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85화
63. 청산 (3)
나는 외직을 두루 거친 사람치고는 선조를 많이 겪어본 편에 속했다.
심지어는 함경도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있을 때도 선조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으니까. 지금 도성에 있는 것도 임기가 다하기 전에 놈이 불렀기 때문이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당한 것이 많은 덕으로 나는 선조의 행동 패턴을 파악했다. 그러니 지금 벌어지는 일도 나는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편전, 집무실.
“몇몇 신하들이 감히 그대의 이름을 빌어 목소리를 내고 있던데, 금천부원군.”
선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전에 몇몇 사람들이 조정의 일에 우려를 표하기에, 신이 감히 긍정한 적이 있사옵니다.”
“근신하지 못했군.”
“송구할 뿐이옵니다.”
“듣기로는 서인 당여들과 회합을 가졌다는데.”
“소관의 이름을 언급한 자들을 불러 양해를 구했사옵니다.”
“그들이 이해한 듯 보이던가?”
“오히려 이 사람이 저들의 대의에 협조하기를 청하였사옵니다.”
“흥.”
선조는 고작 이 정도였냐며 코웃음 쳤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했다. 나를 향한 시선에는 경계보다 고민이 섞였다.
“만일 놈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빼지 말고 협조하게.”
누군가 제삼당의 영수가 되어야 한다면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내가 영수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내가 제삼당을 이끄는데 딱히 놈의 허락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공인을 해주니 다행이었다.
그것이 전적으로 나를 통해 제삼당을 이용하기 위해서인지……, 나와 제삼당 사이의 수상한 기류를 이미 의식하고서 차라리 자신이 공인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받들겠사옵니다.”
“금천부원군이 조정의 안녕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생각해둔 일을 맡겨도 되겠지.”
“하명하시옵소서.”
“어전에서 감히 왕에게 죄를 물은 죄인 이발의 처결이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정철이 이발에게 쌓인 게 많아 보여 의금부 당상을 맡겼지만 놈은 나에게 실망만 안겨주는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발이 난동을 저지른 이유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인지도 모르옵나이다.”
선조가 눈을 찌푸렸다.
“내가 금천부원군의 생각을 궁금해한 적이 있었나?”
“…….”
“나는 정철이 해내지 못한 것을 금천부원군이 해내주기를 원한다. 의금부 지사를 맡길 터이니 나를 실망시키지 말라.”
“명을 받드옵나이다.”
“물러나라. 교지는 바로 내리겠다.”
“예.”
나는 예를 표하고는 편전에서 물러났다.
참으로 한결같은 놈이었고, 또 우스운 놈이었다.
선조가 나에게 가할 수 있는 압력이나 압박을 떠나, 내가 없었던 원 역사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정을 조종했던 선조였다.
사림의 분열부터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까지.
하지만 나의 방해로 제대로 되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사림은 분열되었고 이발은 투옥되었지만, 동시에 나는 동서인 못지않은 정치세력의 영수가 되었고 가족과 함께 죽었어야 할 이발은 여전히 목이 붙어있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선조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자 나를 찾아 도움을 청한다는 거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모르고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라도 아이러니하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금천부원군 대감이십니까?”
의금부 앞에 이르자 문을 지키고 있던 나졸이 물었다.
“방금 전하께 의금부 지사에 제배(除拜, 왕이 직접 벼슬을 내림)되었습니다. 바로 공무를 보고자 하니 문을 열어주시지요.”
“물론입니다, 대감! 안으로 듭시지요!”
나졸은 황송하다는 듯 의금부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혹시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마침 도움을 구하려던 참이었는데 물어봐주셔서 감사하군요.”
“아닙니다, 하하. 오히려 제가 대감을 뫼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나졸은 예를 표하며 밝게 웃었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인지, 혹은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라도 덕분에 지금은 편하다만.
나졸은 의금부 시설을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관아를 한 바퀴 돌아 출입구 즈음에 이르자 안내를 마친 나졸이 말했다.
“그……. 소인이 너무 들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폐를 끼쳤다면 송구할 뿐입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적응이 쉬웠습니다. 덕분이에요.”
“아, 아닙니다. 소인이야말로 대감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덕분에 어머니께서 몇 년이나 앓으시던 흉통이 쾌차했습니다.”
“병원을 이용하셨군요.”
“예! 그동안 능하다는 의원들을 몇 번이나 불러 맥을 짚고 약을 지었음에도 낫지를 않았는데 병원을 다녀오시고서는 바로…….”
나졸은 말을 이어가다 문득 곤란해했다.
“소, 송구합니다. 바쁘셨을 터인데…….”
“아니에요. 이 사람이 세운 병원이 그대와 그대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문제가 생긴다면 기꺼이 병원에 의탁해 주세요. 다들 최선을 다할 겁니다.”
“망극할 뿐입니다, 대감 어르신.”
나졸은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특이한 사람이다 싶었는데 이런 내력이 있었군.
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마치 비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것처럼.
병원을 이용하는 사람이 눈앞의 나졸만 있지는 않을 거다. 수많은 사람이 알게 모르게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겠지.
바라던 일이다.
나는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서간(西間)으로 향했다. 이발이 수감된 곳이었다.
내부는 대낮임에도 볕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두웠다. 습기 묵은 나무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때렸다. 짚 삭은 냄새도 은은히 났다.
-저벅, 저벅, 저벅…….
다져진 흙바닥과 흩어진 지푸라기를 밟으며 나아가자 인기척을 느낀 수감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피로한 얼굴과 무기력한 시선들.
이발은 가장 깊숙한 곳에 갇혀 있었다. 그 역시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았지만 이전과 마주친 수감자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금천부원군 대감이시군.”
“흐음.”
여전히 힘이 깃든 목소리다. 고생으로 인한 피로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지만.
“이 사람이 어찌하여 왔는지, 헌납은 아시겠습니까?”
“뻔하지요.”
이발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하의 특명을 받아 의금부 당상을 겸하게 되었습니다만, 이 사람은 그대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어요.”
“사심은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만, 그래서 달라질 게 있답니까?”
“없지요.”
“소관이 설령 전하께 불충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그것은 간언을 위해서였지, 어떻게든 무고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주장처럼 분명한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많이 억울해하시는군요.”
“무고를 당하고도 억울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않냐는 듯 은근히 언성을 높여 묻는 이발이었다.
“이 사람은 헌납의 단순함이 마음에 듭니다.”
“단순함이라니요?!”
“도축당하는 돼지나 소도 억울한 기분이야 들지 않겠습니까. 헌납의 처지도 다르지는 않지요. 생각이 단지 억울하다는 것 이상에 미치지는 못하시니까요.”
“……!”
“냉혹한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지요. 헌납의 불충에 계획이나 분명한 의도가 없었다는 건 ‘모두’가 압니다. 단지 헌납만 아는 게 아니라요.”
“그렇다면 어찌 소관을 여기에 가두고 죄를 묻는단 말입니까?”
“같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헌납이 계획이나 분명한 의도도 없이 불충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단순하기 때문이지요.”
새삼스럽게도 이발은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자신이 왜 갇혔는지 하나도 몰랐던 걸까?
실로 치기 어린 사람의 특권이다. 이렇게까지 단순하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생각이 담백한 것도 말이다.
“전하께서는 자존심이 강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면전에서 잘못을 묻고 죄를 추궁하였으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왕의 역할은 쓴 말이라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간관이 있는 게 아닙니까!”
“맞아요. 문제는 세상일이 원칙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결정적으로 전하께서도 본질적으로는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결점을 가질 수도 있지요.”
물론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결점이라기에는 선을 많이 넘은 축에 속했지만.
“지금 대감께서 하시는 말씀이시야말로 진정으로 불충이 아닙니까!”
“아니에요. 만일 이 사람이 불충한 사람이고 헌납은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 사람은 의금부의 당상이 되고 그대는 옥에 갇혀 있습니까?”
“그건 대감과 같이 진정으로 전하께 충성하는 신하가 적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답답한 사람이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치 성난 강아지를 상대로 진심으로 화를 내는 사람은 없듯이.
이발은 단순한 사람이었고 사고의 수준이 나와는 다른 자였다.
“먼저 확실하게 해두지요. 이 사람은 헌납을 핍박하거나 조롱하기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 소관을 우롱하셨으면서도 믿으라고 하신 말씀이십니까?”
“어린 아이는 부모와 어른의 조언을 잔소리로만 듣는 법입니다.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서 냉정하게 생각하시지요.”
이발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은 헌납에게 가르침과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여전히 그대는 궁지에 몰려 있고, 이 사람은 무의미한 희생이 양산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것이 선조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라면 더더욱.
“소관을 살려주시겠다는 겁니까?”
“마음 같아서는요.”
“마음 같아서라니요?! 대감께서는 말장난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정 사간은 그대의 죄를 부풀려 의금부에 가두었지요. 전하께서는 정 사간을 의금부 당상으로 직접 제수하셨고요.”
“…….”
“수레가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한지도 제법 오래 되었습니다. 그것이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어딘가로 튀어 나가 박살이 나겠지.
“정철과 그를 후원하는 사람의 처지도 다르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정치의 원리란 그렇거든요. 끝을 보지 못하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소관이 죽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화마를 진압하는 방법 중 하나는 화재의 근원을 격리하는 것입니다. 멀쩡한 나무를 베고 집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은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이 사람을 의금부 당상에 직접 제수하신 전하께서는 다른 결말을 원하십니다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의미한 희생이 양산되는 것은 이 사람의 의향이 아니라고.”
이발은 입술을 깨물더니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다는 것만큼은 이해한 모양이군.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소관이 만일 죽게 되면, 대감께서 다른 사람들을 지켜줄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미 이 사람은 헌납을 위해 공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근래에 정 사간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변했을 텐데요.”
“…….”
“물론 헌납께서는 믿고 싶지 않으시겠지요. 차라리 이 사람이 기만을 하는 중이기를 바라실 겁니다. 자신의 죽음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누구에게라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이발이 절망감 섞인 불쾌함을 드러냈다.
“어찌하여 금천부원군께서 전하의 총애를 받는지 잘 알겠습니다.”
“총애? 하!”
가당찮은 소리였다.
내가 왕에게 자주 불려가는 것이 특혜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생각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당당한 태도라니.
이발 딴에는 지금 자신이 엄청난 음모에 갇혀 목숨과 의지를 시험이라도 당하는 줄 아나 본데.
알량한 권력만을 믿고서 왕과 중신들에게 대들었다가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 자들은 이전에도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역사에는 별다른 의미나 변화를 남기지 못했지.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권력 앞에서는.
하지만 이발이 착각 속에서 최후를 맞는 편이, 이성을 마취하여 자발적인 죽음을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