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84화
63. 청산 (2)
“대감…….”
중년인이 방문했다.
면식은 없는 자지만 그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형조참판 윤의중(尹毅中)이다.
특기할 점이 있다면 이발의 장인이라는 것이겠지.그런 그가 때마침 나를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안으로 듭시죠. 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 보이시니.”
“예.”
윤의중은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따라왔다.
그는 나의 저택에서 특별한 인상이라도 받은 듯 주변을 살펴보더니 대청에 정좌하자 입을 열었다.
“뭇 사람들이 금천부원군께서는 청빈하다는 말을 하였는데 과언이 아니었군요.”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누택의 규모 때문이라면 단지 이 정도가 이 사람에게는 편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청빈해서는 아니에요.”
집을 아무리 크게 지어도 정작 쓰는 곳이라곤 2, 3평 남짓한 사랑방이 전부인 시대가 아니냐.
어차피 윤의중도 고작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나 하고자 찾아온 것도 아닐 터다.
“본론부터 말씀하시지요. 이 사람도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 굳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십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윤의중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대감께서는 근래 벌어지는 일에 부담함을 느끼고 계신 줄로 압니다.”
“흠. 세간에서는 어떻게 말이 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명확하게 하지요. 이 사람은 부당함을 표하는 게 아니라 우려를 표하는 겁니다.”
단어가 주는 인상이 다르다.
내가 부당함을 느낀다면 마치 현 상황에 정면으로 반대의 입장을 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윤의중이야 그러기를 바랄 테고, 또 현실이 그렇지 않아도 마치 그런 것처럼 호도하고 싶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 사람에게 도움을 원하시는 겁니까?”
“예. 이실직고하자면, 그렇습니다.”
“표명에 대해서는 지금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금천부원군께서는 여러 공신들을 대표하시며 조정의 뭇 사람들이 존중하는 대신이십니다. 직접 한 마디 말씀만 하셔도 세간이 듣고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과분한 말씀이시로군요. 이 사람이 공신들과 회합을 가진 이유는 공론이 감히 왕대비를 핍박했기 때문이었고, 대신이라고는 하나 의미도 없는 지돈녕부사에 불과합니다만.”
윤의중은 당혹한 얼굴로 침만 삼켰다.
“대감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세간의 칭송과 주목을 많이 받고 계십니다.”
“바라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의의 말씀이 맞다면 이 사람은 더욱 처신을 조심스럽게 해야겠지요.”
“……대감, 부디.”
“참판께서 바라시는 바를 이 사람이라고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 직접 나서서 의견을 밝히게 되면 조정은 다시 혼란해지지 않겠습니까?”
흐름에 맡기자는 뜻이었다.
어차피 정철을 포함한 서인 강경파들은 궁지에 몰렸다. 사람을 달포나 넘게 붙잡아 두고서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잖나.
이대로 이발이 방면된다면 정철과 서인 강경파는 엄청난 역풍을 맞을 거다.
여차하면 똥물이 선조에게도 역류하겠지. 당초 이발을 처넣으라 한 놈이 바로 선조였으니까.
“대감의 말씀이 옳으나 정 사간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이만한 일을 벌이고도 이 헌납을 그냥 풀어주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쿵.
윤의중이 우려를 표하기 무섭게 대문이 울었다.
대화가 일순 멎었고 을룡이 나아가 손님의 정체를 확인했다.
손님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을룡은 대청을 올라서 나에게 속삭였다.
“정철입니다.”
“재미있게 됐군.”
이발을 살리고자 찾아온 윤의중.
그리고 이발을 죽여야만 하는 정철.
두 사람이 입이라도 맞춘 듯 찾아와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대단했다. 이래서 극단은 오히려 같은 면이 있다고 하나 보다.
“어찌할까요?”
“들라 해라.”
을룡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났다.
윤의중이 물었다.
“누구입니까?”
“알게 되실 겁니다.”
과연 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윤의중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정철을 발견하고는 정색했다. 정철 역시 먼저 찾아온 윤의중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참판께서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금천부원군 대감의 댁을 방문하셨습니까? 일면식도 없는 분이실 텐데요.”
의도가 뻔하다는 듯 빈정댐이 가득 묻어났다.
윤의중도 빈정대기는 매한가지였다.
“사간이야말로 금천부원군 대감의 댁을 말도 없이 방문하셨군.”
그랬다.
적어도 윤의중은 나에게 먼저 방문을 통기하고 허락을 받아냈지만 정철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놀랐거든.
“소관은 참판과는 달리 대감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꼭 연락하고서 방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앞으로는 그래야겠군요.”
“흥.”
“볼일 다 보셨으면 이만 돌아가시지요.”
“미안하지만 볼일은 끝나지 않았네. 사간이야말로 금천부원군 대감을 방해하지 말고 자리를 비워주는 게 어떻겠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정철은 엿이나 먹으라는 듯 태연하게 대청으로 올라와 한쪽에 겼다.
윤의중은 보는 눈만 없었다면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지만, 정철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증발이라도 하고 싶군.
볼만한 구경거리란 비단 캣파이트만이 아니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자존심 강한 아저씨들끼리 서로 머리 뜯어대는 것도 꽤나 볼만하거든.
나에게 초능력이 없음을 한탄할 뿐이다.
선수를 친 쪽은 윤의중이었다.
“대감, 염치 불고하고 간절하게 청합니다. 부디 헌납을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십시오.”
정철은 곁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과거 이발의 죄를 주장하라고 정철에게 부채질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인 중진과 당여들이 나의 이름을 빌려 이발의 문초를 방해하고 있으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싶었겠지.
입도 살살 간지러울 거다.
당시 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를 밝히고 싶어서.
하지만 증거도 없는 증언을 했다간 나와 척만 지고 역풍이나 맞을 뿐이다. 속을 시원하게는 만들어주겠지만 앞날의 인생은 깜깜하게 만들어주겠지.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누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느냐다.
정철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감히 대감의 성명을 앞세워 죄인에게 온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과연 대감께서 허락해 주신 일입니까?”
마치 배신이라도 했냐고 추궁하는 투였다.
“글쎄요. 확답을 내렸다간 어느 쪽에라도 미안한 상황에 처할 것 같군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정철이 재촉했다.
“이 사람이 제공(諸公)들 앞에서 근래 조정의 분위기가 과격해지고 있음을 우려한 적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빌려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때의 일을 빙자하여 주장에 힘을 실으려는 것 같군요.”
“대감께서 허락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로군요.”
“그런 셈이지요.”
“책임을 물어야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의 입이 가벼웠고 실제로 내뱉은 말인데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일까. 정철이 발끈했다.
“저들이 대감의 명성과 지위를 악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하세요, 사간.”
“진정이라니요? 대감께서는 소관이 오해하기 쉬운 상황에 처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그건 이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있잖습니까.”
“아니, 대감께서 오해라니요?”
정철이 자신에게 무슨 오해할 여지가 있냐는 투였다.
“사간이 어전으로 나아가 헌납의 죄를 주장할 때는 이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는, 당사자는 느끼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위화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정철은 입술을 말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사간에게 모종의 접촉이 있었다는 걸 압니다. 그걸 비단 이 사람만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조정에서 오래 일한 중신들이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십니까?”
“…….”
“서인이라는 이름을 자처하는 자들이 사간의 주장에 동조한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아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자신의 편에 있다는 것을.
“단지 감정적인 이유만이 아니라요.”
지금 재상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과거라는 치열한 검증 과정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검증된 자들 사이에서도 현실이라는 냉혹한 시험을 다시 거치고도 살아남은 자들이다.
최소한의 눈치도 없으리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사간께서는 이 사람에게 오해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신다면, 조금은 슬프군요. 한마디 말씀 정도는 해주셔도 무방했을 텐데 말이에요.”
정철의 핏기가 가신 입술이 안쪽으로 말렸다.
마치 치부가 드러난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사람처럼.
아, 마치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구나.
‘단순한 사람 같으니.’
자신의 연기가 어설프다는 것을 정작 본인은 몰랐나 보다.
“그동안 정치의 일이란 단순했습니다. 개입하는 자들만이 책임을 지지요. 하지만 연좌제가 너무나도 가볍게 적용된다면, 곧 피를 피로써 씻는 복수가 이어질 겁니다.”
선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단순히 조정의 분열과 내분만을 조장한 게 아니다.
기존의 정쟁이 이념과 이권으로 빚어진 싸움이 대부분이었다. 죽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극단적인 형벌은 대체로 책임자와 중진들에게 몰렸다.
선조가 야기한 기축옥사는 다르다.
놈은 특정 당파에 대한 대량 학살을 조장했고 정쟁을 맹목적인 감정싸움으로 전락시켰다.
“그렇게 된다면 조정은 나랏일이 아니라 정치 싸움에만 집중하게 되겠지요. 이만큼 나라를 퇴행시키기 좋은 방도도 없습니다.”
이에 윤의중이 찬동했다.
“금천부원군 대감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지금 동인과 서인이 맹목적인 원한을 품고 서로를 해치기만을 원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정철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죄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단 말입니까? 죄인은 어전에서 극도로 무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중신들을 욕보였고 그 대상에는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헌납이 경우 없는 행동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어찌 그것이 죽을 정도의 죄가 된단 말인가?!”
“유학의 나라에서 불충하고 불례한 것이 언제 적부터 고작 경우가 없는 정도로 가볍게 치부될 일이 됐단 말입니까!”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나는 손을 내비쳤다.
“진정하세요.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이 우려한 감정싸움입니다. 물론 두 분 모두 냉정하게만 판단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이 사람도 압니다.”
정철과 윤의중이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대신 시선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의 입장은 무엇이냐고. 누구의 편을 들어주겠냐고.
나는 어느 쪽도 편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 사람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죄가 있다면 결산함이 마땅히 옳은 일이고, 죄가 없다면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상대로 정철과 윤의중의 시선이 착잡하게 변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지 못했다는 건 압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참판께서는 모두를 살리고 싶으실 테고 사간은 모두를 죽이고 싶으실 테니.”
정철과 윤의중의 시선이 일순 서로를 향했다. 그러더니 각자 불편한 듯 헛기침과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을 이었다.
“물론 이 사람의 바람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 사건의 결말을 이 사람의 의향대로 만들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애초에 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왕의 눈에 너무 띄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제삼당 당여들이 이미 나의 이름을 앞세운 것만으로도 부담은 충분했다.
“이 사람은 헌납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할 생각입니다.”
정철과 윤의중이 함께 입을 열었다.
“아니, 어떻게 죄인의…….”
“헌납의…….”
그리고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의사를 존중한단 말입니까?”
의금부에 갇힌 이발의 의사를 도대체 어떻게 존중한다는 것이며, 설령 면대할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이발이 자신과 일파 모두가 살아남는 것 외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투로 말하니 두 사람은 의아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