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98화
67. 일조편법 (2)
“저, 전하. 드디어 면적을 계산했사옵니다.”
하급 관리와 선비들이 상기된 얼굴로 찾아왔다.
반나절을 꼬박 논밭을 나다녀서인지 바짓단과 도포자락은 흙먼지에 지저분해졌고, 등판과 가슴은 땀으로 젖어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책상물림 양반들에게는 가혹했겠지.
이제 아전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이해…… 했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앞으로는 별생각 없이 입만 터는 일은 줄어들겠지.
“보고하게.”
“예! 소신들은 마을을 먼저 동서남북으로 구획을 나누어, 정확하게 사람을 나누어 측량하였습니다.”
“나는 방식보다는 결과가 더 궁금하다.”
건조하게 말하자 보고하던 관리는 단숨에 풀이 죽어서 답했다.
“소, 송구하옵나이다.”
“계속하라.”
“전체 논밭의 면적은 삼백십 결이옵니다!”
“그리고?”
“그리고…….”
관리는 더 할 말이 없었는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 이상을 바랄 줄은 몰랐다는 듯.
“내가 그대들을 모아 동리의 간전(墾田, 개간된 땅)을 측량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소신들이 감히 전하의 대업에 누를 끼쳐…….”
“누를 끼친 건 사실이지. 그렇다고 내가 이따위 장난질로 보복하려 들 사람으로 보이나?”
“아, 아니옵니다.”
“그대들 중에 어깨 위에 얹은 게 장식이 아닌 자가 있다면 나와서 말해보라. 내가 어째서 그대들에게 땅을 측량하게 시켰나?”
하급 관리들과 선비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무안한 분위기 가운데 시간만 흘렀고 대신들은 한심한 표정으로 좌중을 바라보았다.
어전에서는 내가 한 말이 있어 대신들은 내가 왜 이놈들을 불렀는지 알고 있었다.
-평소에 고생을 안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생을 우습게 아는 것이다. 만일 영상처럼 전형적인 탁상공론으로 내 귀를 더럽히겠다면 친히 가르침을 내려주겠다.
그래서 내가 떨거지들을 불러 가르침을 주고자 출타를 명하자, 만류했던 대신들은 좌중의 철부지들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았다.
굳이 옥체를 거동하게 만들어 누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왕이 정무를 볼 귀한 시간까지 빼앗았기 때문이다.
물론 호종을 위해 쉬지도 못하고 따라 나와야 했던 귀찮음이 더 컸겠지만.
그렇다고 왕을 원망할 수는 없으니, 떨거지들을 향한 대신들의 표정은 갈수록 굳어갔다.
눈치가 보였는지 결국 관리 하나가 나섰다.
“감히 추측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소신들에게 세법의 복잡함이 주는 폐해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내려주시고자 측량을 맡기셨나이다.”
“정확히 말하면 맡긴 건 아니지. 이미 아전들이 먼저 측량을 했으니까.”
“…….”
“하지만 추측은 맞았다. 그대들은 형평성을 중심으로 갖은 이유를 붙여 나의 세법 개혁을 반대했지.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과연 그대들이라면 기존 세법대로 전결(田結)을 정확하게 부과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결과물은 예상대로 참혹했다.
“그런데 고작 마을의 농토가 얼마인지만 확인하고서 어떻게 과세를 한단 말인가? 마을 단위로 알아서 내라고 할 참인가?”
“소, 송구하옵나이다.”
“이 나라에서 나랏일을 하고 있으며, 또 하겠다는 작자들이 떼로 모여서 내놓은 결과물치고는 참혹하구나.”
“…….”
“전체 면적은 알아냈다만 개중에서 논과 밭의 면적이 각기 어떤지는 확인하였는가?”
무리는 고개만 숙인 채 침묵할 뿐이었다.
책상물림 아니랄까 봐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었다.
“주척을 보여라.”
“예.”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지저분해진 주척을 꺼냈다.
“무식하게 땅에 대고서 일일이 쟀군.”
“…….”
“아전들은 땅을 어떻게 재나?”
나의 부름에 해진 갓을 쓰고 철릭을 두른 장년인이 나섰다.
“이것으로 땅을 재옵니다.”
아전은 기꺼이 밧줄을 꺼냈다.
밧줄에는 일정한 간격마다 검게 먹물이 칠해져 있었다.
“두 사람이 밧줄을 잡고 서기만 해도 거리를 알 수 있겠군.”
“그러하옵나이다.”
아전은 은근히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왕이 찾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숨이 턱 막혔겠지.
하지만 콧대 높은 양반 종자들이 흙범벅이 되어가며 멍청하게 자를 일일이 대어가며 재는 모습을 보고는 고소했을 거다.
“보고해라. 이 마을의 전결은 어떻게 되나?”
아전이 기꺼이 답했다.
“전체 전결은 이백아흔일곱 결이옵고, 논은 육십 결이옵나이다.”
“달리 말하면 그대들은 전체 면적조차 제대로 재지 못했다는 뜻이지. 만일 그대들의 조사를 믿고서 과세한다면 백성들은 부당하게 과도한 세금을 내야 했다. 능히 책임을 물어 벌을 줘야 할 일이지.”
마치 그렇게라도 할 것처럼 말하자 떨거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신들이 우매하며 함부로 간하였나이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비를 청하는 말들이 곡소리처럼 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고는 명했다.
“이만하면 그대들도 나의 뜻을 이해헀으리라 믿는다.”
“각골명심했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서둘러 맞장구치는 가운데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들을 불러 친히 가르침을 내린 이유는 제2의, 제3의 그대들이 나오지를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신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의 깊은 하교를 잘 알리겠나이다.”
“그래야 할 것이다. 만일 그대들의 것과 같은 상소문이 또 올라와 나를 번거롭게 한다면, 가르침이 부족했던 것으로 알고서 남해의 섬에서 농지를 측량케 할 터이니.”
말이 측량이지 유배나 다름없었다.
“저, 전하!”
“신들이 어찌 전국팔도의 사람들을 다 설득하겠사옵니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비를 구걸하는 목소리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좋다. 앞으로 올라오는 상소의 주인들에 대해서 알려줄 터이니, 같은 상소가 올라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설득이 안 된다면 쌍욕을 해서라도 상소가 더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겠지.
대신들도 아닌 고작 하급 관리와 동네 선비 따위에게 가르침을 주겠노라 시간 쓴 이유는 내가 친절해서가 아니다.
놈들 말마따나 개혁에 반대하는 자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전국팔도에 산재한 고을마다 한 놈이 상소 한 번 올려도 나에게는 테러다.
그걸 이 친구들도 알아야지.
* * *
“경기도의 목민관들에게 일괄적으로 수미법(收米法, 공물을 세곡으로 대체함)과 영정법(永定法, 땅의 면적만 고려하여 과세함)의 시행을 지시하였사옵니다.”
홍섬이 보고했다.
떨거지들을 불러다 개쪽을 주고서 겁박하자 반대의 목소리는 쏙 들어갔으며 나는 그대로 수미법에 이어 영정법의 시행도 강행했다.
조정의 반응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다.
좋은 일만 있지는 않겠지.
각오한 일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민심을 확인하겠다는 명분으로 정책을 홍보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을 목매달았다.
단지 입장이 달랐을 뿐인 자들은 설득하고 가르치고 겁박했다.
이만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으니,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지.
“수미법과 영정법의 적용 대상이 금년은 경기도뿐이니 운하도감에는 기한을 맞추고자 무리할 필요가 없다 전해라.”
“예.”
“정책의 변화가 성급하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음을 안다. 하지만 나랏일은 지체할 것이 아니므로 강행하였다.”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감사와 목민관들에게 알려라. 법이 시행되었으니 사유와 명분을 불구하고 수령이 자의적으로 잡세를 거두는 것을 일체 금한다.”
엄중하게 선언하자 홍섬이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잡세를 일체 금하신다면 만일 불가피하게 조세를 거둬야 할 때 대비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경의 말대로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목민관은 반드시 나의 인가를 받은 뒤에 징수하라. 절차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부정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알고서 관련 법에 의거하여 벌하겠다.”
굳은 의지가 비친 것일까.
홍섬은 허리만 숙일 뿐이었다.
“수미법과 영정법이 시행되었으니 조세의 납부와 누락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두 법이 가진 최고 장점이었다.
잡다한 공물과 잡세를 일체 금하고 땅의 면적만을 기준으로 과세한다. 달리 말하면 세금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더 나올 이유도 없고 덜 나올 이유도 없다.
“다만 전적으로 장부에 의존하여 과세하는 것이니 각 고을에서 토지를 정확하게 조사하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각별히 강조하신 바이므로 목민관들이 알아서 경계할 것이옵니다.”
“그래야 할 것이다.”
나라가 안정되면서 반정의 공으로 위사가 된 자들이 대거 식충이가 되었다.
배나 불리라고 녹봉주는 건 아니니 어사를 삼아 경기도 각지에 보낼 생각이었다.
어중간한 일이라면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이 공직자들의 습성이다. 토지 조사를 명하였으나 지난 장부를 그대로 베껴다 쓸 놈이 없지는 않겠지.
태만한 놈들은 주기적으로 잡아다가 쓴맛을 보여줘야 나라의 수질이 맑아지는 법이다.
“금일 회의는 이만하면 되었다. 다들 물러가도록.”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이이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전하. 신에게 아직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막 일어서던 나는 도로 어좌에 풀썩 앉고는 물었다.
“말하라. 우의정.”
“나라가 안정되었고 종묘사직이 반석에 서게 되었으니, 이제 전하께서도 경연에 참석하셔도 될 줄로 아옵니다.”
“생각해 보겠다.”
“전하께서는 폐주보다 더 나은 왕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간하는 것이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경연에 참석하여 모범적인 유교 국가의 왕을 연기하지 않으면, 폐주를 친 명분이 퇴색될 거라는 말이었다.
의도가 조언인지 경고인지, 혹은 겁박인지는 모르겠으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나는 우의정이 기대하는 부류의 왕이 아니다.”
“신은 전하께서 명군이자 성군으로 남으시길 원하옵니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아 미안하군. 나는 세종 대왕과 같은 명군도 아니고 성종 대왕과 같은 성군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왕위에 앉아있는가?
이이와 주변의 제신들이 그러한 생각이 들 즈음 말을 이었다.
“나는 당대의 사람이 바라지는 않지만 후대에서는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의 왕이 되기를 원하지.”
“신은 미욱하여 전하의 하교를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세종 대왕께서 아조를 다시없을 영광으로 이끈 것은 앞선 태종 대왕께오서 시건방진 놈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지. 우의정, 그대는 정도전을 어떻게 생각하나?”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와 결탁하여 쿠데타와 찬탈에 명분과 철학을 제공했으나,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결국 태종에 의해 제거됐다.
지금 이이의 처지도 다르지는 않았다.
내가 왕으로 인정받는 데 한 팔 거들었지만 나와 그의 지향점은 다르다.
아쉬워진 게 없어진 나에게 인내심을 시험하고자 한다면 좋은 결말을 맞기는 어려울 터였다.
“…….”
이이가 당혹한 표정을 짓자, 나는 농이라도 했다는 듯 손을 저었다.
“금일에는 경연에 참석하겠다. 부디 우의정도 함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