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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86화 (18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86화

63. 청산 (4)

“금천부원군 대감?”

정철이 당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감께서 의금부에는 어인 행차이신지.”

“금일 오전에 전하께서 이 사람을 직접 의금부 지사로 제수하셨습니다. 공무차 방문한 것이에요.”

“…….”

정철은 허리를 숙이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선조가 맡긴 일을 자신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다른 사람이 보내졌다는 뜻이었으니까.

왕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겠지.

예를 표한 정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인은…….”

“생각만큼 다루기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고신이라도 하신 겁니까?”

“설마요.”

달군 인두보다 내 혀끝이 더 위험한데 고신이 왜 필요하겠나.

“먼저, 조용한 곳에서 회포라도 짧게 풉시다. 일전에는 선객이 있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잖습니까.”

“예에.”

정철은 응하면서도 난색을 표했다.

사적인 여유를 가질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이발의 최후를 끌어내야 하는 그였다.

하지만 이발이야 이쪽 선에서 진즉 마무리를 지었다. 약간의 여유도 가지지 못하겠는가. 단지 먼저 밝히기에는 재미가 없을 뿐.

나는 다른 방식으로 정철을 유혹했다.

“곤란할 때 술만 한 것도 없지요.”

“대감의 말씀 대로십니다.”

정철은 밝아진 얼굴로 나를 뒤좇았다.

저택으로 들어서니 을룡이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주안상 둘을 부탁한 뒤 대청에 자리했다.

“죄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헌납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쉽지만은 않았으나 결국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더군요.”

“죄를 인정했다는 말입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요.”

“아……. 죄를 저지르고도 얼마나 뻔뻔한지 참으로 독한 놈입니다. 그러니 죄를 저질렀겠지만 말입니다.”

“이유 없이 억울하게 갇힌 게 아님을 인지한 정도만으로도 큰 진전이지요.”

“대단하십니다. 보통 악독한 놈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책임을 인정하게 만드셨습니까?”

“사간의 치밀한 취조에 이미 마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좋은 소식이 있으니 일단은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합시다.”

때마침 주안상이 마련됐다.

각자의 잔이 채워지자 정철은 거침없이 잔을 기울였다.

원샷이라니.

60도가 넘는 술을 잘도 마신다. 술만한 친구가 없고 안주로는 소금이 제일이라던 주당다운 능력이었다.

나아가 보채는 사람도 없건만 자작까지 때려가며 물 마시듯 잔을 기울인다.

내가 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초능력이 있었다면 지금쯤 ‘죽여줘……’ 하는 간의 애원이 들리지 않았을까?

순식간에 불콰하게 취하는 정철이었다.

“의금부에서 대감을 만났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발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기에, 직접 찾아오신 건가 싶어서 말입니다.”

“개인적인 자리 아닙니까. 술도 취했겠다 편하게 대해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형조참판이 찾아왔을 때는 이 사람과의 우애를 자랑하시더니 본심은 아니셨나봅니다?”

“크흠흠! 설, 설마!”

술 기운의 힘을 빌려 말을 놓는 정철이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하셨다는 건 압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빌려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근래에 많이 늘었지요.”

“괘씸한 사람들일세! 버릇없는 헌납을 손봐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다니!”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가 아니겠습니까. 또 진전도 없이 너무 지지부진한 상황이기도 했고요.”

“조금만 더 힘을 보태 주었다면 이발이 죄를 자백하고도 남았을 걸세! 이런 마당에 김새는 소리나 하다니.”

정철은 신경질적으로 잔을 기울였다.

“내키지는 않으시겠으나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결단입니다.”

“결단이라면.”

“나랏일을 하면서 항상 최선의 결과만 내놓을 수는 없어요. 때로는 피해와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 오히려 최선일 때가 있는 법입니다.”

“물러서란 말인가?”

“맞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정철은 잔만 쥔 채 침묵을 지켰다. 달갑지 않다는 분위기를 한가득 내고서야 정철은 입을 열었다.

“내가 물러설 상황이 아님을 대감께서도 알잖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간께서는 진전도 없이 시간을 너무 많이 끄셨다고요.”

“죄인은 여전이 의금부에 갇혀 있네! 주도권은 여전히 내가 쥐고 있어! 당장이라도 고신 한 번만 하면 놈이 자기 죄를 토설할 거라고!”

정철이 다급히 외쳤다.

적에게 패한 장수가 항변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대청을 짚고 일어섰다. 시끄럽게 떠들던 정철이 단숨에 입을 닫았다. 나는 그의 바로 앞에 서서 말했다.

“진정으로 사간께서 지금 상황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렇네만!”

“냉철한 판단력이 결여된 패장은 자신의 병력을 보존한 채 퇴각하지도 못합니다. 여전히 기회가 있으리라 믿으며 자신의 목숨과 부대를 적의 손에서 무기력하게 학살당하게 만들지요.”

“…….”

“이 사람이 묻겠습니다. 사간께서는 정녕 확실하게 승기의 단초를 잡으신 겁니까? 아니면 지금 옥에 갇힌 헌납처럼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계신 겁니까.”

정철은 시선을 피했다.

“이 사람은 사간을 도울 생각이 가득한데 사간께서는 도움을 받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이시는군요.”

“아, 아닐세. 대감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헌납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겁니다. 하지만 그게 헌납의 형제와 패거리까지 죽여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인과 합의하신 겁니까?”

“고작 죄인 따위가 이 사람과 동등하게 합의를 맺을 위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철은 고개만 숙인 채 애꿎은 술잔만 돌렸다.

“이 사람이 실언을 했습니다.”

“만일 헌납이 고이 죽어주지 않는다면 사간은 대대적인 역공을 맞을 겁니다. 다음에 옥에 갇힐 사람은 동인이 아니라 그대가 될 수도 있어요!”

“…….”

“내가 전하의 특명을 받들어 기껏 지지부진한 상황을 수습하고자 나선 것이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내, 공은 전부 사간에게 넘길 것이니.”

공을 넘기겠다는 말이 솔깃했는지 정철이 반색하며 물었다.

“소관에게 어떻게 공을 넘기신다는 것인지?”

조심스러운 물음이었으나 입가가 미소로 뒤틀리는 정철이었다. 울다가 웃는 꼴이었으니 우스운 광경이었다.

“이 사람이 나서서 한 일은 고작 방점을 찍는 것이었지 실상 대부분의 노고는 사간께서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조만간 전하 앞에서 함께 자리할 일이 있을 터이니 알아서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기껏 응해놓으시고 나중에 말을 달리 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마세요, 사간. 조정은 실수에서 교훈이 아니라 죽음을 얻기 쉬운 곳입니다. 마치 지금의 죄인처럼요.”

“……예.”

나는 비어버린 정철의 잔을 채워주었다.

정철은 고개를 돌린 채 단숨에 잔을 기울였다.

* * *

며칠 뒤.

의금부 뜰에는 국문이 설치됐다.

죄인의 죄질이 왕이 직접 심문할 정도로 극악한 것은 아니었으나, 실력자들의 사심이 잔뜩 들어갔는데 원칙이야 얼마든지 휠 수 있는 법이다.

늦은 밤이었고 안쪽에는 어좌가 설치되었으며 재상급 관리들이 좌우에 날개처럼 시립했다.

중심에 자리한 선조의 안광은 화등잔의 빛을 받아 유난히 형형했다.

“죄인을 끌고 와라.”

선조의 지엄한 명령에 이발이 대령됐다.

한참이나 옥에 갇혀 있었던 이발에게서 서생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누렇게 뜬 옷에 봉두난발을 늘어뜨린 걸인만 있을 뿐.

이발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선조는 어좌에 몸을 기울였다.

“죄인이 악독하여 그동안 죄를 토설하지 않았다가 이제야 자백을 할 마음이 생겼다고 들었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아는가?”

“신은…….”

이발은 기운 없이 입을 열었다.

이미 자신을 죄인으로 단정하고서 심문을 시작하는 왕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여러 신하들이 자리한 앞에서 오만방자한 목소리로 전하께 책임을 따진 죄가 있사옵니다.”

“그뿐인가? 여전히 죄인은 자신이 간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건가.”

“……신이 저지른 죄악은 간관으로서가 아닌 불충한 신하로서 저지른 것이니 형식적인 원칙에 비호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죄인이 이제라도 자신의 죄를 인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설령 극형에 처하더라도 반성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극형을 생각하고 있다는 투였다.

선조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죄인이 이렇게까지 불충한 모습을 보인 데에는 필경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구의 영향을 받아 극악한 죄악을 짓게 되었는가?”

“신은 누군가의 영향이나 사주를 받아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옵니다.”

“흠,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나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군.”

“진심이옵나이다! 신이 비록 죄는 지었을지언정 하루라도 전하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는데, 어찌 계획이나 사주로 불충을 저지르겠사옵니까?”

“진심으로 나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면 어전에서처럼 참혹한 난동은 벌이지 않았겠지. 여전히 입만 산 것을 보아하니 죄인은 반성한 것이 아니라 나를 기만할 생각만 가득하구나.”

“전하!”

이발은 절규했으나 선조는 냉담했다.

“진정으로 고신을 가해야 죄를 토설할 생각인가 보구나. 여봐라! 죄인을 지져라!”

명이 떨어지자 나졸들은 화등잔에 묻어둔 인두를 꺼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인두의 끝은 빛이 날 정도였고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다. 아무리 죄인을 다루는 것이 업인 나졸들이라도 내심 철렁했으리라.

하지만 왕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나졸들은 뒤통수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이발에게로 나아갔다.

“전하! 신의 충심을 알아주시옵소서!”

“당장 지지지 않고 무엇하느냐!”

선조가 재촉한 순가.

-치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뜰에 퍼졌다.

이발은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야밤의 도성이 쩌렁쩌렁 울었다. 중신들은 참혹한 광경에 입술을 앙다문 채 시선을 내렸다.

인두의 빛이 바랠 즈음 고문이 끝났다.

이발은 고개를 숙인 채 연신 헉헉거리며 숨을 돌렸다.

“이래도 죄인은 죄를 자백할 생각이 없단 말이냐!”

“저언하…… 신은…… 아무런 꾸민 바가 없나이다…….”

“아직도 부족한가보구나!”

선조는 쾅, 하고 팔걸이를 내리쳤다.

그리고는 이쪽과 정철을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헌납의 죄를 고한 사람은 사간이었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신하는 지돈녕부사였기에 각각 의금부 당상의 벼슬을 제수했거늘, 어찌 저 악독한 죄인 하나를 무릎 꿇리지 못하였느냐!”

정철은 지레 겁을 먹고 넙죽 엎드려 죄를 빌었다.

“저, 전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정철과는 달랐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이 판단컨대 죄인은 진실로 배후가 있어서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옵나이다.”

“지돈녕부사는 무슨 근거로 단언을 하는가!”

“죄인이 이미 자신의 죄를 시인하여 목숨으로 죄과를 갚기를 원하는데, 굳이 문초에 저항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사옵니까? 감히 전하께 불충을 의도한 자가 없음을 설령 죽게 되더라도 알려드리기 위함이옵니다.”

선조는 순간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술을 말았다.

“불충을 의도한 자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이는 국가의 존속과 종묘사직의 안녕이 지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지돈녕부사는 죄인을 온건하게 대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죄인의 의도라면 단지 놀아났을 뿐이 아니겠느냐!”

이제는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선조였다.

뭐, 냉정하게 말하면 인지부조화는 아니지.

선조는 어떻게든 이 판을 키워 동인으로 피 웅덩이를 만들고 싶었을 거다. 그래야 서인과 동인의 골이 더욱 깊어질 테니까.

서로 물어뜯기 위해서 왕 앞에서는 최대한 잘 보일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이발만 죽어버린다면 모양새가 나질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애먼 사람을 더 조지려고 지랄을 하는 거다.

“되었다! 죄인의 동생, 이길(李洁)을 끌고 와라!”

이발이 참혹한 표정으로 외쳤다.

“저, 전하! 동생은 진실로 죄가 없나이다!”

“닥쳐라! 저 간악한 자의 입을 묶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

선조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어떻게든 죄를 토설하게 만들고자 근친을 고문의 대상으로 삼다니.

기축옥사의 재현이로군. 그때도 이발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이 압슬로 죽는 광경을 봐야 했다.

그런 꼴을 저지르고도 용케 나라는 결딴나지 않았지만 당대의 관리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나?

선조는 완전 미친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 단지 일이 이전에 있었던 네 번의 사화를 합친 것 이상으로 커져 쉬쉬했을 뿐.

당시 전라도 도사 조대중(趙大中)은 아끼던 관기와 헤어지게 되어 눈물을 흘렸으나, 선조는 역적의 죽음을 슬퍼한다고 몰아가 조대중을 죽여버렸다.

이 정도로 시국이 미쳐 돌아갔는데 누가 왕의 미친 짓거리를 면전에서 고하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다르다.

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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