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95화
66. 노악자 공격 (1)
경기도 금천.
어느 저택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대청에는 고을의 젠체하는 종자들이란 죄 몰려들었으나, 감히 집주인 앞에서 콧대를 높이는 사람은 없었다.
“경하드립니다, 어르신. 아니. 이제는 합하라 불러드려야겠군요.”
“경하드립니다, 합하.”
“소인은 예전부터 전하께오서 반드시 큰일을 해낼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장년의 집주인은 후장이 닳아 없어질 정도의 아부를 들으면서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보상심리인 것일까?
아들이 말도 없이 왕을 썰어버리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고 도성을 장악하자, 장년인은 지난 몇 주 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자칫 왕을 죽인 아들은 역적이 되고, 아비인 자신과 다른 아들들은 연좌로 멸족을 당할 판국이었으니까.
밥은 내려가지 않고 잠자리는 편치 않았던 몇 주가 지났다.
걱정과는 달리 아들은 끌어내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정의 노신들을 구워삶아 지지를 받고는 즉위식까지 치렀단다.
진짜로 왕이 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상경하고 그 귀한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바쁜 사람이 되었으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장년인은 조선팔도의 어떤 아버지보다도 기쁘고 행복한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이 감정을 외면했다간 놓치기라도 할 듯, 최대한 현재를 만끽하고 있었다.
“흠, 흠. 합하는 무슨. 아직 조정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는데.”
“전하를 배출하셨으니 대원군의 자리는 정해진 셈이십니다.”
“그런가? 흠흠.”
“예, 하하하. 평소에 교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에라도 합하와 긴밀한 말을 나누게 되었으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주변의 사대부들은 물론 금천현감마저 직접 찾아와 예를 표하고 아부를 떨고 있는 판국이었다.
높으신 분들이 북을 치고 장구를 칠 동안, 졸지에 콩고물을 얻어먹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생일에나 먹는 국수를 다 먹어보네.”
뜰에 삼삼오오 모인 객들이었다.
아들을 대신으로 둔 집이 잔치를 벌인다기에 모였을 뿐이지, 높으신 분들이 어떤 주제로 떠들건 이들의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도,
“저번에 관리들이 찾아와서 공납과 잡세를 없애는 데 동의하냐고 묻던데, 자네 집에도 찾아갔었나?”
“당연히 찾아왔지.”
“자네 생각은 어때?”
“잘 모르겠는데. 솔직히 공납과 잡세를 없애준다면 나야 감지덕지지만 관리들이 어디 자기들 손해볼 짓을 하겠나?”
“나도 수상하긴 해.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공납을 없애준다니…….”
이들에게 잡세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어떤 명분을 붙여서 더 떼건, 아전이나 수령 따위가 잡세의 명목을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납은 다르다.
대납을 위해서 등허리가 휘다 못해 부러지는 자들이 부지기수였으니까.
“빌어먹을 방납쟁이들만 사라진다면 나는 무조건 찬성이지.”
“그래서 세금을 하나로 합치면 안 된다는 놈이 있는 거로군. 방납으로 못 해먹게 되니까?”
상대하던 사내는 국수를 입에 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퇴짜를 놓다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백성들이 납부한 공물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점퇴(點退)라고 하는데, 이때 공물을 수납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퇴(退)라고 했다.
방납업자들과 결탁한 관청에는 백성들 스스로 마련한 공물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 반드시 방납업자들을 거쳐 뇌물과 공물의 몇 배를 능가하는 대금을 지불해야만 겨우 공물을 납부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뼈 빠지게 세금을 내는데 조정은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유가 달리 있지 않았다.
“어디 한 번 뭐가 바뀌는지 보자구……. 정말 방납쟁이들만 없어진다면 나는 매일 나랏님을 위해서 정화수 떠놓고 기도할 자신도 있으니까!”
농군은 말을 마치고는 국수 대접을 기울였다.
* * *
“공납을 폐하고 납세를 곡식으로 통일하면 운송에 막대한 지장이 생길 것이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운하에 심열을 기울이고 계시지 않은가!”
“운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소이다!”
“완성되기 일보직전이라는 공판의 보고를 듣지 못하셨는가!”
조정은 왈가왈부로 개판 오 분 전이 따로 없었다.
백성들의 입장은 호의적이었다. 총 6만 건의 의견을 집계했고 대부분이 세금 일원화에 찬성했다.
공납의 부담이 크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이러한 부담이 어째서 조정에는 전해지지 않는단 말인가? 다른 누군가가 중간에서 착복하기 때문이다.
세제개혁 반대의 목소리를 전부 부패한 자들의 단말마로 치부할 수는 없겠으나 영향이 없다고도 못하리라.
“내가 경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수미법(收米法, 공납을 쌀로 대체하는 법)의 시행을 경기도로 한정하였거늘, 어찌하여 이마저도 반대하고자 하는가?”
“전하!”
당차게 나선 사람은 한경록이었다.
안면이 있는 자다.
이등 위사공신이자 성록대부(成祿大夫)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으로서, 공신 회합 때 면상을 드러냈으니까.
나아가 한경록은 중종의 차녀인 의혜공주와 혼인한 부마이기도 했다. 위세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분과 달리 한경록을 향한 세간의 평판은 반역자 소리까지 듣는 나보다도 나빴다.
기생을 간음하거나,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권세만 믿고서 설치는 전형적인 악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놈은 아직도 중종, 명종 시절인 줄 아는군.’
한경록 같은 뻔한 부류는 패망하는 과정도 뻔하기 짝이 없다.
아직도 자신이 옛날 옛적 좋은 시절에 사는 줄 알고서 눈치를 하나도 안 보다가 숙청을 당하는 것이다.
“할 말이라도 있나, 청원부원군?”
한경록은 하대가 불쾌한지 한쪽 입술을 비틀며 답했다.
“아조의 조용조는 당육전(唐六典)에서 비롯된 유서 깊은 세법이옵고, 오랫동안 잘 작동되었는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부득불 논란을 만들고자 하시옵니까?”
“제도는 오래되었다는 것만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제도는 그만큼 오랫동안 검증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옵니다. 이제 즉위하셔서 내치에 힘쓰셔도 모자랄 판국에, 어찌하여 논란만 일으키시옵니까?”
“내가 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종묘사직이지 논란이 아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건 불필요한 제도의 변화는 논란과 혼란을 수반할 뿐이옵니다. 그것이 어찌 전하의 치세에 이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대놓고 겁박이었다.
어전이 싸늘하게 식었다. 다들 내가 어떻게 대응할지 기대라도 하는 건가.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는 어좌에 등판을 기댔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위치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은 지겹도록 해봤다.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자들에게는 현실을 보여줄 힘이 있었다.
“지금 청원부원군은 나를 겁박하는 건가?”
“어찌 감히 군주를 겁박할 수 있겠사옵니까……. 크흠흠.”
한경록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헛기침했다.
정작 나는 군주인 선조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겠지.
“틀리셨소, 청원부원군. 신하는 군주를 겁박할 수 있소.”
“……?”
“내가 추구하려는 건 완전무결한 권력이 아니요. 완전무결한 왕이지. 만일 왕이 자질이 부족하다면 신하들은 종묘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다소 과격한 수단을 쓸 수도 있는 거요.”
한경록은 예상외의 답을 들어서인지 당혹한 어조로 말했다.
“크, 흠흠.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소신에게 겁박을 하느냐고 면박을 주셨사옵니까?”
“행동에 책임을 질 자신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오. 나는 그대의 기대와는 달리 자질이 부족한 왕은 아니거든.”
나는 밖을 향해 외쳤다.
“위사들은 당장 한경록을 추포해라!”
놀란 신하들 가운데에서 한경록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순식간에 위사들에게 붙들려 무릎이 꿇려졌다.
“신기하게도 곧 죽어도 안 이상할 놈들이 더 겁대가리가 없단 말이지. 나는 폐주를 죽이고 그 목을 쳤다. 내가 잔혹하지 못해서 피를 안 보는 줄 아느냐?”
“저, 전하! 신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한경록은 뒤늦게 포박된 채로 머리를 박았다.
그가 애처롭게 목숨을 구걸하는 가운데 영의정 홍섬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한경록은 중종 대왕의 부마일 뿐만 아니라, 위사공신이기도 하옵니다. 그의 결례가 어떻건 과한 형벌을 내리신다면…….”
“내가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비친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내가 죽이고자 하는 건 나라를 걱정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의견도 충분히 일리가 있음을 내가 모르겠는가?”
고가치 상품인 공물마저 세곡으로 통일한다면 세곡의 운송 부담은 배로 늘어난다.
공물이라면 한두 사람이 등에 지고서 옮길 것을 열 사람이 나눠 져야 한다는 뜻이다.
수레를 적극적으로 쓴다면 한결 낫겠지만 조선의 도로 사정은 매우 열악하다.
국토 대부분이 산지이며 상업도 미진한 조선에서 길이라곤 등산로 샛길이 전부.
개간된 평지의 길이라도 농민들이 좌우에서 파고들어 길을 줄타기로 만들어, 수레를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게 만들었다.
“문제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이다. 만일 개혁도, 현실도 의식하지 않고서 단지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에만 관심 있는 자가 나랏일에 간섭한다면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독만 될 것이다.”
한경록은 부마와 공신의 위세만 믿고서 뵈는 것 없이 설쳐온 자다.
중종과 명종 시절에는 뇌물을 받고서 관직을 알선하기도 했으니, 이 인간이 지금이라고 뒤가 깨끗하겠는가?
“마지막으로 한경록을 탄핵한 자가 누구인가?”
“정축년 12월에 양사가 합계하여 탄핵한 줄로 아옵니다.”
위사공신 탄핵으로 한창 시끄러웠을 때다.
“예조판서가 대사헌으로 있었겠군.”
“그러하옵니다.”
“예판?”
나의 부름에 이양원이 나섰다.
“하명하시옵소서.”
“그대가 대사헌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공론이 있는 걸 안다.”
공론만 믿고서 위사공신 삭제를 주도할 때는 언제고, 4대 공신의 회합과 함께 압력을 받고서는 태도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이양원도 살고자 한 짓이지만 졸지에 수하인 사헌부 관리들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해야 했다.
“한경록은 지저분한 역사를 만들고도 권세만 믿고서 근신하지 않았지. 그가 선대왕의 비호를 받아 아직까지도 치죄되지 않음을 한탄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하옵니다!”
이양원은 기꺼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거물 악당을 탄핵한다면 망가진 평판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나아가 왕까지 자신의 편이었다.
“내가 특별히 지난 탄핵을 주도한 예판에게 한경록의 죄가 무엇인지 보고할 기회를 주겠다. 양사는 예판에게 전력으로 협조하라.”
“명을 받드옵나이다!”
이양원은 신나기까지 한목소리로 답했다.
한경록을 향한 숙청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한경록은 새파랗게 질린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횡설수설 변명과 변호를 거듭했으나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대에게 죄가 없다면 마땅히 내가 사과하고 수미법(收米法)의 논의 자체를 다음 해로 미루겠다. 그렇지 않다면, 각오해야겠지. 위사들은 죄인을 금부로 압송하라. 어전이 시끄럽다.”
한경록은 끌려나가는 와중에도 도통 입을 닫지를 못했다.
결말이 어떨지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지었다는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선조, 명종, 인종, 중종이라는 무려 왕 사 대의 치세에 걸쳐 지겹도록 탄핵을 받았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사 대에 걸쳐 지은 죄를 이번 한 번으로 다 갚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경록은 진즉 벌을 받고서 덜 교만하게 굴었어야 했다는 교훈을 얻었겠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