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97화
67. 일조편법 (1)
선비들은 한경록의 죽음을 반가워했다.
농군들은 한경록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반가워했다.
갓 쓴 대단한 인간들이 구석에서 히히덕거릴 동안, 상투를 드러낸 채 햇볕에 까맣게 탄 자들도 말을 나누었다.
“나랏님의 사위라는 놈이 방납쟁이를 열일곱이나 거느리고 있다니!”
“역적이 어디 달리 있단 말인가? 그나저나 방납쟁이들이 깡그리 목이 매달렸다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군!”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가시는 기분일세!”
방납업자들은 관청이나 수령과 결탁하여 백성들이 반드시 자신들을 통해야만 공납을 낼 수 있게 했다.
만일 공물의 몇 배나 되는 삯을 바치지 않는다면 빠짐없이 탈세자가 되어 감옥에 갇혀야 했다.
농군들은 매질은 견뎌도 감옥에 갇히는 것은 견디지 못했다.
농번기에 잠시라도 논밭을 방치한다면 한 해 농사를 통째로 망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당해가며 한 해 농사를 완성하여도 결국은 방납업자들에게 바치게 되니, 백성들은 못 죽어 사는 판국이었다.
이런 때 방납업자들의 떼죽음 소식은 가뭄의 단비였다.
“예전에는 항상 뭐라도 하는 척만 하더니, 나랏님이 바뀌고서 이제야 달라질 모양이네.”
“그러게. 있는 놈들은 죄를 저질러도 뇌물을 바치고 죄를 피하던 세상이 이제야 달라질 모양일세!”
“놈들이 바치는 뇌물이 어디 자기들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뇌물인가? 다 우리들 피가 아닌가!”
“맞아, 맞아!”
“뒈진 방납쟁이 시체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면 좋겠는데!”
농군 하나가 이를 갈자, 곁의 장정이 물었다.
“해코지라도 하실 생각인가?”
“흥, 해코지는 무슨 해코지? 죽어서도 편할 자격이 없는 놈들일세!”
주변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좌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조용히 일렀다.
“도성의 모든 시체는 항상 시구문을 통해서 빠져나가지. 수문군 몇 명에게 공짜 술만 대접해 줘도 행방은 대강 알걸…….”
수문군도 결국은 세금을 내는 보통 백성이었으니까.
주변 농군들의 눈빛이 바뀌더니 미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 * *
“어전이 평소답지 않게 조용하군.”
한경록과 놈에게 뇌물을 바치던 떨거지들의 목이 사이좋게 걸려서겠지.
천박한 방납업자들이야 뒈지건 말건 연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던 놈들이라 그들의 죽음을 반가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의빈은 다르다.
개중에서도 한경록은 무려 중종의 부마로, 이씨만 아닐 뿐이지 왕실 구성원 중에서는 하원군이나 하릉군을 능가하는 어른이었다.
그런 의빈이, 이전에도 거론되었던 죄가 새삼스럽게 한꺼번에 거론되었다고 사형마저 구형되는 것은 무척이나 이례적이었다.
왕에게는 유사시 자신의 편으로 남아줘야 할 왕실의 지지가 중요했고, 그래서 역대 왕들은 항상 종친과 의빈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왕실과는 거리가 멀지.’
선조와 촌수를 따지려면 무려 태종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실제로도 나는 조부 때부터 왕가와 확실하게 멀어져 종친도 아니게 되었다.
단지 전주 이씨 집안의 사대부 중 하나일 뿐.
덕분에 왕위에는 올랐으나 지금 왕실을 구성하고 있는 중종, 인종, 명종의 종친과 의빈들은 이 시대 기준으로도 남이었다.
이들의 충성이란 단지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는데 굳이 목숨을 시험하고 싶지 않은 자들의 어중간한 협조에 지나지 않았다.
상황만 급변하면 언제든지 태도를 달리할 자들이었고, 덕분에 나는 이전의 왕들과는 달리 종친과 의빈들에게 설설 기지 않아도 됐다.
오히려 신하들이 의빈을 하루아침에 죽이는 것은 전례가 없다며 재고를 부탁했으나 나는 사사로 타협하는 척, 결국 사형을 집행했다.
‘정치적인 이해를 떠나서 제신들 눈에는 무자비한 걸로 보였겠지.’
대놓고 한경록 앞에서 내가 잔인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피를 안 뿌리는 줄 아느냐, 당당하게 말하기까지 했으니.
제신들이 조용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견이 없다면 일단 경기도부터 수미법(收米法)을 시행하겠다. 호판?”
“예, 전하.”
이산해가 대답과 함께 한 걸음 나왔다.
그는 내가 선조를 죽인 직후부터 담담하게 충성을 바쳤다. 알게 모르게 엮이고 받아먹은 것이 많아, 나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스스로가 원한 충성인지 이해관계 굴복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이산해는 잡음 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판서 자리에도 오르지 않았나.
“그대는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공물의 가치를 세곡으로 환산하여 새로이 적용될 수미법의 세율을 산정하라.”
“명을 받드옵나이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연분구등법과 전분육등법은 폐하겠다.”
“……!”
제신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분구등법이란 한 해의 농사가 풍작인지, 흉작인지를 상상년(上上年)부터 하하년(下下年)까지의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 제도였다.
또 전분육등법은 토지의 등급에 따라 여섯 등급을 나누어 각기 조세 대상이 되는 ‘결(結)’의 면적을 달리하는 제도였다.
각기의 등급에 따라 유기적으로 조세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현실적으로 과세하자는 것이 두 제도의 취지였다.
그런데 이를 폐하자니 신하들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리일 수밖에.
영의정 홍섬이 대표로 나섰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연분구등법과 전분육등법을 폐지하고자 하시옵니까?”
“두 가지 제도의 취지는 좋으나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먼저, 연분구등법은 하하년(下下年)으로 고정된 지 오래 아닌가?”
하하년(下下年) 기준 세율은 결당 4두(斗)에 불과하다.
현재 1결의 생산량이 400두이니, 세율이 고작 1%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어째서 공납이 백성에게 부담이 되겠는가?
이유가 달리 있지 않았다. 백성을 위하고자 비현실적인 세율을 명목으로 걸었으나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필요분을 공납이라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거두게 되면서 공납의 비중이 커지고 방납이 기승을 부리게 됐다.
“전하.”
홍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분구등법이 다소 유명무실해진 점은 제신들도 인정하는 바이옵니다. 허나 전분육등법은 어찌하여 폐하고자 하시옵니까?”
“전분육등법은 과세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하오나……. 전국팔도의 토지마다 질이 좋고 나쁨이 있사옵니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동일하게 과세한다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무슨 형평성 말인가.”
“만일 토질에 관계치 아니하고 일괄적으로 과세한다면 질 좋은 땅을 가진 자는 조세가 줄어 더욱 부유해지고, 질 나쁜 땅을 가진 자는 조세의 부담이 커져 더욱 가난해질 것이옵니다.”
그것이 전분육등법의 의의였다.
농사의 어려움은 토지의 질과 무관하다.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농지의 면적은 정해져 있다.
누구는 질 좋은 땅을 가져 많은 소출을 얻고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해 소출을 조금 얻는다면, 마땅히 세금도 달라야지 않겠는가.
“나라고 전분육등법의 취지를 모르지는 않는다.”
“하오시면 어찌하여 법을 폐하고자 하시옵니까?”
“전분육등법을 제정하신 세종 대왕께서는 간과하신 점이 하나 있지.”
전분육등법은 물론 연분구등법도 세종의 작품이다.
세종 이전에도 삼등전품제와 답험손실법이라는, 각 제도의 원형은 존재했으나 불합리하고 미진한 점이 많아 지금의 형태로 고친 것이다.
문제는,
“세종 대왕께서는 국가의 역량을 과대평가하셨다.”
천재가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남들도 나만큼은 하겠지? 가 바로 그것이다.
“고작 논밭 한두 개가 아니라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는 데 토질에 따라 기준도 다르다면, 과연 조사가 정확하게 이루어지겠는가?”
고을의 모든 땅의 품질을 일일이 검사하고 각기 다른 규격으로 정확하게 면적을 측량해야 한다면…….
어떤 미친놈이 진을 빼가며 그러겠나?
나 같아도 이전의 토지대장을 그대로 베껴 쓸 터였다.
“토지 조사가 미진한 점은 신들도 인지하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철저하게 감시한다면 효과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렇다면 영상부터 자원할 건가? 원한다면 전국팔도를 유람하게 만들어 주지.”
단숨에 아가리가 봉인되는 홍섬이었다.
“평소에 고생을 안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생을 우습게 아는 것이다. 만일 전형적인 탁상공론으로 내 귀를 더럽히겠다면 친히 가르침을 내려주겠다.”
광산에다 달포만 박아둬도 마음 깊게 통감할 거다.
이걸 전문용어로는 ‘노동 교화’라고 하지.
“한 현인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나랏일을 하는 자에게는 나라의 역량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
“수미법이 시행되는 경기도에는 연분구등법과 전분육등법을 함께 폐한다. 공납을 조세를 전환하여 한해 흉풍, 토질의 질에 무관하게 같은 면적이라면 동일하게 과세하겠다. 정확한 세율은 호판이 알아서 준비하라.”
제신들은 당혹한 기색이었으나, 들은 말이 있어서인지 차마 나서지 못하고 입술을 말거나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표했다.
오직 호조판서 이산해만이 예를 표할 뿐.
“명을 받드옵나이다.”
* * *
논밭 사이에 왕의 거처가 소박하게 마련되었고 몇 명의 대신과 수 백 명의 갑사들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다.
근처의 마을 사람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나랏님이 친림하셨다니 멀찍이서라도 용안을 보고자 모여든 장정과 낭군으로 은근한 소란이 이었다.
그 가운데.
“저, 전하…….”
소박한 차림을 한 선비 하나가 난색을 표했다.
이 친구는 음죽(陰竹, 경기도 이천)에 사는 진사 전욱으로, 왕이 추진하는 조세개혁에 감히 형평성을 어그러뜨린다고 상소를 올린 전력이 있었다.
이외에도 비슷한 처지의 관리와 선비 몇 명이 죄인 취급을 받으며 모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갑자기 신들에게 일대의 토지 면적을 조사하라 명하시니, 어찌해야 할 줄 모르겠나이다.”
“그대들이 토지 조사를 우습게 알기에 행동으로 증명하기를 원하는 것인데, 벌써 나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인가?”
전형적인 탁상공론으로 귀를 더럽히는 놈들은 광산에 처박겠다고 했지만…….
이 놈들이 나쁜 취지로 상소를 올린 건 아니어서 노동 교화의 강도를 조금 감해주었다.
직접 토지의 면적을 조사하는 것으로.
“어찌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나에게 올린 상소들은 팔자 좋게 구들장에 앉아 나랏일을 방해할 생각으로 끄적인 것에 불과했나?”
“아, 아니옵니다! 바로 시행하겠사옵니다!”
관리와 선비들은 대책도 없이 일단 물러났다.
그러더니 구석에 뭉쳐서 이런저런 토의를 한다. 결국에는 토지를 측량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는지, 사람 하나를 보내 논의를 보고했다.
“땅을 재기 위해서는 주척이 필요하니, 감히 사람 하나를 보내 관아에서 주척을 빌리고자 하옵니다.”
“그리하라.”
“망극하옵나이다!”
떨거지는 기쁜 얼굴을 하더니 무리에게 돌아가서 말을 나누었다.
그러더니 사람 몇 명을 마을 쪽으로 보낸다.
남은 녀석들은 미리 쉬어두자 싶은지 모두가 보는 가운데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 흙바닥 위에 벌러덩 앉았다.
‘거의 애들 장난이로군…….’
대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조별과제를 맡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이 떨거지들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궁금해,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계속 구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