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87화
63. 청산 (5)
이발은 절망한 채 눈물만 흘렸다.
왕이 자신에게 죄를 씌우고자 작정하여 무고한 동생까지 고문할 줄은 몰랐나 보다. 덕분에 냉혹한 현실을 통감했겠군.
그 교훈이 실전에 쓰일 기회는 없겠지.
곧 이발의 동생 이길이 끌려 나왔다.
“저, 전하!”
이길은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며 반항하였으나 나졸의 억센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은 의자에 강제로 앉혀 팔이 묶였으며 바로 옆에서 처참한 광경을 한 형을 발견하고는 절규했다.
“전하! 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사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선조는 여전히 냉담했다.
“허, 허어? 적어도 형이라는 놈은 반성하는 척이나마 했거늘 동생이라 그런지 형만은 못하구나. 놈도 바른 소리가 나오도록 일단 발바닥부터 지져라!”
이길은 끝까지 무고함을 주장했으나 의미는 없었다.
나졸들은 그새 새빨갛게 다시 달아오른 인두를 들고서 이길에게 나아갔다. 이길은 벌벌 떨었고 의자에서는 소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치이익!
살갗이 타는 소리와 냄새가 의금부의 뜰을 메웠다.
여러 사람들이 말없이 침만 삼키며 애써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은근히 시선을 돌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선조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는 자세를 고쳐야만 했다.
죄인에게 동정을 보내는 것조차 용서받을 수 없는 시대이니.
“저, 전하…….”
“별시에 급제하였다는 자가 어찌하여 감히 주범과 공모하여 어전에서 왕을 능멸할 계획을 꾸몄는가?!”
“아, 아니옵니다. 신은 아무 계획도 꾸미지 않았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악독한 놈들이 아니냐!”
선조는 악을 쓰듯 외치고는 나장에게 외쳤다.
“놈들의 다른 가족들은 하옥해 두었나!”
“예…….”
“모두 끌어내라! 돌아가며 압슬을 가한다면 적어도 하나는 입을 열겠지!”
“안됩니다! 전하! 전하!”
나졸들이 어렵사리 발길을 옮겼고 이길은 목청이 찢어져라 자비를 구했다.
선조는 그에게는 무관심했으나 대신 조용해진 이발을 의식했다.
“저놈은 왜 고개를 처박고서 조용한 것이냐? 그새 죽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어서 깨워라!”
나졸이 명을 받들어 물동이를 이발에게 퍼부었다. 이발은 정신을 조금 차린 듯 고개를 조금씩 움직였다.
그다지 멀쩡한 광경은 아니었다. 나졸은 이발을 흔들었으나 반응은 없었다.
“죄인은 악독한 놈이니 필경 혼절한 척을 하는 것이다! 놈이 정신이 들 수 있도록 인두질을 해라!”
동생 이길의 절규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발의 발바닥에 인두가 지져졌다.
여전히 소리와 냄새만은 멀쩡했으나 이발의 반응은 없었다.
혼절한 척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그의 면전에서 애먼 가족을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려던 선조는 일순 조용해졌다.
짱구라도 굴리는 것이겠지.
나는 그것을 방해하기로 했다.
“전하…….”
조용히 속삭이자 선조가 안광을 형형히 빛냈다.
“뭐냐!”
절제되었으나 거친 목소리였다.
“만일 이발이 이대로 죄를 토설하지 않고 죽는다면.”
“……말하다 말고 어쩌란 말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선조는 이해했을 거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동인들 전체가 규합하여 정쟁이 가속될 줄로 아옵니다.”
죽은 자처럼 좋은 구심점도 없는 법이다. 권력을 탐하지 않으며 말은 없으니까.
감정적으로 호도하기도 쉬웠고 명분으로도 제격이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순교자를 만드는 게 정치판 아닌가?
“……음!”
선조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본심은 다르겠지.
동인이 규합되어 서인과 가열 차게 싸우는 것이야말로 선조가 바라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마련된 국문이었고 없던 죄도 토설하게 만들어 조정을 피 칠갑하려던 게 아닌가?
선조는 일순 미소를 지었다가 금세 지엄한 투로 말했다.
“지돈녕부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송구하옵니다.”
“……크흠!”
선조는 헛기침하고는 막 뜰에 끌려 나온 이발의 가족을 훑었다.
비극적인 상봉에 정신을 잃은 이발을 제외한 가족들이 대성통곡을 해댔다. 이제는 사이좋게 고문을 당할 판국이었으니까.
선조는 한참이나 말없이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러더니 기세 좋게 말한다.
“아무리 죄인이 극악한 죄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고신을 받아 혼절할 지경이 되어서도 다른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으니 본심이 달리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면전에서 애먼 가족까지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려 할 때는 언제고 말을 돌리는 선조였다.
“죄인의 가족들은 들어라. 죄인이 이미 죄를 자백하였고 다른 혐의가 없으니, 그대들에게까지 죄를 묻지는 않겠다. 하지만 죄인이 스스로 인정한 죄를 처벌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
“판의금부사는 죄인에게 적합한 형벌을 내리고 나머지는 여죄만 확인하고 이상이 없다면 적기에 방면하라.”
선조의 명에 의금부 판사를 겸하고 있는 홍섬이 예를 표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선조가 팔걸이에 기대 일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내시들이 달라붙어 선조를 모셨다.
그리고 선조가 마침내 추국장을 벗어나자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개중에서 홍섬이 다가와 나에게 속삭였다.
“전하께 무슨 말을 상주드렸기에 갑자기 고신을 그만두신 건가?”
“합리적인 방식으로 전하께 간하였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음……. 덕분에 피는 안 보게 되었네. 많은 사람들이 금천부원군에게 감사할걸세.”
“조정의 안녕을 위한 일인데 당연히 나서야지 않겠습니까.”
“나는 동인 욕받이가 될 운명을 피하기는 그른 것 같군.”
이발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하니까.
동인들은 두고두고 홍섬을 저주할 거다. 반대로 나는 칭송하겠지.
하지만 선조는…….
쉬쉬할 게 분명했다.
“저들이라고 본질을 모르겠습니까?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조정의 안녕을 위해서 당해주는 수밖에요.”
“후우우우…….”
홍섬은 쓰게 한숨을 토했다.
“대감보다도 정 사간이 더 욕을 먹을 겁니다. 형 집행이 그에게 맡겨질 테니까요. 문제는 사간이 큰 그림을 볼 정도로 시야가 넓은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정쟁이 더 심각해지겠군.”
“맞습니다.”
“진정 전하께서는 조정을 분열시켜 무엇을 얻으려고 하시는 건지…….”
홍섬은 한탄하듯 말을 잇다가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는 크흠, 하고서 급히 헛기침했다.
나는 민망해하는 홍섬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미소 지었다.
“비단 대감만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닐 겁니다.”
요즘처럼 충신이 충신 노릇을 하기 어려운 세상도 없으니까. 그리고 갈수록 더욱 힘들어지겠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홍섬은 잡담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는지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발을 돌렸다.
“그만 떠들고 이만 해산들 하십시다!”
홍섬의 말에 좋아서 모여 있던 게 아닌 중신들은 기꺼이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나 역시 인파에 섞여 물러났으나 다시 의금부로 돌아왔다.
추국장을 해체하고 있던 나장과 나졸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꾸벅 예를 올렸다.
“대감께서는 어인 일로.”
“수감자들에게 한마디 해주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주범의 형이 집행될 때 소란을 안 피울 것 아닙니까.”
“예에.”
나의 용건 자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나장과 나졸들은 다시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나는 이발과 그의 가족들이 갇힌 서옥으로 향했다.
일이 다 끝나서인지, 혹은 남은 시간이라도 함께 하라는 것인지 이발과 그의 가족들은 한 곳에 갇혀 있었다.
늙은 어머니도 있었고 다른 형제도 있었다.
“대감…….”
지친 이발을 대신해 동생 이길이 나를 맞았다.
“헌납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많이 지쳤는지 반응이 없습니다. 숨은 쉬고 계십니다.”
“이 사람의 마음 같아서는 그대들 모두를 살리고 싶었지만 헌납까지 살리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나는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높으신 분께서 헌납의 죽음은 양보하실 생각이 없으셔서요.”
“어머니와 조카라도 몸을 건사할 수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형도 금천부원군 대감께 많이 감사할 겁니다.”
“고생이라면 충분히 많이 한 그대들에게 이 사람이 굳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대감의 말씀이라면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헌납은 현명한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정 사간도 마찬가지지요.”
이길은 부정하지 못하고 쓰게 웃었다.
덕분에 가족 전체가 고문을 받거나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으니까.
“당쟁은 갈수록 격화될 겁니다. 서로 원망하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커지겠지요.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대에게 온갖 고초를 가한 주범은 정쟁하는 자들이 아니라, 정쟁을 원하는 자이니까요.”
바로 선조.
“……명심하겠습니다.”
“헌납이 형을 앞두면 이것을 주세요.”
나는 품에서 작은 환 두 개를 건넸다.
“무엇입니까?”
“금천병원에서 수술을 마주한 환자를 마취하는데 쓰는 약입니다. 감각과 정신이 잠시 흐려지지요. 헌납이 알량한 동정이나 필요한 사람이 아님을 압니다만, 그렇다고 심신의 고통을 받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물론 나라고 역시 이발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존재는 아니다.
위사공신의 건을 묻고자 정철에게 이발의 죄를 고할 것을 부추겼으니까.
하지만 늙은 어머니와 새파란 자식을 가장이 보는 앞으로 끌어내어 고문하려 들다니? 보통 미친놈이어서는 이런 쓰레기 같은 발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선조는 자신이 어떤 놈인지를 이번 국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한 셈이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지.’
과인이 듣기로 탕왕은 걸왕을 몰아냈고 무왕은 주왕을 치고 천자가 되었다는데, 신하 된 자로서 제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입니까?
이에 맹자가 답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는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니, 잔적한 자는 왕이라도 필부에 불과합니다. 무왕께서 주라는 자를 주살하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선조는 잔적한 자다.
* * *
선조가 자멸로 한 걸음 나아간 것과는 별개로 조정의 열기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정철이 이발의 처형을 담당하게 되면서 결국 동인과 서인은 목숨과 피로서 씻어내야만 하는 원한 관계가 되었다.
정확히 선조가 바란 흐름이다.
아직까지는.
“공사가 다망하신 분들이 귀한 시간을 내어주시니 이 사람이 진실로 기쁩니다.”
나는 대청에서 여러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동인 영수인 이산해. 그리고 최근 유명을 달리한 형 이발을 대신해 자리한 동생 이길.
사림 원로이자 을사사회 희생자를 대표하는 노수신.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기 시작한 이이.
훈구파 잔당이자 위사공신과 정국공신을 함께 대표하는 홍섬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손님들과 함께 좌석하게 되어 내심 놀라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금방 친해지실 겁니다. 우리 모두, 한 가지 공통점만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으니까요.”
왕권을 강화하고 조정을 분열시키고자 무리수를 두는 선조가 질렸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