭 그대들이 의정부 당상이 이유가 있는 건가?”
“신들이 미욱하여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니 지극히 죄스러울 뿐이옵니다.”
“논의 중에서 조금이라도 내가 주의할 만한 제안은 없었나?”
“근거가 미진하거나, 인과가 불분명하거나, 시행하는 방법이 복잡한 등 제안은 많았사오나 전하께서 관심을 가질 수준은 없었나이다.”
“비극이로고.”
“신을 포함한 의정부 당상들이 밤을 새서 논의하는 한이 있더라도 방도를 내어보겠나이다.”
“나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홍섬은 무슨 말인가 고민하다 물었다.
“방도가 있으시옵니까?”
“정 그대들의 논의가 지지부진하여 유의미한 결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부족한 식견으로라도 진행을 해보겠다는 거지.”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의정부에서 워낙 시간을 끌어야 말이지.
물론 백성을 부유하게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음을 안다. 고작 한두 달 논의해서 될 일이라면 진즉에 시행됐겠지.
내가 생각한 방도도 최고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시간만 낭비할 생각이라면 뭐라도 해보자는 취지다.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기왕 논한다면 회의 때 논하는 게 좋겠군.”
미리 말해봐야 두 번 말하는 꼴밖에 더 되겠나.
나는 그런 수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논할 건 끝난 것 같군. 달리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본론은 끝났고 윤대도 말미에 이르렀다. 나랏일과는 별개로 사담이나 나눠보고 싶었다.
“없사옵니다.”
“아무 말이라도 괜찮네.”
“하오시면……, 일전에 하교해주셨던 왜침에 대해 궁금한 바가 있사옵니다.”
“편히 물어보시게.”
“놈들이 정말로 쳐들어오는 것이옵니까?”
“어떤 취지로 묻는 건가?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가, 아니면 내가 전쟁 방비가 아닌 다른 것에 바쁜 것을 책망하는 건가?”
“책망이라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달리 보는 눈도 없고 공무도 끝난 느낌이니, 사실대로 말해보게. 내가 어디 영상이랑 보통 사이인가.”
친근하게 말하자 홍섬도 긴장이 가신 어조로 답했다.
“감히 사실대로 아뢰옵자면 둘 다이옵니다.”
“영상이 솔직한 심정으로 물어봐 주었으니 나도 솔직하게 답하지. 만일 폐주를 죽이는 데 영상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나는 왜침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을 걸세.”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이시옵니까? 혹시, 동래에서 신이 데려온 왜인도 전하의 사람이었다든가…….”
“하하, 나를 과대평가해 줘서 고맙군.”
나는 웃어주고는 답했다.
“내가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 거로 보이나?”
“내치에 집중하시는 것으로 보이옵니다.”
“강병의 전제는 부국일세. 내치와 외치는 근본적으로 하나지. 녹슨 창날과 썩은 화살대로 적을 무찌를 수는 없네.”
* * *
어전.
나는 제신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내가 의정부에 백성의 갈수록 가난해지는 일의 대책을 논하라 명하였거늘, 논의가 지지부진하여 달포가 넘어서도 결론이 나오지 않으니 민망하게 여긴다.”
“송구하옵니다.”
홍섬이 짧게 사과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나눈 말이 있으므로 길게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다.
“방도가 나오지 않으니 내가 경들에게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백성들이 갈수록 가난해지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차선의 방도를 취하며 시간을 버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신들의 시선이 모였다.
의정부에서 연일 대책의 강구를 주제로 삼아 떠드니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도성의 관리와 선비들도 제각기 방도를 논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대안은 나오지 않아 단지 술자리의 잡담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과연 왕은 무엇을 제안할까?
“나의 대안은 부를 어떻게 가르느냐를 떠나, 부 자체를 키우고자 한다.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금싸라기라면 백성들이 파탄의 지경까지 몰리지는 않을 것이다.”
좌우에 시립한 제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왕은 파격적인 존재였고, 과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남달랐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겠지만 대안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허나,
“어떠한 방도가 있겠사옵니까?”
이이가 물었다.
의정부의 대신이라고 꽉 막힌 꼰대라는 뜻은 아니다. 비율 대신 크기를 개선하자는 주장은 의정부에서도 잠깐은 논의된 적이 있었다.
문제는 방법이 무엇이냐다.
비율은 제도로 어떻게든 강제할 수 있지만 전체의 부를 키우자는 것은 밑도 끝도 없었다.
“아조의 부는 땅에서 비롯된다. 만일 백성들이 농지를 개간하는 것을 권장하고 도우며, 농사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면 모두의 소출이 늘어나지 않겠는가?”
여전히 막연하고 뻔한 소리였다. 제신들은 침묵으로 상세한 방법을 재촉했다.
왕은 기꺼이 말을 이었다.
“소작농 절대다수가 농기구와 종자를 지주에게 대여한다고 들었다. 이것이 백성들에게는 부담이니 만일 나라에서 농기를 주조하여 임대하고 종자를 변통하여 준다면 능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이가 따졌다.
“전하의 하교는 지극히 마땅하오나 세제개혁의 성과는 아직 수확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무하며, 조정의 예산은 지극히 제한적이옵니다.”
말은 좋지만 돈이 없어 실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라고 모르지는 않는다, 이이의 지적은 마땅했지만 뻔하기도 했다.
“합당한 지적이다. 그래서 나는 세제개혁이 시행된 경기도부터 제한적으로 지원하고자 한다.”
이제 백성들은 자신들 지역에도 세제개혁과 함께 농기를 지원해 달라 목소리를 높이겠지.
경기도로 한정된 개혁이 파격적인 진전을 이룰 터였다.
굉장히 약삭빠른 수작이었지만 개혁이란 이렇게 함께 묶어서 몰아붙여야 진도를 빨리 뺄 수 있는 법이다.
“팔도의 백성 모두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경기도의 백성만을 위해 집행한다면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것이옵니다.”
“재원은 전적으로 내탕금이 전담하겠다.”
나의 담담한 선언에 이의를 제기한 이이는 물론 좌우 대신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탕금은 왕의 사유 재산이다.
그동안 많은 신하들이 나라를 위해 왕에게 내탕금의 변통이나 혁파를 간청하였으나 실제로 내탕금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집행된 적은 손에 꼽았다.
그런데 왕은 국가의 중대위기가 아니라 고작 농기구를 나눠 뿌린다는, 일견 사소해 보이는 정책을 위해 사유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다.
“성상께오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내탕금을 열어주시니 신들은 그저 망극할 뿐이옵니다.”
“백성 없이는 나라가 없고, 나라 없이는 왕도 없는 법이다. 내가 마땅히 나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였으니 망극할 일은 아니다.”
“지극히 마땅한 하교이시옵니다. 허나 이전의 선대왕들께오서는 불가피한 사유로 내탕금을 열기를 주저하셨으나, 성상께서는 거침없이 결단하시어 마땅한 왕도를 보이시니 신들은 귀감으로 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경연 이후로 내심 삐졌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책을 재촉하고 의문도 제기하던 이이였다.
그런데 내탕금을 연다는 말에 단숨에 태도를 달리하여 나를 칭송하고 있었다.
‘귀여운 사람 같으니.’
나라를 경영하는 능력은 대단치 않았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대다수 관리보다 나았다.
나의 파격성이 전통적인 군주를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나라에는 도움이 된다면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겠지.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대학자로 명망이 높은 우상이 나를 귀감으로 삼는다니 기분은 좋다만, 경들이 나의 온정을 믿고서 매번 내탕금을 열어주리라 기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각골명심하겠나이다.”
“호조에서는 집행에 필요한 예산을 계산하여 보고하라.”
나의 명령에 호조판서 이산해가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드옵나이다.”
이산해도, 이이에게 밀려 내색은 못했으나 내심 감동한 표정이었다.
매번 쪼들려서 갈수록 허리를 조아가는 호조에게 방대한 내탕금의 지원이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광흥창과 풍저창에 저장된 해묵은 곡식의 수효를 알아내라.”
“염려치 마시옵소서. 마땅히 호조에서도 거들겠나이다.”
농기구 주조에 보태라는 뜻으로 알았나.
“묵은 곡식은 농기구 주조에 쓰지 말고, 팔도로 각기 나누어 백성들의 빚을 대납하라.”
제신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신 찬양을 늘어놓던 이이도 당혹한 어조로 아뢨다.
“성상께서 백성들을 아끼시는 마음은 신들도 아는 바이옵니다. 허나 사사로운 빚을 나라에서 대납하여 준다면, 백성들은 나라가 다시 갚아줄 것을 믿고서 만연하게 빚을 질 것이옵니다.”
“그냥 내어주라는 것이 아니라, 이자 없이 빌려주라는 뜻이었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줄로 아옵니다.”
“내가 묵은쌀을 내어가길 원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빚으로 패망하지 않도록 돕기 위함만이 아니라, 올해 세입도 우려하기 때문이다.”
경기도로 한정되었으나 세금의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했던 공납이 세곡으로 대체됐다.
실로 엄청난 양의 곡식이 창고에 쌓이겠지. 수표를 동전으로 바꾼다고 생각해보라. 미어터질 수밖에 없다.
과연 이산해도 거들고 나섰다.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해묵은 쌀을 빌려주어 새 쌀로 교환하는 일은 흔히 해왔을 뿐만 아니라, 세입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창고를 미리 비워둘 필요가 있습니다.”
홍섬이 물었다.
“이미 세입을 대비하여 광흥창과 풍저창, 군자감과 예빈시의 창고를 확장하기로 하였는데 굳이 더 비울 필요가 있단 말인가?”
“만일 조세가 예상대로 거둬진다면 제때 확장이 끝나더라도 세곡이 창고를 채우다 못해 흙바닥 위에 쌓아야 할 판이옵니다.”
“허.”
“세곡을 버릴 수는 없으니 차라리 백성이 자매(自賣, 스스로를 노비로 팜)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라도 민간에 푸는 편이 나을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홍섬이 말끝을 늘어뜨리자 제신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묵은 쌀은 예산을 집행하기에는 가치가 낮았다. 이대로 쥐가 파먹고 썩게 내버려 둘 바에야 풀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차질 없이 시행하되 각 목민관은 대납할 경우 빚을 진 경위를 상세하게 기재하여 보고하며, 일신의 열락을 위해 가산을 탕진한 자들에게 국고를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술이나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서 빚쟁이가 된 놈들에게는 쌀 한 톨도 아까웠다.
놈들도 노비가 되는 편이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제어하는 데 도움 되리라.
“또 삼사의 관리들은 국고의 집행을 엄중하게 감시하여 탐오한 자가 가로채거나 사사로이 베풀어 낭비하는 경우를 방지하고 단속하라.”
그러라고 있는 놈들 아닌가.
제신들은 백번 지당한 명령에 합창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