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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94화 (19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94화

65. 뒷정리 (3)

심수경은 바닥에 꽂힌 채 파르르 떠는 환도를 흘깃 보더니 입술을 말았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심수경은 나서지 않았다.

한심한 광경에 몇몇 사람들이 입꼬리를 말았다.

금천부원군과 홍섬 상대로 목소리를 높일 때는 언제고, 왜 칼자루가 코앞에 있는데도 행동하지 못한단 말인가.

“어찌 좌참찬 대감께서는 반역자를 코앞에 두고도 칼 한 자루 뽑지 못하십니까?”

“…….”

“반역자라면 마땅히 베어 없애야지 않겠습니까?”

은근히 추궁하였으나 심수경은 크흠, 헛기침하며 물러났다.

그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이다.

고작 좌참찬 신분만이 아니다.

실세인 금천부원군에게 칼이라도 뽑아 들었다간 자신의 목만 아니라 삼족의 목이 사이좋게 날아가는 수가 있었다.

만일 그가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면 나를 거부한 다른 자들처럼 관직을 버려야 했다.

하지만 왜 어전까지 기어 나와, 나의 면전에서 홍섬을 책망하는가?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지.’

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자유지만 자리를 지키는 것은 공론에 달려 있다.

심수경은 인맥이 두터운 자다. 그가 나를 돕느냐, 방해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덜 귀찮아질지, 더 귀찮아질지 달라진다.

그것을 나도 알고 심수경 본인도 알고 있기에 면전에서 지랄을 좀 해본 거다.

싼값에 넘어갈 사람이 아님을 홍보하기 위해서.

“좌참찬 대감의 생각은 잘 압니다. 폐주를 처치하고 실세에 오른 이 사람마저 죽으면, 조선은 지극히 혼란스러워지겠지요.”

“크흠.”

“대감께서도 내심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계신 겁니다. 아무리 이 사람을 책망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종묘사직과 백성의 안녕을 위하여, 다른 신하들을 질책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내가 심수경의 이중성을 곱게 포장해주자, 심수경도 알아서 기는 것이 낫다 싶었는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알겠네.”

“나아가, 이 사람은 오랫 동안 나라를 위해 봉사한 연륜 있는 자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좌참찬 대감께서 사적인 감정을 잠시 미뤄주시면 망극하겠습니다.”

“크흠.”

심수경은 헛기침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대의 행보를 보고 생각해 보겠네.”

“생각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혼란이 수습되자 나는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이 사람은 신하로서 왕을 죽였습니다. 이유와 명분이 무엇이건 쉽게 용서받을 일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제공들께서도 이 사람이 고작 권력만을 취하고자 폐주를 죽인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젯밤 나누었던 말과 요지는 같았다.

“신숙주는 십 년의 충신이었으나 천 년의 배신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대들에게 약조하겠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제공들께서는 십 년간 폐주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얻을지 몰라도, 역사에서는 천 년 동안 종묘사직의 충신으로 기록되실 겁니다.”

나의 약속에 홍섬이 답했다.

“신은 이미 전하께 충성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어떠한 보상도 약조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뒤이어 노수신도 말했다.

“대감께서 칼을 뽑아 들 때만 하여도 어전에서 피를 보는 줄 알고 놀랐으나, 좌참찬의 혼란을 헤아리고 제신들에게는 진심으로 기회를 청하니,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는 제왕학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제왕의 자질은 타고나셨소. 초심만 달라지지 않으신다면 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충성하겠소이다.”

노수신의 말은 좌우에 시립한 제신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

그들도 어전에서 피를 보는 줄 알고 깜짝 놀랐으니까.

하지만 나는 굳이 피를 보지 않고 몇 마디 말로 심수경을 굴복시켰다.

어전에서 칼을 휘둘러 자신들과 같은 대신을 베어 죽일 정도로 야만적인 자라면, 그런 만행을 두 번이나 세 번 저지르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그런 점에서 신사적인 나는 시작부터 반은 먹고 들어가는 자였다.

“하성군과 하릉군 입시오.”

내시의 안내와 함게 두 사람이 나타났다.

각자 권자와 함을 들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맏형인 하원군이었다.

“감히 신들이 종친을 대표하여 전하께 어보를 바치옵나이다. 또 균(선조의 본명)과 처자식을 폐서인하고 종묘에 고할 것을 간청드리옵나이다.”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내가 턱짓하자 을룡이 나아가 권자와 함을 받아들었다.

권자의 내용은 이균과 일족을 폐하자는 공문일 테고, 함에는 어보가 보관되어 있겠지. 하원군과 하릉군이 모두의 앞에서 주청하였으니 이제 나는 즉위식만 앞뒀을 뿐 왕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절차가 있지만 제공들께서는 양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의정부의 두 대감께서는 당상관직의 공석과 적절한 후보자들을 엄선하여 올려주세요. 조정이 구색을 갖춘 다음 의례를 시행하고, 정식으로 업무를 보겠습니다.”

“명을 받드옵나이다, 전하.”

홍섬과 노수신이 허리를 숙이자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도 함께 허리를 숙였다.

당분간 조정은 시끄럽겠지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진통이 동반되는 법이다. 잘만 이겨낸다면 조선은 새로 태어날 거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으니까.

* * *

도성을 삼엄하게 순찰하던 갑사들도 대부분 해산했을 즈음, 스펀지처럼 구멍 나 있던 조정의 요직들도 채워졌다.

이조판서에는 박순, 호조판서에는 이산해, 예조판서에는 이양원, 형조판서에는 허엽, 공조판서에는 김성일이 배치되었다.

병조 판서는 공석이나, 참판 이을룡이 사실상 판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문무백관이 경복궁 근정전 앞에 빼곡하게 시립했다.

내시는 대문 너머로 펼쳐진 광경을 훑어보고는 아뢨다.

“전하. 자리가 마련되었사옵니다.”

“이 사람의 눈에도 똑똑히 보입니다. 그래,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김기문이라 하옵니다.”

“나는 그대가 모시던 왕을 처참하게 죽이고 유해를 지키려던 동료들도 베었는데,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까?”

“내시에게 중요한 것은 왕을 모시는 것이지, 어느 왕을 모시느냐는 아닌 줄로 아옵니다.”

“이제부터 그대가 상선(尙膳)입니다.”

나는 김기문을 뒤로하고 근정전의 대문을 넘어섰다.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대전 뜰에 켜켜이 자리한 문무백관들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절로 콧대가 올라갔다.

권력자들이 어째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면서도 권력을 놓지 못하는가.

특별한 이유는 없다. 권력이 생명보다 달콤하기 때문이다.

나의 등장과 함께 짧게 의례가 행해졌다. 고수의 북소리와 악공들의 음악이 잦아들자 승정원 승지와 통례원 찬의가 선포한다.

“교지(敎旨)가 있다.”

“궤하라!”

엄중한 선포와 함께 예복을 입은 종친과 문무백관들이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모두가 교지를 받들 준비가 되자 승지가 권자를 펼쳐 낭독한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은 백성을 낳고 우두머리를 세워, 서로 길러 살게 하고 천하를 다스려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생겨 복종과 배반이 있고, 천명이 머무르고 떠남이 생겼다. 폐주는 다스림에 있어 덕이 없어 국운이 끊어지게 되어, 내가 하늘을 대신하여 단죄하였다. 이에 의정부와 대소신료들이 말을 합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간청하니 감히 책임을 지고자 한다.”

이하 조목을 낭독하니 통례원 찬의가 마무리한다.

“부복, 흥, 사배, 평신하라.”

제신들은 절을 올리며 외쳤다.

“주상 전하, 천세!”

“주상 전하, 천세!”

“주상 전하, 천천세!”

근정전 주변에 세워진 장막과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신하들의 합창이 쩌렁쩌렁 울었다.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받아주었다.

* * *

“즉위를 경하드리옵나이다.”

“경하드리옵나이다.”

이전과는 달리 어전은 구색이 갖춰졌다. 적응할 시간이 주어져서인가, 다들 원숙한 정치인이기 때문인가.

제신들은 어색한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나를 왕으로 대한다.

“어찌 한 사람의 노고로 대업이 성취될 수 있겠는가? 그대들 모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종묘사직도 반석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망극하옵나이다.”

“제신들이 함께하니 실로 천군만마와 함께하는 기분이구나.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홍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이제 전하께서는 정식으로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셨으니, 이만 잠저(潛邸)에서 궐로 이어하시옵소서.”

“급한 일은 아니다.”

“궐을 비우는 것은 가정에서 사랑방을 비우는 것과 같사옵니다.”

“음.”

관광방의 저택은 나와 인연이 짙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 내키지 않았다.

“궐에 조회와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입궐하시기도 번거로우실 테고, 정무를 보실 때도 중차대한 공문들을 사가에 둘러싸인 잠저에 보관하는 것은 이롭지 못합니다.”

홍섬이 권하자 이이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옥체를 지극히 아끼셔야 하는데, 매일 백성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제신들이 입을 맞춰 합창했다.

앞으로도 사사건건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 이러겠구나.

즉위식에서도 왕이 됐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실감이 난다.

“알겠소이다. 그대들이 간청하니 잠저에서 이어하도록 하겠소.”

“망극하옵나이다.”

“거처 문제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고, 공판.”

나의 부름에 공조판서 김성일이 한 걸음 나섰다.

제자를 잘 둔 덕으로 어중간한 위치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공조판서로 영전한 그였으나, 세간의 이목을 의식하는 탓인지 최근에는 쥐죽은 듯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왕이니 면대를 명분으로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지.

어디까지나 공무가 끝난 다음에 말이다.

“내가 하명한 일은 수행하였는가?”

“조사는 이미 끝났으며 자료를 취합하는 중이옵니다.”

“제세한 것들은 서면으로 받아도 좋으니 바로 보고하라.”

“예.”

김성일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굴포운하는 완공을 직면하여 두 달 안에 공사가 끝날 줄로 아옵니다. 다만 실제 운영까지는 족히 반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옵니다.”

“어째서인가?”

“수로가 워낙 방대하여 저수지의 물을 모두 끌어 써도 부족한 데다, 굴포운하 자체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비교 대상이 없는 만큼 실수를 줄이기 위해 연습이 필요한 줄로 아옵니다.”

“내가 운하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내가 주도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제도의 변화를 앞둔 지금 중차대한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선조의 모가지를 치고서 대신들을 강제로 모아놓은 날 밤, 나는 모두의 앞에서 세제개혁을 천명했다.

장거정은 급납화와 일조편법을 통해 잡세를 통일했으며 세금을 곡식이 아닌 은화로 납부하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적용하고 싶지만 조선은 명나라와 상황이 다르다.

일차적으로, 조선에는 은본위제를 시행할 정도로 은화가 유통되고 있지 않다.

‘결국에는 잡세를 없애고 세금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는 최선이라는 뜻이지.’

이를 위해서는 물류부터 혁신해야 했다.

조선의 세법은 세곡만 아니라 공물로도 세금을 거두었다.

공물이 세곡에 비해 부피가 작고 가치가 높은 편임을 고려하면, 세금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것은 조세 운송의 부담이 커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년 가을까지는 확실하게 운하가 완공되어 정식 운영에 들어가야 한다. 공조판서는 운하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있으니 운하와 관련되어 차질이 없도록 하라.”

“명심하겠나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홍섬을 바라보았다.

“백성들의 의향을 확인하는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영의정?”

문란한 세법을 통일하는 것이 나라의 운영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만, 아무런 징조도 없이 제도를 바꾸어서는 혼란만 가중된다.

나는 대외적으로 백성들에게 의향을 묻겠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에게 조세개혁을 알리고 있었다.

“성저십리에 거주하는 백성들부터 의향을 확인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약 육천 명의 의견을 집계하였사옵니다.”

“찬반의 비율은 어떻게 되나?”

“칠할 이푼이 찬성하였고 나머지가 반대이거나 답을 하지 않았사옵니다.”

“반응이 좋으니 다행이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일각에서는 양인 농군들에게만 의견을 묻는 것에 불만을 표하고 있사옵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천민들이야 세법이 어떻게 되건 알 바 아니니, 분명 사대부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양반들은 대부분이 지주였으며 한평생 손에 농기구 한 번 쥐어보지 않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양인 농군들이야말로 세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자들이다. 다른 자들의 의견도 필요하겠지만 조정의 일은 바쁘니 경중을 가려 행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선조의 시체가 썩기도 전에 조선은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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