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91화
64. 반환점 (4)
솔직히 말하면,
‘겁이 나는군.’
마치 무당이 천기누설하듯 특급 정보를 나눈 홍섬. 선조에 의해 형이 참혹하게 죽고 자신도 고문당한 이길.
두 사람은 면전에서는 나에게 협조를 약속하였으나 진심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그동안 많은 것을 쌓아왔지.’
굴포운하를 성사하여 녹권된 일등 중흥공신 제일인.
명나라에서 종계변무를 성사하여 녹권된 일등 광국공신 제일인. 동시에 명나라의 실세였던 장거정의 눈에 들어 받은 종삼품 명예직 이중대부(亚中大夫).
본래는 동, 서인 양당의 중요 인물들이었을 자들을 회유하여 만든 제삼당과 여기에 동, 서인 온건파와 중립적인 자들까지 포함하여 발족한 연대.
국경 너머의 인연으로 시작해 육진 지역을 감쌀 정도로 성장한 여진족 족장들, 김자강과 율보리 그리고 석탈리.
안동부원군 권철의 손녀사위가 되면서 졸지에 책임지게 된 안동 권씨.
중흥공신과 광국공신은 물론 앞선 위사공신과 정국공신의 자제들과 회합을 가지며 은근슬쩍 차지하게 된 4대 공신 대표의 자리.
어렸을 때부터 신분의 벽을 넘어 친하게 지냈으나 이제는 완전히 다른 관계가 되어버린 을룡과 그의 수하들.
숭신방 저택에서 불편한 몸을 이끌면서도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폐질자들.
인창방 금천병원에 기대 전국에서 찾아와 일신과 운명을 의탁하는 독질자들과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헌신하는 허준과 의원들.
그리고…….
문중의 어른을 통해 나에게 우연히 전해진, 태종대왕이 양녕대군의 자식들에게 왕위의 무거움을 통감시키고자 하사한 철궁.
황제가 공을 세우고 믿을 수 있는 제후에게 하사하는 것이었으나 황위를 찬탈하기 전 단계인 구석(九錫)을 받을 때도 포함된 노궁노시(盧弓盧矢)까지.
하나하나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경지고 업적이었으며 위치이자 세력이고 하사품이었다.
조정에서 목소리 비슷한 것이나마 내기 시작한 것이 최근의 일임에도 정계 실세로 손꼽히는 이유가 달리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성취해온 그 무엇도 왕위 자체와 비교할 수는 없다.
나는 이 왕위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판돈으로 삼았다. 사상누각(沙上樓閣)으로 만들었다.
야욕 때문인가?
왕위 자체는 그다지 매력적인 자리가 아니다. 만 가지 일을 한다는 뜻의 이명인 만기(萬機)라는 이명을 가진 왕위다.
누가 고생을 자처한단 말인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인가?
나는 분명 선조를 증오하고 혐오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만을 바랐더라면 기회는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선조를 죽일 수 있는 기회‘만’을 탐하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을 방어하기 위함인가?
정치적인 영향력이 손에 꼽히는 나라면 설령 신하의 자리라도 조선이 전쟁을 방비하게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전쟁을 준비할 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압박하며 숙청을 시도할 선조의 방해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놈은 오히려 내가 임진왜란을 바라게 만들었다. 전쟁의 혼란을 틈나 쉽게 선조를 죽일 수 있도록.
‘하지만 내 인내심은 생각만큼 오래가지는 못했지.’
벌써 선조를 죽이려는 계획이 시행되었으니까.
어쩌면 세 가지 이유 전부일 수도 있고, 고작 그런 이유만이 아닐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건.
나는 이 순간 무척이나 절실했다.
단지 나와 가족의 목숨이 걸렸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래.’
조선이 원 역사보다 나은 역사를 새로 써나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시도할 정도로.
이것이 진정한 이유다.
“대감!”
밖에서 을룡이 외쳤다.
다급한 목소리다.
희소식인가. 아니면…… 비보인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지만 나는 애써 기색을 가다듬고는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왕이…… 왕이.”
“말해봐라.”
“광화문을 나섰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셔야 합니다. 수하들은 이미 모두 의금부 근처에서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발길을 재촉했다.
적막과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거닐 때마다 다리가 긴장으로 징징 울어댔다. 시야는 아득했고 정수리는 지끈했다. 손에서는 땀이 그치지 않았다.
육조거리로 나아가는 이 순간,
차라리 시간이 정지하기를 빌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배려심 넘치지 않았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고 나 역시 마침내 육조거리에 당도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선조와 그를 보좌하는 궁인들이 보였다. 주변에는 대동한 몇 명의 재상들이 보인다. 필두는 홍섬이었다.
‘제길.’
나는 입에 한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그새 목이 부었는지 거의 넘어가지 않고서 아프기만 했다.
‘완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 이순신아, 홍섬도 이길도 각자의 역할을 해냈는데 왜 일을 꾸미고 지시한 네가 겁을 낸단 말이냐?’
이를 바짝 물고서 손을 안으로 집어넣어 가슴을 긁었다. 손톱 사이로 살점이 밀려들며 벼락처럼 고통이 찾아왔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이제야 좀 낫구나.’
나는 손톱에 달라붙은, 얇게 말린 거죽을 털어내고는 한결 편안해진 채 선조에게로 나아갔다.
어둠 너머로 긴장을 드러내던 선조와 일행은 나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안도를 표했다.
“우의정 아닌가.”
“예. 전하.”
“이이의 국문이다. 경도 참석하라.”
“알겠사옵니다.”
예를 표하고 물러나는 일만 남은 순간.
-팡!
파공음이 야밤의 거리를 울렸다.
조선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소리다.
“활이다!”
“자객이다!”
선조를 수행하고 있던 궁인들이 우르로 선조에게 달려들어 인간의 장막을 만듦과 동시에, 주변을 지키고 있던 군관들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경호 인력이 대폭 줄어듦과 동시에…….
“윽?”
나는 선조에게 파고들 수 있었다.
인의 장벽 사이에 갇힌 선조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확인하지 못한 듯,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우중충한 밤이었지만 나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목옆에 난 자상에서 새카만 피가 꿀렁꿀렁 흐르고 있었다.
경동맥 절단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지혈이 어려운 동맥. 그중에서도 뇌로 혈액을 보내는 경동맥이 끊어졌다는 건 사형선고와도 같다.
선조는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겠지.
터무니없는 광경에 주변의 궁인들도 일순 굳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충격과 반전을 이해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탕!
이번에는 활시위보다 훨씬 위협적인 소리가 거리를 울린다. 총소리다. 익숙하지 않으나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두 엎드려라!”
골목에서, 건물 담장을 넘어서 족히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엎드리라는 명령에도 버티고 서 있던 군관들은 이어지는 총성 앞에서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단단한 흙바닥 위로 환도 떨어지는 소리가 싸늘했다.
“저, 전하!”
“전하를 보호해야…….”
궁인들은 쓰러진 선조를 몸으로 덮어 지키려 하였으나.
이내 밀착한 내시 몇 명이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엎드리라는 자객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기겁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외쳤다.
“전하!”
왕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마저 왕의 상태를 확인할 새도 없이, 자객들이 다가와 사람들을 제압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어딜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느냐!”
“전하의 용태를 확인해라!”
발작적인 외침이 이어지자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생기를 잃어가는 선조와 제압당한 신하들에게 협조적인 자들은 아니었다. 소위 ‘자객’이라는 자들은 이제 수백 명 수준으로 불어나 있었다.
개중에서 한 사람이 인파를 뚫고 나섰다.
누군가에게는 눈에 익은 자였다.
“저, 저자는?!”
“금천부원군 댁에서 일하는 자가 아닌가!”
을룡이었다.
그는 뭇 사람들의 시선과 고발에도 아랑곳 않고 엎드린 사람들 사이로 나아가, 한 사람을 일으켰다.
“어르신.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없다. 옷만 좀 지저분해졌지.”
을룡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금천부원군은 떨쳐내듯 팔을 털었다. 그러자,
-탱그랑!
요란한 금속음이 밤거리에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뼘 크기의 장도(粧刀)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어르신께서는 무탈하시다. 다들 폐주를 끌어내라.”
자객들 일부가 칼을 뽑아들고 궁인들에게 다가갔다. 대부분은 물러났지만 마지막까지 충심을 발휘한 자들도 있었다.
말로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으악!”
“전하!”
절망적인 비명과 단말마가 거리를 채웠다. 피가 낭자하게 흩뿌려진 다음에야 핏물로 새카맣게 물든 곤룡포와 사람 하나가 끌어내졌다.
반응은 없었다.
“어르신.”
금천부원군은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을룡은 허리춤에 환도를 뽑아들었다. 모두가 경악하는 눈빛으로 보는 사이, 사람 머리가 마치 고기 덩어리 끊어내듯 떨어져 나갔다.
수많은 입이 떡하니 벌어졌지만 말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을룡은 자신이 두 발로 딛고 있던 나라의 주인의 목을 치고도 별 감흥은 없다는 듯 들어 보였다.
“처치했습니다.”
“궁을 확보해라.”
“예.”
왕이 죽었으니 궁궐은 이제 주인이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선조의 핏줄은 남아 있다. 정리를 잘 하지 않으면 회근이 될 수 있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자리에 일단의 무리가 접근한다. 자객들에게 호전적인 태도는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을 발견하고는 다시 경악한다.
“저, 저들은…….”
“북적(北狄)이 아닌가?”
그동안 위장하느라 답답했는지 여진족들은 강 너머처럼 평소다운 복장과 몰골을 한 채 마치 전리품처럼 각자 포로를 끌고 왔다.
선조의 형제인 하원군과 하릉군.
의금부에서 선조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재상들.
집에서 태평하게 잠이나 자다가 뜬금없이 끌려 나와 속옷 차림인 관리들까지.
그들은 육조거리를 메운 자객들과 즐비한 핏자국, 시체를 발견하고는 바로 사태를 파악했다. 눈치를 보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나 굳이 입이 화의 근원임을 증명하는 자들도 많았다.
물론 그들의 결말도 선조의 시체나마 지키고자 했던 충성스러운 궁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르신, 궐이 확보됐습니다.”
어느새 돌아온 을룡이 보고했다.
여전히 손에는 선조의 머리를 쥔 채였다. 이전과는 달리, 들고 다니기 쉽게 상투를 푼 채 머리칼을 낚아챈 형상으로.
뒤늦게 끌려 나온 사람들은 머리의 주인을 즉시 알아보고는 사세가 확실해졌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부인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일부는 현실이 와 닿지 않아 반응을 못 하고 있었다.
현장에 없던 사람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조가 대가리만 남아있더라, 는 터무니없는 상황에 처했으니까.
왕이 거리 한복판에서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으나 경과는 참으로 간략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반란이라는 게 원래 눈 깜짝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것 아니겠나?
금천부원군은 많은 것을 떨쳐낸 듯 한결 편해진 목소리로 권했다.
“다들 입궐합시다. 나라의 중차대한 일을 논의해야 하니.”
신하들은 주변의 무장한 자객과 여진족들을 의식하며 슬금슬금 금천부원군, 아니, 왕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