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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90화 (19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90화

64. 반환점 (3)

선조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논의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신경질적이었으나, 원인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또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고.

만성적으로 지랄하는 사람인데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나?

회의는 끝물에 이르러 중대한 사안이 모두 정리되자 선조가 입을 열었다.

“복상(卜相) 결과에 대해서 알리겠다.”

복상이란 대신들이 추천한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발하여 고위직에 임명하는 인사 방식이었다.

최근 의정직 하나가 공석이 되었다. 마땅한 적임자가 없어 한동안 공석인 채로 표류하였으나,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는 없어 이번에 복상하게 됐다.

“영중추부사 박순과 지돈녕부사 금천부원군 이순신이 물망에 올랐으나…….”

전직 의정이며 서인 영수이나 휴식을 위해 한직을 자처했던 박순.

공로에 어울리지 않게 한직만을 자처하다 최근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이순신.

두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자 어전에 자리한 제신들은 바짝 긴장하고서 귀를 열었다.

누가 의정이 되느냐에 따라서 조정의 향방이 달라질 터이니.

“최종적으로는 금천부원군 이순신이 의정부 우의정에 낙점되었다.”

신하들이 크고 작은 놀라움을 느낄 동안 선조는 도승지에게 턱짓했다. 이에 도승지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교지를 펼쳤다.

“금천부원군은 나오시오.”

이에 금천부원군이 어좌 앞으로 나왔고 도승지는 교지를 읽었다.

“금천부원군 이순신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겸 감춘추관사에 제수한다.”

비록 정이품에서 두 품계를 뛰어 단숨에 정일품 관직을 얻게 됐다고는 하나, 정작 삼의정을 능가하는 최고 요직인 육조 판서는 한 번도 지내지 못한 그였다.

품계 역시, 의정이 일반적으로 받는 품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보다 반 단계 낮은 보국숭록대부 품계를 받았다.

두 번이나 일등공신 제일인에 녹권되고 대명의 관직도 얻었으며 손꼽히는 정계 실세임을 고려하면 너무한 처사다.

아니, 그런 이유로 견제가 가해지는 것이겠지.

하지만 금천부원군 이순신은 불쾌해하는 대신 황송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작은 공로가 있다고는 하나 영중추부사는 물론 다른 신하들이 오랫동안 봉사한 것에는 비할 수 없음에도 막중한 직책을 맡기시니 거듭 감읍할 뿐이옵니다.”

이제는 우의정이 된 금천부원군이 감사를 표하자 선조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내가 박순이 아니라 그대를 우의정에 임명한 이유는, 앞으로 오랫동안 나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경은 이러한 은혜를 잊지 말라.”

“각골명심하겠나이다.”

“회의는 이만 파하겠다. 제신들은 물러나 각자의 역할을 다하라.”

선조는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 휘적휘적 사정전을 빠져나갔다.

신하들은 보는 눈이 없어지자 새로운 실세에게로 다가갔다.

“우의정에 제수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금천부원군 대감.”

“경하드립니다.”

“그동안 공로에 비해 맡는 역할이 적당하지 않아 우려하는 바가 컸는데, 이제야 관직이 대감께 걸맞는 듯합니다.”

금천부원군이 내로라하는 유명인들과 회합을 가지며 조정의 안녕을 천명하였다는 사실은 조정에 만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이에 이발의 잔혹한 처형으로 정쟁에 질린 동서 양당의 수많은 당여들이 금천부원군에게 의탁했다.

일신의 안녕과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은 물론 한 팔 거들겠다는 자들, 심지어는 얼굴도장이라도 찍어 떡고물을 기대하는 자까지 관광방의 흰 벽돌담 집에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신들이라고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웅대한 뜻을 품으신 금천부원군께서 드디어 의정에 제수되셨으니, 조정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겠습니다.”

“이전부터 대감의 말씀이 지극히 옳다 통감하고 있었으나 감히 표출하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도 알아주시는 듯하여 다행입니다. 감히 도움이 되고자 하니 미력한 힘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대, 대감. 이전에도 몇 번 뵈었지요? 대사헌을 지내고 있는 이식(李拭)이라 합니다.”

금천부원군은 앞다투어 몰려드는 대신들과 모두 인사했다. 지칠 법도 하건만 부드러운 미소와 친절한 응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신들은 각자가 원하는 바를 얻은 듯 만족하고서 물러났다.

오직 홍섬만이 어울리지 않게 잔뜩 긴장한 채 조용히 있을 뿐.

소란이 잦아들고 사정전이 적적해진 후에야 홍섬은 금천부원군에게로 다가갔다.

“결국 의정대신이 되셨군.”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되고 나서야 자신감을 부려서는 의미가 없지.”

“되기 전에도 자신감을 부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대감께서는 이 사람을 고발하지 않았군요.”

“동래에 두 사람을 보냈는데 돌아올 때는 셋이 됐더군.”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나는 재미가 없더군. 이제는 우의정까지 되신 금천부원군 대감께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났다는 걸 알게 되어서 말일세.”

이순신은 홍섬이 제안에 응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자칫 나라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동래로 내려가는 길목에 사람을 미리 보내두었다. 홍섬의 수하들에게 상전이 뒤늦게 보낸 일행인 척 합류시키고자.

타지로 떠난 홍섬의 수하들이 무슨 전언을 받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감시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이 사람에게 하실 말씀이 많아 보이십니다. 끝까지 남아서 기다리신 걸 보면요.”

“잘 아시는군.”

다만 여기서는 아니라는 듯 홍섬은 발을 돌렸다.

* * *

“어르신.”

을룡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이곳은 내 저택이 아니다. 홍섬의 저택이지.

을룡은 감시를 위해 홍섬의 저택에서 식객으로 머물고 있었다.

“별일 없었나?”

“예.”

“다행이군.”

미친 왕과 구렁이 같은 늙은 신하들을 상대하는 일에서는 무소식 같은 희소식도 없었다.

홍섬은 곧장 사랑방을 찾았다. 그는 나이나 직급이나 나보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음에도 상석을 양보했다.

“마음을 정하셨군요.”

고발하는 대신 나를 초청한 시점에서 이미 드러났지만 말이다.

홍섬은 착잡함을 드러냈다.

“그대가 옳았네.”

“새삼스러운 말씀이십니다. 사실대로 말씀 드렸을 뿐이니까요.”

“왜구들의 정황은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 내가 알기로 금천부원군께서는 동래는 물론 하삼도조차 찾아본 적이 없을 텐데?”

“납득하실 만한 대답은 못 드리겠군요.”

“주술이라도 썼단 말씀이신가? 당연히 아니겠지.”

“그런 식으로라도 이해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어떻게 하나.

아무리 사실이라도 신뢰도만 깎아 먹을 거다. 제정신으로는 입 밖으로 낼 말도, 들어줄 말도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전쟁이 일어난다고 확신은 못 하겠지만…….”

“신중한 것과 현실을 부정하는 건 다릅니다.”

“증좌가 없는 건 사실이잖나? 게다가 금천부원군께서는 전쟁 대비를 이유로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을 꾸미고 있어!”

“대감께서는 꼭 칼을 맞아봐야만 위험에 처했다는 걸 확신합니까?”

“과장이 심하시군.”

“그렇다면 말씀해 보시지요. 어디부터가 위험한 겁니까? 목에 칼이 들이 밀어졌을 때? 코앞에서 칼잡이가 달려들고 있을 때?”

나는 코웃음 치고는 말을 이었다.

“무신경하신 겁니까, 아니면 부정하고 싶으신 겁니까?”

“…….”

“이 사람이 추진하는 일에는 종묘사직의 존속과 수많은 백성의 목숨이 걸려있어요. 이 나라는 한 사람만 죽느냐, 수십만이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금천부원군께서 말하는 한 사람이란.”

“누구보다도 많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제 한 목숨 살리고자 수십만 목숨이 아니라 수백만 목숨도 희생할 수 있는 자이지요.”

“설마.”

“방향성도 없이 맹목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데 신하 수십 명을 죽이려 들었던 사람입니다. 한 번 피를 보기 시작하면 영원히 막을 내릴 수 없을 것을 모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에요.”

“지금에라도 방비에 신경 쓰면 되지 않나? 아무리 왜구가 침공해온다 하더라도…….”

“놈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계시군요. 놈들은 백 년도 넘게 내전을 해왔습니다. 조총과 같은 선진 무기를 이용해서요. 그들이 합심하여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면 어설픈 방비로 막을 수 있으리라 믿으십니까?”

나는 팔을 꼬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 순간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채 내전으로 단련된 50만 정병이 쳐들어올 겁니다.”

“오, 오십만?! 터무니없는 소리일세!”

“왜인을 불러놓고 사실 확인만 하셨지 그 이상을 알아보지는 않으셨군요.”

정곡이었나.

홍섬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내전을 하는데 양측이 만 단위의 병력을 끌고 오는 동네입니다. 인구 숫자도 열도가 조선을 넘겼어요. 세율도 최저 7할입니다. 고작 병사 50만을 못 만들 것 같습니까?”

“그렇게 내전을 거듭하면서 어떻게 인구가 아조를 넘긴단 말인가? 허황된 수치일세!”

“명나라와 조선만 함지박만 하게 나오는 쓰레기 같은 지도만 보셨군요. 혹시, 왜놈들이 콩만 한 섬에서 옹기종기 모여 인간의 탑이라도 쌓고 사시는 줄 아십니까?”

“…….”

“왜놈들 섬 크기가 조선의 한 배 반입니다. 동네에서 왈짜패 이인자 노릇을 한다고 세상에서 두 번째 되는 거 아니라는 말입니다.”

홍섬은 의정 대신의 품위도 잊고서 입을 쩍하니 벌렸다.

상식이 파탄 나는 기분이겠지. 증거라곤 어디에도 없지만, 내가 하는 말들을 의심하기에는 이미 앞서 알려준 정보들이 사실임을 확인한 홍섬이었다.

“허, 허어어어……. 왜병 오십만이라니.”

오십만 병력은 두 차례에 나뉘어 쳐들어오며 상당 숫자는 현지에 남아 대기하고 있었지만, 뭐. 그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이 사람의 바람은 간단합니다. 조선 백성들의 피를 거름 삼아서 자란 양곡을 왜놈들이 추수하는 광경을 안 보는 겁니다. 대감께서는 이 사람과 생각이 다르십니까?”

“……아닐세.”

“이만했으면 설득은 충분한 줄로 압니다만.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천부원군의 말씀이 옳네.”

홍섬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최근 이이가 백인걸의 상소를 대필하였다는 혐의를 입었어요. 이 사람은 국문이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왕을 끌어낼 생각인가?”

선조는 자기가 적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편집증 환자이기도 하지.

덕분에 궁궐 안에서 없애기란 불가능했다. 신체검사도 철저할 뿐만 아니라 기미 상궁을 통해 중독도 방비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끌어내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이발 때 처치했어도 됐지만, 그때는 명분이 없었어.’

사방에서 왕을 복수하겠다는 놈들이 들고 일어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발의 건으로 상당한 인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정쟁을 저지하려는 연대를 다방면으로 공격했다.

대표적인 것이 내가 언급한 이이의 백인걸 상소 대필 건이다.

이이는 조정의 분열을 막고자 동, 서인이 형성되기 전부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아예 분열의 단초였던 심의겸과 김효원을 직접 설득하기도 했으니 말 다 했다.

결과적으로, 선조는 공신에다 명나라의 명예 관원으로서 탄탄한 정치 기반을 가진 나보다는 오래전부터 정쟁을 봉합하려던 이이를 노렸다.

‘덕분에 원성을 사는 중이지.’

이발을 참혹하게 죽이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뭇 사람의 존중과 존경을 사는 이이에게 혐의를 씌웠으니 반응이 어떻겠나?

놈은 정확히 예상대로, 그리고 기대대로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반발이 거세어 발을 빼려는 느낌이 들지만.

다시 발을 넣게 만들면 그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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