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92화
65. 뒷정리 (1)
사정전.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왕에 대한 여론은 평소에도 나빴다.
즉위와 함께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이준경을 숙청했을 때부터, 죽기 직전 이이와 백인걸을 묶어 숙청하려 들었을 때까지.
재위 기간 내내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단지 왕이었기에 드러내는 사람이 없었을 뿐.
내심 그가 벼락이라도 맞아 비명횡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적잖았다.
‘이런 식으로 될 줄 예상한 사람은 없었겠지만.’
대업은 성취되었다.
“제공들을 갑자기 놀라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다들 아닌 밤중에 봉변이라도 맞은 기분이겠지요.”
적막을 깨자 한 사람이 나선다.
이이다.
“왕을 시해하셨군.”
“예.”
“예? 금천부원군! 그대는 신하 된 자로서 주인을 배신하고 참혹히 죽였음에도 어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맹자도 잔적한 자는 ‘놈’이라 부른다 하였습니다. 무왕이 주를 죽인 것을 배신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언제부터 꾸미고 계셨던 건가?”
“제 발로 비구름 아래로 들어가서 비를 맞으며, 하늘을 상대로 무슨 일을 꾸민 것이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질문이십니다.”
이이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폐주가 죽을 짓을 해서 죽었는데 꾸미고 자시고 할 일이 어딨느냐는 말입니다.”
“어떻게 왕을 상대로 죽을 짓을 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 죽이기까지 한단 말인가!”
“말만 다를 뿐이지,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은 폐주를 왕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인들은 군주와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폐주는 의리를 저버렸지요. 그래서 잔(殘)이며 왕이 아닌 것입니다.”
이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책망이나 비난을 하시는 것도 좋지만, 지금 나눠야 할 것은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가 훨씬 중요하지요.”
“금천부원군의 반역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기라도 할 생각이신가?”
“설마요.”
나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형님의 눈에는 제가 권력을 잡았다고 고작 학살이나 일으킬 사람입니까?”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시게.”
“혼란스러우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제가 형님의 오해처럼 전형적인 반역자에 무자비한 자라면, 이런 식으로 편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겠지요.”
권력에 칼자루까지 쥐었는데 말이 왜 필요하겠나?
불만이 많은 놈은 죽이면 그만이다. 살살 달래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우습게 보이기 마련이니까.
“다른 분들이 신중하게 관망하시는 이유는, 이 사람에게 선택지가 많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 사람은 불필요한 죽음은 최대한 지양하고 있지요.”
“전하를 지키려던 내시들과 자네에게 맞섰던 신하들이 내 면전에서 칼을 맞고 죽었네!”
“그들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죽음을 바란단 말인가?!”
“설령 먼저 자신들을 배신한 왕일지라도, 이미 죽어 나자빠졌을지언정 충성을 바치겠다는 자들이 아닙니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단지 세상이 변할 때 도태되기를 자처했다는 게 문제이지요. 차라리 충신으로 남는 게 그들에게도 이롭습니다.”
그늘진 곳에 처박혀 궁시렁대면서 불안만 퍼뜨리게 두는 바에야.
“형님께서도 정 폐주의 충신으로 남고자 하신다면 방도는 많으십니다. 대신 이 사람이 어째서 폐주를 죽였는지는, 끝까지 모르시겠지요.”
“알고 싶지도 않네!”
“진정으로 알고 싶은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아니면 감정에 매몰되어 냉정한 판단을 못하고 계신 겁니까.”
“뭐라!”
“조선이 사소한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회복하느냐, 지독한 강압에 시달리느냐는 이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폐주가 죽은 것보다야 훨씬 중요한 일이지요.”
선조는 이미 죽었다.
이 나라에, 목이 떨어져 뒈진 시체마저 살려낼 대단한 강령술사가 없다면 왕의 죽음을 납득하는 것이 최선이다.
고작 그의 죽음에 연연하기에는, 조선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조선은 사소한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나라로 거듭날 수도 있고, 반대로 왕의 죽음을 시작으로 탄압과 내란을 반복하며 몰락할 수도 있었다.
가급적이면 전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냉정한 판단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먼저 조정을 정리해야겠지.
“정녕 형님께서는 제가 조선을 어떻게 가꾸던 개의치 않으시고, 폐주의 충신으로만 남고 싶으십니까? 이 사람이 앞으로 무엇을 할 건지 물어나 보시죠. 답해드리겠습니다.”
“……무엇을 꾸미고 계신 건가.”
“나라의 곳간부터 채울 생각입니다. 굶주린 채로 대업을 이뤄낼 수는 없듯, 나라 역시 예산이 없으면 백년대계를 꿈꾸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나의 태연한 대답에 홍섬이 끼어들었다.
“잠깐.”
“말씀하시지요, 홍 대감.”
“예산을 확보한다고 했는데, 백성들의 부담을 늘려 세입을 확대하는 건 아니시겠지?”
“아닙니다. 백성들의 부담은 줄어들 겁니다.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세금이 적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조정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니까요.”
홍섬의 질문은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왕을 죽이는 것이 정당하냐는, 어떤 결말이 나오더라도 의미가 없을 지지부진한 논의 대신 세제개혁으로 화제가 바뀌었으니까.
누가 선조를 처형장이 될 육조 거리로 데려왔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협조란 딱히 특별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세법은 지저분하고 문란하여 부패가 개입할 여지가 큽니다. 집행이 번거로워 인력과 시간도 낭비되지요.”
“제도를 바꾸시겠다는 말씀이시군.”
“명나라에서는 세법만 바꿨을 뿐인데 이전의 몇 배나 되는 세입을 거두고 있다는군요. 남발되던 잡세를 하나로 통일하고, 운송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하는 곡식을 은으로 교체한 덕입니다.”
“그걸 조선에 똑같이 적용하기는 어렵네.”
은본위제를 시행할 정도로 은이 대중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명나라와 달리, 조선은 아직까지도 원시적인 현물거래 경제를 가지고 있었다.
“환경이 다르니 명나라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조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는 있겠지요.”
고작 한 식경 전에 모두의 앞에서 선조의 목이 썰렸지만 어전에서는 태연하게도 나랏일이 논의되고 있었다.
참으로 뻔뻔한 광경이 펼쳐졌지만 시립한 신하들에게는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조용히 있던 이이도 조금은 정신을 차렸는지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그런 개혁을 꼭 전하를 시해한 후에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힘을 가지지 못한 채로 목소리만 높이는 것은 오히려 개혁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좌절된 개혁이 두 번 좌절되기란 쉬웠으니까.
“형님께서도 백성과 종묘사직의 안녕을 위해 거듭 폐주에게 간언을 올리셨지요. 하지만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
“폐주는 왕이었고 신하들을 이간하여 권력을 모았지만 그것을 이용해 나라를 가꾸지는 않았습니다. 본말전도이지요. 왕이 힘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힘 자체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요.”
철학 없는 지배는 폭정일 뿐이다.
“나라가 내리막길을 걸어도 개의치 않던 폐주가 죽었으니, 기왕 이렇게 된 김에라도 다들 합심하여야지 않겠습니까?”
“금천부원군께서 진정으로 대의를 실현하고자 반역자를 자처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속이고자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인지 모르겠군.”
누그러진 어조를 보아 추궁은 아니었다.
단지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부모의 상도, 깨질 듯한 아픔을 딛고 나면 결국에는 잊고서 평소처럼 살게 되지요. 이 순간이라고 다르지는 않습니다. 병아리가 태어나 닭이 되기 위해서는 알을 먼저 깨야 하듯, 모두들 당혹스럽고 혼란을 느낄 테지만 결국 이 나라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에 이 사람은 한 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내가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대학살을 일으킬 사람이 아님을 알았는가.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은 한결 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안도하기는 이른 사람들이 있었다. 선조의 형제인 하원군과 하릉군이다.
만일 반역이 발생한다면 폐주의 형제인 두 사람을 추대할 가능성이 높았다.
“저…… 전하.”
장남이자 홍섬의 사위인 하원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왕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존칭이 나왔으나 새삼스럽게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오직 나뿐이다.
“이 사람은 왕이 아닙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불의한 폐주를 몰아내시는 데 앞장서셨고, 이제는 백성과 종묘사직을 위하여 한 치의 사심도 없이 의를 추구하시니 마땅히 일국의 군주나 다름없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둘째인 하릉군도 긍정하고 나섰다.
“신들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나아가 하릉군은 누구보다도 먼저 무릎을 꿇었다. 극진한 예를 표하자 주변의 신하들도 얼떨결인지 함께 절을 올렸다.
몇몇 사람들은 아직 나를 왕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는 듯 뻣뻣하게 서 있었다. 이이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아직 나를 완전히 믿지는 않는 듯했다.
절을 올린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서 은근히 불편한 기류가 흘렀으나 하원군이 나섰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셨던 왕대비 마마께서도 유명을 달리하신 지금, 왕실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감히 폐주의 형인 신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무언의 동의가 있었고 하원군은 말을 이었다.
“이에 신이 감히 폐주를 정식으로 폐할 것을 주청드리고, 어보를 바치고자 하니 윤허해주시옵소서.”
선조가 죽고서 내가 실권을 잡은 지금, 하원군과 하릉군이 목숨을 보전하는 법은 앞장서서 선조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참은 이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를 서둘러서 왕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폐주를 정식으로 폐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아직 이 사람이 어보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로군요.”
“자격은 차고 넘치십니다. 전하께서는 왕의 집안인 전주 이씨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나라에 지극한 공을 세워 거듭 일등공신 제일인에 녹권되셨으며 의정 대신이시고 폐주를 몰아내는데 앞장서시지 않으셨습니까?”
“음, 솔직한 말씀을 드리자면 이 사람은 이 사람은 직함에 연연하지 않아요.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과연 신하들이 인정할지 의문이로군요.”
어쨌거나 찬탈자가 아닌가.
서둘러서 왕위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거부감만 늘어날 터였다. 이유나 명분이 어떻건 간에 말이다.
이에 이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대감께서는 어떤 명목으로 조정을 대표하고 나라를 다스릴 생각이십니까?”
“국왕전권대리라도 상관은 없겠지요.”
“송구하오나 이 나라에 국왕전권대리라는 직책은 없습니다.”
이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라에 왕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대국에서도 사신을 보내게 되면, 어떻게 맞을 생각이십니까?”
“음.”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으나, 진정으로 나라를 책임지고 싶으시겠다면 왕위에 오르는 게 맞습니다. 세간의 이목을 의식하신다면…….”
이이는 무겁게 숨을 토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대감께 직접 어보를 바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