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89화
64. 반환점 (2)
“이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 건가?”
홍섬이 물었다.
“제공들과 자리했을 때 적잖이도 불편해하시더군요.”
시선을 돌리거나 헛기침을 하는 등 자리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원 없이 드러낸 홍섬이다.
간접적으로나마 왕의 만행이 성토되고 신하들은 연대하여 폭정에 저항하기로 약속했다. 편집적인 망상증 환자인 선조에게는 반역이나 다름없는 짓이지.
홍섬이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사림 세상에서 홀로 재상에 위치한 훈구파 잔당이다.
보신이 몸에 밸 수밖에 없다.
“대감의 우려를 이 사람이라고 모르는 건 아닙니다.”
“잘 안다는 분께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연대를 약속하셨나? 심지어는 각자의 서명까지 받아내고?”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위험할 정도의 야망을 품은 자들은 항상 그런 말로 합리화하더군.”
홍섬이 딱딱하게 말했다.
정계 짬밥을 뒤로 먹지만은 않았나보군, 그는 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종묘사직과 백성의 안녕을 연대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어디 선조가 그 지랄 맞은 성격에 연대를 가만히 보고만 있겠나?
어떻게든 정치척, 물리적 피해를 입히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행위 하나하나가 선조 그를 몰아내야 마땅할 명분이 될 터였다. 사람의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으니, 당하는 신하들도 점차 충심이 깎여나가고 선조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하겠지.
그리고 열매가 충분히 익었을 때…….
“대감께서는 이 사람에 대해 많이 오해하고 계시군요.”
“오해라니?”
홍섬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를 속일 수는 없으시네.”
“이 사람이 대감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큰 그림을 보시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큰 그림? 하!”
“대감께서는 열도의 근황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나. 가당찮다는 듯 비웃었던 홍섬이 당혹을 드러냈다.
“열도라니? 갑자기 열도의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건가?”
“대답을 회피하시는군요.”
“…….”
“열도에 대해서 아시는 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딱히 문제될 요인은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도 열도에 대해서 모르기는 매한가지니까요.”
설령 왜국 상인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부산포의 첨사라도 매한가지일 거다.
조선인 관리의 눈에 왜인은 미개인이자 야만인이었고 왜구, 혹은 잠재적 왜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수없이 많은 회의에 참석했으나 왜인이나 그들이 거주하는 열도에 대해 심도 높은 논의가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원 역사에서 통신사를 파견한 것도 먼저 위기를 감지해서가 아니라, 왜가 몇 년이나 거듭하여 사신을 청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은 왜에 무관심했다.
“열도는 왜 언급하는 건가? 놈들이 침략이라도 한단 말인가?”
“바로 아시는군요.”
“놈들이 할 짓이라곤 뻔하지. 고작 왜구들의 침략 따위로 자네의 야욕을 정당화할 생각이신가? 욕심에 눈이 머셨군.”
“고작 침략 따위가 아닙니다, 대감.”
홍섬은 턱을 치켜들었다. 들어나 보자는 듯.
“왜국은 오랜 시간 내전을 겪었습니다. 마치 조선의 모든 수령이 왕을 참칭하고 서로 정복하고 복속하듯이 말입니다.”
“저급한 야만인들다운 행태이지. 알고는 있네. 왜왕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나라가 사분오열되었다지.”
“덕분에 조선은 개국 이래 평화를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삼포왜란도 고려 말 왜구의 침략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지요.”
“이제는 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정확합니다. 왜구 우두머리 중 하나가 열도 대부분을 장악했다는군요.”
오다 노부나가.
“아시겠지만 열도는 세상의 끝입니다. 세를 넓히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을 통해야 하지요. 북방의 야만족들이 통일되면 항상 중원을 노렸듯 놈들도 성질은 같습니다.”
통일되면 반드시 한반도를 노린다.
“상황이 달라졌다는 건 알겠네. 하지만 왜침이 실현된다는 징조는 어디에도 없었어.”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그래. 아직까지지. 결국 금천분원군의 말은 분명하지 않은 외침을 이유로 야망을 정당화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네.”
“명백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소위, 대감께서 말씀하시는 ‘혼란’을 조장하는 이유는 야망 때문이 아닙니다. 전후 관계도 틀리셨고요.”
“또 대단한 이유라도 있단 말씀이신가?”
홍섬은 안 들어도 뻔하다는 듯 빈정댔다.
그에게 이순신이란 예비 찬탈자에 지나지 않겠지. 덕분에 가식은 필요 없게 됐다. 원한다면 기꺼이 나의 본심을 드러내 주리라.
“이 사람에게 야망은 없습니다. 단지 개인적인 감정만 있을 뿐이지요.”
“뭐?”
“그리고 외침을 언급한 이유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외침을 방어하기 위함입니다.”
“…….”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홍섬은 눈을 무섭게 떨어댔다. 야망이나 야욕이 아닌 고작 개인적인 감정으로 왕을 치겠다니 사고의 한계를 시험하는 기분이겠지.
나아가 외침을 방비하고자 왕을 갈아치우겠다는 것도 이해하기 쉬운 발언은 아니었다.
그는 무척이나 의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금천부원군께서는 충을 무엇이라 생각하시는 건가?”
“이 사람은 일방적인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거래? 충은 대가가 없는 헌신일세, 거래가 아니라!”
“금상께서는 매번 신하가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계시지요. 숙청, 내분 조장, 고문, 죽음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이니 왕권을 강화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해할 만한 목적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선조에게 어떤 통치의 이념이나 철학이 있던가?
없다.
마치 굶주린 아귀가 무한히 식탐을 탐하듯 놈 역시 끝없이 권력을 탐할 뿐이었다.
“그렇게 설쳐서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권력만을 강화할 뿐이지요. 내리막길을 달려가는 수레에 방향성이 없다면, 결국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뻔하지.
어딘가에 처박고 박살나지 않겠는가.
“금천부원군께서는 우려가 과하시군. 전하께서 야욕이 강한 것은 맞지만 나라를 파탄 낼 정도는 아니시네.”
“그렇다면 말씀해 보시지요. 만일 이발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측근들까지 모두 죽고, 이 사람이 유력자들을 규합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습니까?”
“…….”
“지금의 정쟁은 과거의 정쟁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정치적 이익이나 지분이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벌어지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피를 뿌리는 것은 짚단에 불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기축옥사 때는 수천 명이 무고하게 죽지 않았나.
이후 동인과 서인은 서로 용서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이후 조정은 항상 패가 갈린 채 정쟁만을 이어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열도의 모든 왜인들이 합심하여 조선을 노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내우외환만큼 확실하게 나라가 망하는 방법도 없습니다.”
“…….”
홍섬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고민이라도 하는 걸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질 쯔음 홍섬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침이라는 것은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근시일 내에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더 문제이지요. 나라가 더 파탄나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야 종묘사직을 보전할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아니, 금천부원군께서는 너무 멀리 나가셨네. 시기적절하게 이런 때 전쟁이 벌어진다고?”
“예.”
“왜구들이 다시 분열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
“운명이란 가능성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최악을 선사하는 법이지요. 예로부터 천하는 합구필분이지만 분구필합이라고도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분구필합의 때일지도 모르지요.”
“……후.”
홍섬은 묵직하게 숨을 토해내고는 다급히 물었다.
“금천부원군의 예상이 맞을지라도 저들이 쳐들어온다는 증좌는 어디에도 없어. 게다가 세가 규합되었다는 말도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네.”
“아직일 뿐입니다. 정 궁금하시다면 조정을 설득하여 사신을 파견해도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일세. 고작 오랑캐들 따위에게 사신을 보내자니?”
“대감께서도 조정이 얼마나 왜구에 무지한지 알고는 계시군요. 부디 한 사람만이라도 깨어 있어야, 이 나라의 존속이 시험을 안 받을 텐데 말이지요. 아!”
나는 놀란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한 사람은 깨어 있군요.”
바로 나 말이다.
“빈정대지 마시게, 금천부원군. 그대의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따라 종묘사직이 누구에게 위협을 받을지 달라지니 말일세.”
찬탈자에게냐, 외적에게냐.
혼란스러워하는 홍섬에게는 미안하게도 현 상황에서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원 역사에서 조선은 실제로 대규모로 침략을 당했고 이 세계에서 왜국은 어떠한 변화에도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놈들은 반드시 쳐들어 온다.
“대감께서 이 사람을 믿어주셔야 할 터인데 말이에요.”
“그대라면 쉽게 믿을 수 있겠나?”
“그건 그렇지요. 만일 대감께서 딴 생각만 안 품으신다면 이 사람의 신뢰를 확인시켜드릴 수 있습니다만.”
홍섬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어떻게?”
“이 사람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면 그만 아닙니까? 왜인이야 부산포에도 많으니 사람을 써서 불러 물어보시면 그만이지요.”
“왜구들이 쳐들어 올 예정이라면 그걸 순순히 불지는 않겠지.”
“침략 의사를 물어보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만 하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을 말이다.
“색목인 국가인 포도아(葡萄牙)와 화란(和蘭)과 교류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냐. 그들이 퍼뜨린 종교의 이름이 기리시탄이 맞느냐. 더불어 조총을 전수 받아 십수 년 전부터 전쟁에서 쓰고 있다는 게 사실이냐. 열도를 규합하고 있는 왜장의 이름이 직전신장(織田信長)이 맞느냐…….”
“자, 잠깐!”
홍섬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걸 금천부원군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신 건가?! 이제 와서 그냥 해본 말이라고 하지는 않겠지!”
“출처가 왜 중요합니까?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만일 금천부원군의 말이 장난에 불과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대를 발고할 걸세.”
“장난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홍섬은 입술을 씹었다.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귀한 정보를 알려 드렸고, 허심탄회하게 중차대한 말도 나눴으니 일단은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이 사람의 말의 사실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는요.”
“걱정하실 필요 없네, 나 역시 그대에게 들은 말이 질 나쁜 장난인지 혹은 진정인지 확인해야 하니까.”
“알고는 있지만 유비무환이라지 않습니까. 헛짓이라도 하시면 이 사람은 하원군(河原君)을 팔 겁니다.”
하원군 이정(李鋥).
그는 선조의 형이었으며 동시에 홍섬의 사위이기도 했다. 만일 하원군이 휘말린다면 홍섬이라고 성하기는 어려웠다.
“믿는 구석이 있었군.”
“대감의 저택에 온통 이쪽 사람뿐이고, 하원군이 한 수레는 더 있었더라도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다른 분도 아니라 대감을 포섭하고자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지요.”
“기분 좋은 칭찬은 아니로군.”
“의정직 하나가 공석인데 복상(卜相)에 이 사람이나 올려주십시오.”
“이참에 의정대신도 해먹으겠다?”
“그동안 해온 일에 비해 대접이 박해서 말입니다.”
두 번이나 공신에 녹권되고 명나라의 관직도 얻었으며 선조의 지랄도 몇 번이나 받아줬는데 고작 지논녕부사라니?
슬슬 대업을 성취해야 하는데 언제까지고 허울뿐인 관직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유력자들과 규합을 천명했으니 금상의 눈에 날 텐데 지금 있는 관직이나 건사하시게.”
“몇몇 사람들은 호의를 보이면 우습게 알고, 위협을 해야 존중을 드러냅니다.”
선조가 그러했다.
제삼당이 나를 앞세워 이발의 문초를 저지했을 때, 나는 선조가 어디까지 지랄할까 전전긍긍했으나 의외로 쉽게 풀렸다. 깊게 파고들지 않고 언급만 한 뒤 넘어간 것이다.
속에서는 칼을 갈았겠지만, 이제 와서 칼을 갈아봐야 무슨 소용인가?
이쪽은 한참 전부터 칼을 갈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