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88화
64. 반환점 (1)
선조가 자멸로 한 걸음 나아간 것과는 별개로 조정의 열기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정철이 이발의 처형을 담당하게 되면서 결국 동인과 서인은 목숨과 피로서 씻어내야만 하는 원한 관계가 되었다.
정확히 선조가 바란 흐름이다.
아직까지는.
“공사가 다망하신 분들이 귀한 시간을 내어주시니 이 사람이 진실로 기쁩니다.”
나는 대청에서 여러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동인 영수인 이산해. 그리고 최근 유명을 달리한 형 이발을 대신해 자리한 동생 이길.
사림 원로이자 을사사회 희생자를 대표하는 노수신.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기 시작한 이이.
훈구파 잔당이자 위사공신과 정국공신을 함께 대표하는 홍섬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손님들과 함께 좌석하게 되어 내심 놀라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금방 친해지실 겁니다. 우리 모두, 한 가지 공통점만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으니까요.”
조정을 분열시키고 싸움을 붙이고자 무리수를 두는 선조가 질렸다는 거다.
* * *
주안상이 마련되었으나 잔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나만 바라보고 있을 뿐.
지난 공신 회합에 이어 정계의 핵심에 자리한 인사들이 한 곳에 모였다. 고작 농담이나 따먹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자리를 마련한 금천부원군의 이어질 말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면 기꺼이 기대에 응해줘야지 않겠는가?
“이 사람이 제공(諸公)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근래에 들어 조정의 풍파가 갈수록 세차게 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어쩌면 감히 말을 입 밖으로 낼 생각조차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오늘날 조정에 부는 삭풍은 이유 없이 부는 게 아닙니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요. 원인도 분명하고 결과도 뻔합니다.”
“…….”
“헌납이 비록 죄를 자복했다곤 하나 엄연히 간관의 신분에서 저지른 일인데, 사사(賜死)도 아닌 참수가 집행되었지요.”
사람의 목을 자른다는 것은 극단적인 형벌이다.
사지를 찢는 거열형이 역적들에게나 어울리듯이.
조선의 관리들은 대역죄가 아닌 이상 아무리 중한 죄를 지어도 사약을 마시고 죽는 사사(賜死)가 일반적이다.
곱게 죽이기 힘들거나 확실하게 죽여야만 한다면 교수형이라는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선조는 정철을 시켜 공개적으로 참수를 집행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형을 확정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홍 대감이십니다만…….”
죄를 고발하는 것이 아님에도 홍섬은 눈치라도 보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훈구파 잔당의 후손으로 평소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아온 탓이리라.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겁니다.”
곳곳에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홍 대감이 이발의 참수를 결정한 게 아니라면 누가 결정한 것이겠나? 뻔했다.
선조다. 말했듯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그럼에도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표출하는 이유는 공개적으로 왕의 지독한 만행을 성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언급만 안 됐다 뿐이지 누구를 말하는지가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몇몇 분들께서는 이 사람의 발언에 당혹감이나 부담감을 느끼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비유를 하자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수고와도 다르지 않다고 해야겠군요. 불편한 기분이 든다는 것은, 달리 말해 본인도 현 상황이 얼마나 부당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흠흠, 거리며 은근히 주제에 대한 부담감 표현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감히 정의가 무엇인지 규정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람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삼거나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자 부모와 형제를 면전에서 고문하려 드는 것이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최근 보여준 선조의 행동은 언급만 회피되고 있을 뿐 모두에게서 공분을 사고 있었다.
그의 왕권 강화 시도와 정쟁에 피로감을 느끼는 자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종묘와 사직이 우선되는 이유는,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울 때 백성들의 안녕 역시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선대 왕들을 기념하고 토지신을 숭상하는 행위가, 당연히 백성들의 안녕과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속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할 뿐.
임진왜란을 맞고도 망하지 않은 게 신기한 나라인 조선의 존속 자체에 대해서는, 나는 어떠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조선이 존속이 위협받는다면 곧 백성들의 안녕도 위협받는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백성의 안녕을 수호하는 행위가 곧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는 것입니다.”
“……금천부원군께서는.”
홍섬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쩌자는 말씀이신가.”
논의는 점차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겠냐니, 당연히 문제를 해결해야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직관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이다.
바로 문제의 원인을 적출, 제거하는 거다. 물론 현 상황에서 문제의 원인이란 당연히 선조를 말한다.
‘마음 같아서는 이쪽이 훨씬 매력적이지만.’
애석하게도 조선은 충의의 나라다.
진심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 가식이라도 사회의 질서란 장식이 아니다.
왕을 향해 칼을 쥔다면 누구라도 나를 공격할 수 있게 된다.
굳이 선조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반역자에게 맞선다는 건 자기만의 세력을 만들기에 아주 좋은 명분이 아니냐.
삼일천하를 꿈꾸는 게 아니라면 무작정 선조의 목을 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명분싸움이란 말이지.’
괜히 옛 사람들이 명분 운운하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이 시대에 걸맞은 두 번째 방식으로 왕을 견제할 생각이었다.
“일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의 혼란이라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수많은 예로 입증된 바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나라가 망할 뻔한 것도 선조 덕 아니었던가.
피신하자고 할 때는 버티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도망쳐도 영내에는 있어야 한다니까 아예 강을 넘어서 명나라에 의탁하려 들기까지 했다.
현장 사람들이 피똥 싸가며 전황을 호전 시키니 의병과 의병장들을 박대하고 사실상 단신으로 해전을 전담하고 있는 이순신을 숙청하지를 않나.
안 망한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선조도 내심 놀랐을걸?
‘와, 이게 안 망하나?’
하고서 말이지.
이 세상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 다행이었고, 동시에 안타까웠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초능력만 있었어도 선조의 목은 벌써 장대에 걸리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렇지 못해 명분 쌓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 조정과 백성의 안녕에 위협을 가하는 외부의 요인이 무엇이건, 가장 큰 문제는 외부 요인에 응하여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서로 치고받는 데 여념이 없는 동, 서인이 대표적이다.
이발을 잃은 동인 강경파는 비분강개하여 어떻게든 복수를 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마당에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 강경파들은 무리해서라도 다 죽여야 했다며 똑같이 날을 갈고 있었고 말이다.
“나라를 위해 힘쓰고자 관직을 얻은 자들이 사소한 이익과 조장된 감정으로 서로를 해치고자 드니 실로 통탄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조용히 있던 이이가 긍정하고 나섰다.
나의 제안이 선조 모가지를 따자는 것이 아니어서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었다.
나아가 조정의 안녕과 평화야말로 이이가 진정으로 추구하던 목표가 아니었던가.
그는 기꺼이 말을 이었다.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임을 자부한다면 마땅히 합심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진즉에 이러한 자리가 마련되었어야 했습니다.”
이이의 적극적인 동조에 홍섬은 쓰게 침음을 흘렸다. 복잡한 감정이 다분히 섞여 있었으나 그를 의식하는 자는 없었다.
이번에는 이산해가 나섰다.
“소관 역시 한때는 의견 차이로 다른 선비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지만, 피를 볼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 노수신.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는 자리를 마련하셨으니 우리들은 따르기만 하면 되겠지. 보아하니 대부분은 이미 마음이 정해진 듯하군.”
죽은 형 이발을 대신해 자리한 동생 이길도 고개를 끄덕였다.
“헌납이 죽은 날, 그를 따랐던 무리들이 저를 찾아와 유혹하였습니다. 마땅히 복수를 위하여 목소리를 높여야지 않겠느냐고요.”
하지만 이길은 그들과 함께하는 대신 나와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길은 쓰게 말을 이었다.
“소관은 어느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고 싶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더니 자리한 자들 모두가 소관을 욕하더군요.”
이에 내가 마무리했다.
“아직까지도 당색과 원한을 들먹이며 적을 만들고 싸우는 무리들은, 외부 요인에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색도, 원한 관계 청산도, 왕의 부추김에 응하는 것도 아니다.
권력과 이익일 뿐이지.
나머지는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람의 우려와는 달리 제공(諸公)들께서는 현 상황의 참혹함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이지 분열이 아닙니다.”
끄덕끄덕.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압력이 가해지더라도 서로를 수호할 것입니다. 종묘사직의 안녕은 물론 조선의 미래와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서요.”
나는 을룡에게 문방사우를 부탁했다.
곧 백지와 필기구가 준비되자 나는 일필휘지로 서약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맨 아래에 서명하고서 서안을 밀어내니 순서대로 나와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기록이 남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홍섬이 그러했다.
훈구파 잔당이나 출신만큼은 진골 훈구파인 그는, 사림 세상에서도 의정부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몸을 사릴 줄 아는 자였다.
이따금 헛기침하며 부담감을 드러내는 이유가 달리 있지는 않겠지.
‘손을 봐줘야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명서를 챙겼다.
“제공(諸公)들께서 협조를 약속해주시니 벌써부터 조정의 혼란이 다스려진 듯합니다. 모쪼록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서로를 지키며 종묘사직과 백성의 안녕을 위하도록 합시다.”
본론이 끝나고 각자의 앞에 주안상이 마련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술과 안주에 무거운 분위기는 봄눈 녹듯 사라졌다.
정신없이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새 날이 졌고, 이쯤에야 취기가 풀린 사람들은 그새 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손님들에게 머슴을 붙여 가는 길을 지키도록 했다.
* * *
자리가 파하고서 고작 반 식경 지났을 뿐인데.
-쿵, 쿵.
대문이 가볍게 울었다.
을룡이 나아가 대문을 여니 익숙한 사람이 등장했다.
홍섬.
그는 자발적으로 저택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는 듯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연, 길 안내 겸 호위로 붙여둔 머슴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마치 임무를 완수했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홍섬이 입을 열었다.
“금천부원군은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군.”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웃으며 대청 안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이번에는 오직 홍섬 그만을 위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