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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99화 (19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99화

68. 강병의 전제 (1)

경연장.

삼의정 모두 영사로서 경연관에 참석할 자유가 있지만, 오늘 자리한 사람은 오직 우의정 이이뿐이다.

어전에서 들은 말이 있어서겠지.

다른 두 사람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준 거다.

덕분에 이이 외에는 시답잖은 경연관 나부랭이들이 다였다.

다들 앞선 왕을 쳐죽이고 왕위에 오른 나를 상대로 뭐라도 해내고자 들뜬 기색이었지만, 나는 철부지들과 어울리고자 경연에 참석한 게 아니다.

“경서를 펼치기 전에, 내가 그대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이이가 대표로 답했다.

“하문하시옵소서.”

“증명할 수 없는 이론은 논할 가치가 있나?”

경연관들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조선말이 아니라 외계어라도 들은 몰골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나.

대학자인 이이도 예상 밖이었다는 듯 당혹감을 비쳤다.

“신은 이론이란 자체만으로 논할 가치가 있다, 생각하옵니다.”

“나는 아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시옵니까?”

“증명이나 끝맺음 없이 왈가왈부 떠드는 것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심력과 언어의 낭비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이이는 당차게도 나에게 경연을 요청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훈수에 나는 금방이라도 이이를 숙청할 기세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나는 경연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짧은 시간 사이 변심해서가 아니었다.

이이가 답했다.

“어떠한 행동이 진정으로 선한지, 악한지 규정할 수 없음에도 인간은 선행을 하옵니다. 이를 통하여 짐승과는 다른 존재가 되니, 행함과 마찬가지로 논함 역시 증명이나 결말과 같은 분명한 경계는 필요치 않을 줄로 아옵니다.”

“와닿지 않는군.”

“다른 예시를 들어드리오리까.”

“아니. 경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나에게는 와닿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이옵니까?”

이이가 물었다. 질문치고는 어조가 푹 가라앉은 것이 추궁처럼 들렸다.

내가 고작 억지라도 부리는 줄 아는가.

“경은 나와는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지.”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샛길로 빠지고 싶지는 않지만, 별수 없지. 먼저 선과 악은 사람마다 자의적으로 평가하므로 규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인간 역시 짐승과 다르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동물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하다곤 하나 대부분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사옵니다.”

“예시를 들어보라.”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은 분명히 선이 아니겠사옵니까?”

“하!”

나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경은 내가 충이 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고 싶은가 보군.”

“어찌 신하가 감히 주인을 시험할 수 있겠사옵니까. 단지 충과 효만큼 확실한 선이 없기 때문에 예시로 들었을 뿐이옵니다.”

“좋아, 내가 확실하게 알려주지. 충은 선이 아니다.”

내가 확실하게 선을 긋자 이이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왕이 충을 선이라고 포장하지 않으면 무엇을 충이라 포장한단 말인가.

“효 역시 충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선이 아니다. 단지 사회적으로 이롭게 보일 뿐이지.”

“사회에 이롭기에 선이라 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경은 내 말을 자세히 듣지 않았군. 이롭다고 한 게 아니라, 이롭게 보인다고 하였다.”

“실제로는 충과 효가 사회에 이롭지 않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것 역시 선이나 악을 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

이이는 침음을 흘렸다.

말은 없었지만 불만족의 신호임은 알겠다. 나는 기꺼이 설명을 이었다.

“걸인에게 밥을 주는 것은 선인가?”

“그런 줄 아옵니다.”

“만일 걸인이 타인에게서 밥을 빌어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한평생 스스로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하고 남의 식사만 축낸다면 과연 선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선은 아닌 줄로 아옵니다. 허나 비약이 아니겠사옵니까?”

“걸인이 흔히 자립하는 세상이었다면 비약이 맞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늙고 장애를 입은 자들을 거두기 전, 도성의 걸인이란 한결같은 운명이었다.

남은 한평생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고, 시취를 풍길 즈음에 발견되어 시구문 너머에 버려졌다.

대조선의 복지란 죽은 사람의 제사는 차려줘도 산 사람의 밥상은 차려주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걸인을 박대하여 굶어 죽게 만드는 것이 선이라고는 못할 것이옵니다.”

“비참한 인생을 언제까지고 영위하게 하는 것보다야, 서둘러 굶어 죽게 하는 것이 오히려 온정일 수도 있는 법이다.”

“너무 가혹한 처사이옵니다.”

“경은 사지가 썩어들어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

“나는 국경에서 오래 일해봐서 잘 알지. 멀쩡한 팔에 화살을 비켜 맞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밤낮없이 통증이 이어지다 결국에는 색이 변하고 감각도 없어지지.”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경연관들은 고개를 숙였다.

“사지를 잃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남은 한평생 폐질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죽는 것보다도 더 가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생명을 살리고자 한다면 썩어가는 사지를 자르는 수밖에 없네. 그것도 멀쩡한 부분까지 포함해서 아주…… 넉넉하게 말이야.”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 경이 답해보게. 생명을 지키고자 사지를 하나 잘라내는 것을 감내할 수 있다면, 어찌 남은 한평생 고통받는 것을 막고자 짧은 고통을 주는 것이 가혹하단 말인가?”

“전하의 말씀은 일부 옳을 수 있겠으나, 매사에 냉혹한 법도를 강제한다면 목숨을 지키더라도 기쁘지 않을 것이고 평생의 고통을 면하더라도 다행스럽게 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나. 분명한 것은 없다고 말이야.”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결론을 맺지 못하는 논의이옵니까?”

“그렇다. 어떤 행동이 진정으로 선과 악인지 규명하고자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지.”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처음부터 백성이 걸인이 되지 않도록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가꾸고, 만일 걸인이 된다면 자립할 기회를 주도록 돕는 것이다.”

사설이 길었다.

결론을 내야겠군.

“나는 앞서 나를 태종 대왕과 비교했다. 그분께서는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를 철퇴로 때려죽이고 정도전을 숙청했지. 나아가 나라에 오랫동안 봉사한 노신을 단지 정치적인 이유로 제거했다.”

태종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고려에서 답습한 제도들을 개혁했고 못난 장남 대신 총명한 막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그래서 약점을 갖게 된 차기 왕을 위해 제 손을 더럽혀가며 외척을 처단했다.

나아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제들을 참살하기까지 했다. 괜히 킬방원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그래서 조선은 어떻게 되었나?

아들 세종의 치세가 되어 둘도 없을 황금기가 펼쳐졌다.

“경이 나를 경연장으로 끌고 와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나는 가르침을 남기고서 죽은 지 천 년이나 지났음에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 실패자들의 담론에는 관심이 없다.”

심력과 언어의 낭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

“나는 오직 오직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을 궁금해할 뿐이다.”

이이는 대학자로 유명한 만큼 선조를 상대로도 유교적 덕목과 가르침을 논했다.

또 왕이 다스리고자 한다면 학문에 공을 쏟아야 한다며 강조했고 경연에 부지런히 나와 고서를 많이 읽으며, 마음을 수양하는 법을 공부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 일환으로는 별시에서 장안을 거둔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이 대표적이리라.

이이는 천도책에서 이(理)와 기(氣)를 통해 자연현상과 통치자의 태도를 설명했다.

나는 그런 말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다.

미래인으로서 자연현상의 원리를 이미 알고 있어서나, 철학을 경멸해서가 아니다.

나는 왕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것이 뜬구름 잡는 멍청한 훈계질이나 듣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세법을 개혁하였으나, 백성이 가난하여 조세를 낼 수 없다면 천하제일의 세법이라도 의미가 없다. 분명 나라가 개국하였을 때는 백성들이 부유하였는데 시일이 지나갈수록 전조의 말엽처럼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있지. 경은 대책을 강구하라.”

엄중히 명하자 이이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신이 일전에 폐주에게 아뢰기를…….”

“강구하라 하였지 읊으라 한 적은 없다. 대사를 논하는 것은 경연 따위의 소관이 아니다. 보고는 다음 조하에서 받겠다.”

경연에서도 나랏일이 논해지곤 했지만, 나는 떨거지 같은 당하관들 앞에서 나랏일을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랏일이란 마땅히 제도를 법제화하고 시행할 수 있으며 현실적인 감각이 충분히 있는 자들 앞에서 논함이 마땅했다.

“물러들 가라.”

파격적인 경연은 그렇게 끝났다.

도성은 갑론을박으로 시끄러워졌다.

새로운 왕은 전통적인 군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아가 경연을 통해 전통적인 군주를 연기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과연 이러한 군주가 조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일각에서는 천천히 가라앉는 조선을 쇄신할 군주로 보았다. 일부에서는 당장은 좋은 결과를 낼지라도 장기적으로는 혼란을 야기하리라 예상했다.

또 누군가는 금상의 치세가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최악의 시대가 되리라 걱정했고, 다른 누군가는 명의 태조 홍무제나 성조 영락제처럼 둘도 없을 영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찬양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아무리 떠들건 달라질 건 없었다.

나라를 운영하는 자는 왕이었으니까.

* * *

윤대.

평소와는 달리 신하 몇 명, 적게는 단독으로 왕과 인견하여 이런저런 일을 논한다.

영의정을 지내는 홍섬이라고 빠질 수는 없었다.

“우의정에게 대책을 명하셨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랬다. 진전을 보이던가?”

“예. 다만 조심스러워하고 있사옵니다.”

“정책이 과격한가 보군.”

“백성들을 하루아침에 부유하게 할 수는 없사옵니다. 만일 그런 방도가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강탈하여 나눠주는 것밖에는 없겠지요.”

“이이의 방식이 그렇다는 말인가?”

“거의 그러하옵니다.”

홍섬이 쓰게 답했다.

“오늘날의 백성들이 과거와 달리 가난한 이유는 자작농이 줄어들고 소작농이 늘어났기 때문이옵니다.”

“전조 고려를 그대로 따라가는 중이지.”

고려가 망하기 직전, 백성들은 절대다수가 남의 땅을 부치며 땅의 주인을 자처하는 여러 귀족에게 소출을 모조리 바쳐야 했다.

“우의정은 과거의 과전법 제도가 병작반수를 금하였던 것을 다시 시행함으로써 백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학자로서는 현명할지언정 나랏일하는 사람으로서는 현명하다고 못 하겠군.”

“다소 과격하고 미진한 점이 있음은 사실이옵니다.”

병작반수(竝作半收)란 소작농이 지주에서 농사의 결과물, 즉 소출의 절반을 땅 임대료로 내는 관행을 의미한다.

고작 땅 주인이라는 이유로 남이 일한 결과물의 절반을 가져가니 가혹한 처사였다.

게다가 지주가 고작 땅이 한 조각만 있겠는가. 대지주라면 족히 수백 명에게 땅을 빌려주었을 테고, 가만히 앉아서 수백 명의 생산물을 받아먹게 된다.

‘부당하다면 부당하지만.’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별개다.

“만일 지주에게 지대를 제한한다면 소작농들은 모조리 파멸할 거다. 지주들이 땅을 빌려주는 대신 차라리 노비를 더 사들여서 직접 농사를 지으려 할 테니까.”

“그러하옵니다.”

부칠 땅이 없어진 소작농들은 절반이 아닌 전부를 바치는 노비로 전락하겠지.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이익을 제한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상황을 타개하고자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경제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제도를 철저히 입안하더라도 집단지성은 샛길을 만들어낼 테니까.

그걸 과소평가하고서 나라가 경제를 함부로 제한하고 지배하려 들었다가 푸짐하게 똥만 싸고서 사태를 악화시키는 건, 역사가 수도 없이 증명했다.

나는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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