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93화
65. 뒷정리 (2)
“제가 대감께 직접 어보를 바치겠습니다.”
이이의 발언에 제신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천부원군을 추궁할 때는 언제고 자기가 나서서 어보를 바치겠단다.
그는 변덕이 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진심으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할 뿐이다. 왕이 없는 왕국이 어떻게 유지되겠냐는 생각으로.
내가 여론을 의식하겠다면 자신이 욕받이를 자처하겠다는 거다.
“많은 사람이 형님에 대해 오해할 겁니다.”
왕을 시해한 금천부원군에게 어보를 바치기를 자처하였다면서, 세간에는 이이도 같은 놈이라는 말이 나오겠지.
“필요하다면 해야 하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필요한 일이라면, 행해야지요.”
내가 선조를 죽였듯이.
“내가 금천부원군께서 왕위에 오르길 바라는 이유는 종묘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서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 아니네. 전형적인 반역자들과는 달리 쟁취한 권력으로 무고한 죽음을 양산하지 않기만을 바라네.”
“저 역시, 형님의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 하듯 말하시는군.”
“감히 확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 사람의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으니까요. 변화한 시대를 순순히 납득하지 않는 자들도 많을 겁니다.”
“피를 보는 일은 자제하시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라면 내가 할 터이니.”
“이 사람은 오직 종묘사직과 백성들의 안녕만 신경 쓸 뿐입니다. 어보의 건에 대해서는 하원군과 하릉군에게 맡기겠습니다. 그 편이 두 사람이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이가 나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라면 인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어보를 바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는 것만으로도, 이이는 많은 것을 잃을 테니까.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왼편을 바라보았다.
노수신.
홍섬과 함께 의정부 의정대신을 구성하는 자로, 제삼당의 중진으로 오랫동안 뜻을 함께해 왔다. 과연 아직도 나의 편일까?
“금천부원군의 방식이 옳다고는 못하겠지.”
“각오한 일입니다.”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고 일은 이미 성사되었으니, 무의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네. 단지 과거의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만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명심하겠습니다.”
“믿고 지지하겠네.”
명분 면에서는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을사사화 희생자마저 지지를 약속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일일이 나의 즉위를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아닌 밤중에 다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피곤하실 터이니 회합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요. 하원군과 하릉군 두 분께서는 말씀하신 바의 이행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에.”
“예, 전하.”
두 사람이 예를 표하자 나는 제신들을 향해 말했다.
“이만 해산들 하시고, 내일 새벽에 뵙도록 합시다.”
이에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은 짧게 묵례를 올리고는 정전을 빠져나갔다.
대부분은 나의 즉위를 마지 못해서라도 인정한 듯 보였으나, 일부는 차마 대세에 거스르지 못했을 뿐 내심 딴생각을 품고 있겠지.
그들의 마음마저 얻는 것이 나의 선결과제다.
개혁과 병행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란 쉽지 않겠지만 좋은 결과물을 빨리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왕이라니…….’
선조를 죽이기로 했을 때부터 각오는 했다.
다른 사람이 왕위에 오른다면, 과연 일국의 군주마저 회쳐버리는 인간을 내버려 두겠는가?
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시답잖은 견제를 떨쳐내고 내가 원하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막상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니 얼떨떨하다. 실제로도 곧 왕이 될 테고.
나는 여전히 남아있는 을룡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시선을 의식하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왕을 죽이는 데 가담한 데다 확인사살을 위해 수급까지 베어놓고는 동요하거나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너의 도움 없이는 폐주를 죽이지 못했을 거다.”
“저 역시, 어르신과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폐주를 죽이는 일을 돕지 못했을 겁니다.”
“어떻게 포상해 주기를 바라나?”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진심이냐?”
“페주를 죽이는 데 크게 일조한 저입니다. 그런 저에게 상을 내려주시게 되면 신하들의 마음을 얻기 힘들어지겠지요.”
“멀리 볼 줄 아는 혜안과 대의를 위해 사소한 이익은 기꺼이 포기하는 마음을 함께 갖추었구나.”
“스스로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겸양이 심하구나.”
혜안과 대의를 추구하는 마음은 타고나지 않고는 익히기가 힘들며, 타고나더라도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을룡은 마치 나에게서 배웠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내가 그에게 준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기회였을 뿐이다.
“내일은 무척이나 시끄러워지겠군.”
“도태될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변화를 싫어하는 법입니다.”
“왕이 처참하게 죽었는데 모두가 무덤덤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 자연스러운 혼란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지.”
이이와 두 의정이 지지를 표명했다.
일일이 의사를 확인하지 않았다 뿐, 재상과 당상관들도 최소한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조는 사사건건 조정을 분열시키고 피로하게 만든 자다.
그의 죽음 따위를 슬퍼하기에는 잃을 것이 많은 자들이다.
반대로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 있다. 새파란 참하관들이 대표적이다.
정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고서 부평초처럼 휩쓸리기만 했던 주제에, 세상천지에 대가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밖에 없는 줄 아는 새파란 혈기만 가진 놈들.
사직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면 알 바 아니지만 거슬리는 방식으로 저항하는 자도 있을 거다.
‘마음 같아서는 선조 때처럼 다 쳐죽이고 싶지만.’
이이와 노수신이 용납하지 않을 거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내가 더 이상 피를 보지 않는 것을 전제로 협조를 약조했다.
날파리 같은 놈들을 죽이겠다고 거물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당분간 기분은 상쾌해지겠지만, 엄청나게 귀찮아질 테니까.
왕마저 죽여 버린 나의 인내심은 과연 얼마나 견뎌줄까.
“폐주 척살에 가담한 공이 있는 머슴들, 자네, 그리고 자네 수하들, 여진족들을 일괄 갑사로 임명하겠다. 다들 군기시를 확보하여 무장하게 하고, 남은 물자들은 관광방과 숭신방의 저택으로 옮기도록.”
“명을 받드옵나이다.”
* * *
다음 날 새벽.
북촌 관광방 저택.
“기침하셨습니까.”
“간밤에 소란은 없었나?”
“예.”
“나가겠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서 마당으로 나왔다.
저택의 담장 안팎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빼곡히 서 있었다.
각자 출신과 신분은 다양했으나 모두 굳센 얼굴을 한 채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을룡은 수하들을 지목해 나를 호위하게 했다.
조정이 안정되지 않은 지금, 어떤 자가 나를 노릴지 몰랐으니까.
거리로 나오니 주변은 한산했다. 어딘가에 숨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느껴졌다. 하지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서 착각을 하는 것인지.
육조거리로 나아가니 제법 사람들이 보였다.
한복판에 흩뿌려진 핏자국들은 어젯밤 벌어진 일이 꿈만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목소리들이 주변에 가득했고 고개가 돌아갈 때마다 겁먹은 자들이 허리를 숙였다.
“어르신.”
광화문을 지키는 장수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물론 나의 사람이다.
“별일은 없었겠지.”
“물론이옵니다.”
“페주가 척살 당한 이야기가 외부로 퍼지기 시작했을 거다. 성 안 백성들의 소요사태를 주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갑주와 환도를 걸치니 때깔이 좋구나.”
나는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궐로 들어섰다.
사정전에 이르니 소란이 담장 너머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궐내에서도 나의 사람들이 무장한 채 주변을 지키고 있었으며, 피로한 기색이 다분했으나 기쁨과 긍지로 상기되어 있었다.
모시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는데 싫을 사람은 없겠지.
그 열의와 기쁨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도 나의 역할이지만 아직 포상을 논하기에는 이르렀다.
“의정부 우의정 금천부원군 대감 납시오.”
사정전에 다다르자 내시가 외쳤다.
시립해 있던 좌우 신하들의 시선이 일순 모였다.
“…….”
궐을 쩌렁쩌렁 울리던 소란이 일순 멎었다.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신하들은 서로의 눈치만 바라보다, 홍섬과 노수신이 예를 표하자 주춤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어좌에 이르자 홍섬이 입을 열었다.
“승정원을 통해 육십 건 이상의 사직소가 제출되었사옵니다. 과반은 답서를 받지 않고 먼저 직을 내려놓았으며, 사직소도 없이 사모와 관복을 반납하고서 낙향한 자들도 다수입니다.”
“그들의 의향은 존중하겠습니다.”
“신…… 이라는 표현은 아직 이를지 모르겠사오나, 신 등이 이미 전하의 대의를 제신들에게 표명하였음에도 응하지 않는 자들이 다수 있사옵니다.”
홍섬의 말을 증명하듯 노신 하나가 나섰다.
“신, 이라니? 그대는 이 나라의 영의정으로서 왕을 지키지 못한 죄를 죽음으로써 사죄하지는 못할망정, 반역자에게 충성을 맹세한단 말인가!”
좌참찬 심수경.
정계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인맥을 자랑하는 자다.
이발의 장인으로서 나에게 자비를 청한 형조참판 윤의중과 공조판서 황임이 대표적이다.
이들 외에도 십수 명의 전현직 관리들이 심수경과 연을 맺고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자란 뜻이지.’
혼자서 빨빨거리며 설치는 놈만큼 만만한 놈 없듯이, 반대로 제 편이 많고 인맥이 두터운 놈만큼 부담스러운 놈도 없다.
“좌참찬 대감.”
“금천부원군 대감. 그래서 전하를 시해하고 이제는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실 생각이신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반역자치고는 당당하시군.”
“이 사람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수작도 없고요. 하지만 좌참찬께서도 마찬가지이실까요?”
나의 도발에 심수경이 언성을 높였다.
“무어라! 그대는 이 나라의 역적이고 수많은 충신을 벤 잔인한 자인데, 감히 누구와 비교하며 부끄러움과 수작을 운운하는가!”
“증명하시면 되겠군요.”
나는 을룡에게 다가가, 허리춤에서 환도를 뽑아 들었다.
“……!”
좌우 신하들은 피라도 보는 줄 알았는지 숨을 집어삼켰다.
조용히 있던 노수신마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금천부원군 대감, 좌참찬이 냉정하지 못한 것은 나도 알겠으나 피를 보는 것은 그대에게도 이롭지 못하네!”
“하하.”
나는 짧게 웃어주고는 환도를 치켜 들었다.
그리고,
-휙!
환도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콱!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심수경의 발 앞에 박혔다.
“좌참찬 대감께서 폐주의 충신으로 남고 싶으시다면, 이 사람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디 한 번 칼을 뽑아 들고 이 사람을 찔러보시지요.”
나는 두 팔을 좌우로 뻗었다.
기꺼이 받아주겠다는 듯.
심수경은 바닥에 꽂힌 채 파르르 떠는 환도를 흘깃 보더니 입술을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