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96화
66. 노악자 공격 (2)
“한경록이 드디어 벌을 받게 되는군.”
남촌 어딘가의 초가집.
윤택한 거처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청에 선비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니 그런대로 고상한 분위기가 났다.
늦은 밤 선비들이 모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사람이 있고 술이 있다면 당연히 모여서 인생을 즐겨야지 않겠는가?
단지 사내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지껄이는 이야기라고는 경제, 외교, 정치, 사회로 대표되는 EDPS일 뿐이다.
“지금 주상이 어떤 사람인데……. 면전에서 제 잇속을 챙기려다 뻔한 꼴 당한 거지.”
“자네들 앞이라서 하는 말이지만, 이 사람은 원래 금상의 존재가 편치 않았어.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충심이 생기는군.”
선조, 명종, 인종, 중종이라는 사대의 치세 내내 패악이란 패악은 모두 저지른 한경록에 대한 인기는 안 좋은 쪽으로 하늘을 뚫고 있었다.
심지어는 언젠가 한경록의 저택에 벼락이 떨어진 것을 두고, ‘한경록의 집이 벼락을 맞았다’가 아니라 ‘벼락이 한경록의 집을 때렸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만큼 한경록이 나쁜 놈이라서 하늘도 벌을 내린 게 아니겠느냐는 말이었다.
“아는 사람에게 들어보니 전하께서는 한가 놈을 완전히 끝장내 버리려고 작정하셨더군.”
“한가 놈? 하하하! 청원부원군도, 한경록이도 아니고 이제는 그냥 한가 놈이란 말인가? 하핫!”
“곧 죽을 놈인데 어떻게 부르던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건 그렇지!”
야밤의 초가집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런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 있었다.
바로 ‘재미있는 친구’다. 물론 반의적인 표현에서 말이다.
“한경록이 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긴 하지만, 다들 금상을 찬양하는 꼴을 보니 제대로 놀아나고 있군.”
“놀아난다니?”
“흥. 금상이 어째서 한경록을 이 잡듯이 잡는지 모르는 건가? 자신을 향한 여론이 안 좋으니까 표적을 만드는 걸세!”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술맛 떨어지는 소리이기도 했다.
사내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크흠, 짧게 헛기침했다.
개중에 한 사람이 재밌는 친구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금상께서 한경록을 벌주는 게 잘못됐다는 말인가?”
“…….”
“할 말이 없어? 자네가 그렇게 죽은 왕의 충신이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낙향이라도 했어야지! 어떻게든 관직을 얻으려고 도성에서 아등바등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보고 놀아난다는 건가?”
“뭐야!”
재미있는 친구가 언성을 높이며 일어서자 추궁하던 사내도 일어났다.
“폐주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술판에 끼어놓곤 못 지껄이는 말이 없어! 다시는 저 인간 데려오지 말게!”
“이놈이!”
재미있는 친구가 격분하여 달려들자 술상이 와장창 엎어졌다.
다른 사내들도 다급히 일어나 두 사람을 뜯어말렸지만, 남촌 초가집의 소란은 한동안 멎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한 사람만큼은 무리의 술판에 다시 끼지 못하리라는 점이었다.
* * *
국문장.
대신들이 좌우에 시립한 가운데 의금부 대청 바로 아래에 어좌가 마련됐다.
들리는 소리라곤 주변에 깔아놓은 화등잔에서 장작이 탁탁거리며 타오르는 소리뿐.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죄인이 참으로 경력이 많군. 다른 부마와 함께 백성들의 전답, 가옥, 노비, 잡물 등을 강탈하였고 수시로 지방으로 내려가 수령들의 접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부정한 무리에게 뇌물을 받고서 관직을 소개했으며 공신이 된 다음에는 이기와 결탁하여 관리들에게 공연히 상납을 요구하고 아들 한의(韓漪)는 궐 안에서도 가마를 타고 돌아다녔다, 라.”
차르륵, 하고 권자가 접혔다.
“죄인이 장오죄만 저질렀다면 율대로 교수형으로 끝냈을 터인데 달리 저질러놓은 것이 많군.”
판의금부사를 겸하는 좌의정 노수신이 보고했다.
“관련자도 추포하고자 하였으나, 죄인을 추종하였던 원호변(元虎變)과 나윤명(羅允明)은 이미 유명을 달리하여, 죄인과 함께 어울렸던 송인(宋寅)만 구금할 수 있었나이다.”
“송인이라면 여성군(礪城君)인가?”
“그러하옵니다.”
그 역시 한경록과 마찬가지로 중종의 부마였다.
“여성군부터 앉히라.”
“예.”
노수신이 나장에게 하명하자 곧 송인이 끌려 나왔다.
송인은 감옥생활이 영 맞지 않는지 무척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전하…….”
의자에 꿇려지고 포박되자 송인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내 알기로 여성군 그대는 석학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하여 세간의 평판이 나쁘지 않은데, 나름대로 역사가 깊은 분이셨구려.”
이황이나 조식과 같은 옛 문인들은 물론, 최근 떠오르고 있는 이이나 성혼과 같은 문인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당장 그를 무릎 꿇린 노수신도 일면으로는 송인을 인정하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영위사(迎慰使)로 자주 추천했다.
“송구하옵나이다. 신이 어렸을 적 생각이 짧아 그만 무도한 짓을 많이 저질렀나이다.”
“이미 마음을 고쳐먹은 지 오래되셨으니 그대를 문초할 생각은 없소이다.”
“망극하옵니다.”
실제로 송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조용해서 존재감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달밤에 바람이나 쐬시라고 부른 건 아니요. 여성군께서도 왜 자신이 국문장에 나오셨는지는 알고 계시겠지.”
“물론이옵나이다. 죄신은 과거 한경록과 함께 무뢰한 자들과 자주 어울렸사옵니다.”
“나는 이미 밝혀진 일들은 관심이 없소. 그러니 조정에 언급되지 않은 사건 중에서도 위중한 일로 몇 가지만 밝힌다면 성히 보내드리겠소이다.”
“예…….”
송인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신이 처신에 주의하게 된 것은 인종 대왕께오서 훙하신 다음이옵나이다.”
“그때 뭔 일이라도 있었나?”
“인종 대왕께오서 훙하신 직후 우연히 자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한경록은 상복을 입지도 않고서 태연히 술상을 내어왔사옵니다.”
듣고만 있던 제신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왕이 죽게 되면 한동안 신하들은 상복을 입고서 근신하게 된다. 이럴 때 술을 마시거나 악공들을 불러 음악을 듣는 것은 족히 사형당할 수도 있는 만행이었다.
“한경록이 잔을 권하였는데 죄신이 차마 받을 수 없어 마다하자 한경록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제 우리 세상인데 고작 술 한 잔 못 마시느냐고 하였사옵니다.”
“중차대한 일인데 그동안 묻혀 있었구려.”
“외부에 새어나가게 되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될 일이라 여겨, 신은 이후로 줄곧 근신하면서 굳이 언급하지 않았나이다.”
그래서 송인이 철들었군.
한경록 같은 자들과 어울리면 언젠가 끔찍한 일을 당하리라 깨달은 거다.
뒤늦게 사림 문인들과 어울리는 이유도 무뢰배들과 어울렸던 과거를 지우려는 행동인지도 모르리라.
“증언을 증명할 다른 사람은 없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오직 죄신과 한경록 사이의 일이옵나이다.”
“설령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졌더라도, 한경록이 스스로 시인하지 않는 한 나는 그런 사유로 벌을 줄 수는 없다.”
송인이 국문장에 끌려나와 저 혼자 살고자 되는 대로 지껄였고, 왕이 옳타꾸나 한경록을 처단했다는 식의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송구하옵나이다. 하오나 신이 어찌 감히 전하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 있겠사옵니까?”
“알겠소. 늦은 밤에 노고 많으셨소이다. 좌상께서는 여성군을 풀어주고 사람을 붙여 댁까지 편하게 모시시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송인이 예를 표하고 떠나자 나는 제신들을 향해 말했다.
“여성군의 고발이 사실이라면 죄인은 인종 대왕이 훙하신 일을 기뻐했다는 말이 된다.”
이에 잠자코 있던 예조판서 이양원이 나섰다.
“신하가 감히 왕의 죽음을 기뻐하다니 불충도 이런 불충이 없사옵니다!”
“달리 증명할 사람이 없으니 안타깝게 여긴다. 허나, 죄인의 행실을 고려하면 완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닐 것이다.”
“여성군은 자신의 죄와 실수를 깨우치고 반성하여 근신한데 반해 한경록은 여전히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방납자들에게 뇌물을 받고서 나라의 일을 방해하고자 하였으니, 가벼이 대해서는 아니되옵니다.”
“예판의 말이 맞다. 죄인의 죄질이 흉악하니 본보기로 삼지 않는다면 누가 국법을 엄중하게 생각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나는 다시 노수신에게 명했다.
“내 한경록이 종친이자 공신이라 친히 국문하여 죄상을 명확하게 밝히고자 하였으나, 여성군의 증언을 들어보니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대는 문초를 동원해서라도 죄인의 여죄를 낱낱이 밝혀내라. 함께 잡힌 한의(韓漪)에게는 어떠한 처벌이 좋겠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궐 안에서 신하가 감히 가마를 탄다는 일은 상고할 전례조차 없사옵나이다.”
“궐 안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왕뿐이지.”
“그러하옵니다.”
“한의는 감히 궐에서 왕 노릇을 하며 군주를 능멸한 셈이로군.”
좌중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처분에 따라서는 한경록의 죄가 어떻건 한의를 중심으로 삼족까지 멸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역에 준하는 죄로 보고 일족을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모반을 의도한 것이 아니니 불응위(不應爲, 사리에 맞지 않게 행동함)가 중차대한 경우로 알고서 장 팔십만 집행하라.”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니다.
하찮은 목숨 하나 취하겠다고 한경록이 본인의 죄가 아닌 아들놈 가마 탄 일로 묻혀서 죽게 만들 수 없어서다.
“명을 받드옵나이다.”
“한경록과 결탁한 방납자들은 장오율에 따라 처벌하도록 해라. 곱게 죄를 시인하지 않을 터이니 문초해도 좋다.”
“예.”
한경록에 대해서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받아먹은 게 많은 한경록이나 바친 게 많은 방납업자들은 모조리 장오율 최고형인 교수형이 집행되겠지.
놈들이 사이좋게 목이 걸리면 잇속을 챙기고자 개혁을 반대한 놈들도 눈치라는 게 조금은 생길 거다.
* * *
대과 시험자를 발표하는 날도 아니건만 육조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면식도 없는 사내들끼리 몸을 부닥쳐가며 나누는 말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먼저, 선비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던 청원부원군 한경록이 무려 사사를 당했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한경록이 저부터 돌아보지 않고 전하의 면전에서 지랄할 때부터 몸이 성하지는 않겠다, 생각은 했네만.”
“유배당하기도 전에 사사부터 당할 줄이야…….”
유력자를 죽일 때는, 먼저 사형에 처했다간 파장이 크기 때문에 유배부터 보내고 사약을 먹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꼭 정치적인 이유에서만 아니라, 죄인을 벽지에서 죽이는 것은 배려의 일종이기도 했다.
도성과는 달리 주로 배소로 선정되는 벽지에는 구경꾼도 없고, 마지막까지 대동한 가족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한경록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셨나 보군.”
“한가 놈은 진즉에 죽어 마땅한 놈이었네. 그동안 선대왕들의 과분한 은혜를 받아서 여태껏 목숨을 부지했을 뿐이지.”
술렁거리는 사이에서 선비 하나가 속삭였다.
“자네들은 들어보지 못했나?”
“무얼?”
“이 사람의 사돈의 팔촌의 옆집 사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지난 국문장에 자리했다는데…….”
미래 같았더라면 농담하는 줄 알았겠지만 요즘 세상은 아니었다.
주변의 선비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귀를 기울였다.
“여성군이 증언하기를, 한경록이 인종 대왕이 훙하셨을 때 술을 마시고 자기 세상이 왔다면서 기뻐했다는군.”
“미친놈 아닌가?”
“죽어 마땅했군.”
사내의 속삭임에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주변의 선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사사가 과분한 처사였네. 아예 목을 자르고 삼족을 멸해야 했는데.”
“적어도 맏이는 장 팔십을 맞고 다리병신이 됐다니 다행일세.”
“이제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려나 보네.”
마지막 사내의 말이 마치 그동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금상이 폐주를 쳐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것이 잘한 일이었다는 식이어서, 주변은 금세 무안해졌다.
“흠흠.”
“크흠흠.”
결과가 어떻건 신하가 왕을 죽이는 것은 여전히 거부감 드는 행위였다.
하지만 마지막 사내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놓고 악인이었던 한경록을 이참에 죽인 것이 정치적 판단일지라도, 이전의 왕들은 금상과 같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으니까.
세상이 달라졌다.
그리고 여론 역시 달라지고 있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전하의 용단을 지지하네.”
주변의 선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