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83화
63. 청산 (1)
냉정하게 말해 권철이 죽은 지금 제삼당의 상황은 이상적이지 못했다.
나아가 권철 다음이었던 박영준도 천수를 달리했으며 노수신과 함께 을사사화 희생자를 대표했던 유희춘도 오래전 고향에서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나마 노수신은 아직 정정해서 우의정을 지내며 기둥으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지만.
그를 도와야 할 원로들은 건강이나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존재감이 낮았다.
연배에 비해 관품이 낮은 허엽, 감사가 되어 도성을 떠난 이준민이 그러했다.
중진보다는 당여에 가까운 구성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공인 미친놈이었으나 이제는 철든 이이. 스승 김성일. 첫 인상은 별로였던 류성룡. 자해 쇼로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준 정인홍. 일은 잘하는 이원익과 유영경.
성격이나 존재감 등의 이유도 있지만 이들을 규합했던 내가 외직을 전전하면서 다들 소극적으로만 활동했고 그래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거의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다들 공사가 다망한 와중에 이 사람의 저택을 찾아주어 기쁩니다.”
외직을 지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모였다.
“부족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과 인연을 가져주신 제공들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니 정말로 기쁩니다. 이런 자리를 가져본 지가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안 나는군요.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여들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 사람은 논란을 만들지 않고자 그동안 양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지양하였습니다만, 조정에 다시 한 번 풍파가 부는 지금 영의정 안동부원군 대감께서도 세상을 등지셨고 제공들께서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큰 당혹을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 사람이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이미 어전에서도 이 사람이 언급되고 있으니까요.”
위상공신을 삭제하자는 논란이 일었을 때는 4대 공신과 회합을 가진 금천부원군이다.
당시 못지 않게 조정이 시끄러운 지금 금천부원군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까?
여러 중신들이 궁금해했고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의 입에 금천부원군이 오르내렸다.
‘회의적인 의견도 많지만…….’
금천부원군은 병원의 일로 이미 충분히 이목을 사고 있다는 게 회의적인 자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꼭 특별한 스탠스를 가지고 강경하게 나서야만 조정에 영항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과연 전하께서 이 사람을 불러 물어보시더군요.”
병원의 일 때문에 불렀을 당시에.
“조정에서 이 사람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중인데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전하께 답했습니다.”
당여들은 침묵하고 귀를 기울였다.
“조정의 혼란을 가중하는 것은 소관의 천성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전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잘 생각했다고 말입니다.”
이발과 그의 패거리를 박살내는 일은 전적으로 선조만의 유흥이어야 하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말의 아귀가 조금 맞지 않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설령 전하께서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의 본의가 무엇이건, 이 사람은 이 사람이 한 말을 지킬 생각입니다.”
“…….”
“금일부로 제공들께서는 순차적으로 서인의 공론에 탈피하실 것입니다. 이발과 그의 일파가 저지른 죄가 많다고는 하나, 꼭 피를 보는 것만이 죄를 청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요.”
당여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쟁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분열을 종식하겠다는 대의로 모인 사람들이다. 몇몇 사람들은 현실적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대의를 쫓고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이이.
“안동부원군께서 졸하셔서 혼란스러운 때에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적기에 제공들을 규합하고 조정의 안녕을 추구하시니 지극히 망극할 따름입니다.”
사적인 자리에서와는 달리 조직의 수장을 대하듯 격식을 차리는 이이였다.
그도 나의 권위가 드높아야만 당여들이 순순히 따를 것임을 알기 때문이겠지.
비단 이이만 나에게 극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심의겸과 김효원의 일로 조정이 결딴나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겨우 잦아들었는데 이제는 진정으로 피를 보고자 하니 조정의 혼란이 오늘날 같은 때도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나라의 안녕을 생각한다면 어찌 금천부원군의 뜻에 협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엽은 제법 강경하게 의견을 표출했다. 당색 자체가 동인에 가까운 그였다.
‘두 사람은 이미 이렇게 하기로 논의가 되어 있었고.’
존재감 있는 중진이 드문 제삼당 내에서는 든든한 지원이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이보다 확실한 지원이 필요했다.
제삼당 내에서 나를 제외하고서 가장 지분이 높은 사람이 나서주는 편이 좋겠지.
나는 노수신을 바라보았다.
“사림에도 어른은 많지만 우의정과 같은 분은 없지요.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은…….”
노수신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당혹감을 표했다.
그동안 쟁쟁한 중진들에게 밀려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가 급부상하기도 했지만, 그는 을사사화 희생자로서 애초에 정치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피해자가 될 생각도 없겠지만 가해자가 되어 자신과 같은 희생자를 만들 생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야 했다.
“여기 계신 몇몇 분들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우의정 대감은 훈구파와 싸우다 무고하게 유배를 당해 노고가 크셨는데, 다시 조정에 관여시키는 일은 합당하지 않다고요.”
“…….”
“하지만 이 사람의 입장은 다릅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서도 과거의 우의정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 다수 생길 수 있는데 어찌 방관만 하시겠냐는 겁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노수신은 짧게 침음했다.
“음.”
그리고 입을 열었다.
“금천부원군의 말씀이 옳네. 이 사람은 오랜 유배 기간을 끝내고 조정으로 돌아왔을 때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 드러났을 때 나는 믿고 싶지 않았네.”
“착각이 아니십니다.”
“아니, 착각이었어. 달라진 것이라곤 사람뿐이지 하는 행동은 그대로였으니까.”
“후대가 실망만 시켜드려 송구할 뿐입니다.”
“금천부원군께서 송구할 필요는 없지. 적어도 그대는 조정의 평화를 추구하지 않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즐비한 이 때에 금천부원군 정도면 대단한 수준이지.”
“망극할 뿐입니다.”
“이 사람 스스로에게는 어떠한 대표성도 있다 생각하지 않네. 사림의 원로로나, 을사사화 희생자로서도 말이네. 하지만.”
노수신은 선언하듯 당여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나 한 사람만큼은 금천부원군을 지지하네. 다른 분들께서도 금천부원군께 힘이 되어주었으면 하네. 간곡하게 부탁하네.”
좌중에는 정적만 흘렀다.
노수신은 스스로는 어떠한 대표성도 띄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그게 말처럼 되는 건 아니다.
“감사드립니다. 조정이 분열되어 서로의 목숨마저 취하고자 하는 이 상황에서 지지를 표명해주셨으니 많은 사람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당 내에서 지지확립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나는 당여들을 향해 말했다.
“말씀드렸듯 조정의 혼란과 불필요한 죽음은 이 사람의 지향점과는 물론 당의 대의와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명하시지요.”
허엽이 재촉했다.
“당여들께서는 이제부터 지목된 순서대로 서인의 공론을 거부하시게 될 겁니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 처했다면 이 사람의 이름을 써도 무방합니다.”
“잠깐.”
정인홍이었다.
“거부라고 하심은, 공론에 반대하라는 뜻이십니까? 아니면 응하지 말라는 뜻이십니까.”
“후자입니다.”
“고작 공론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오늘날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보다 강경하게 의사를 표해야지 않겠습니까?”
정인홍이 은근히 목소리를 높여 따지자 허엽이 나섰다.
“이보게, 정 지평!”
“금천부원군께서 진실로 혼란과 내분을 종식시키고자 하시니 소관 나름의 방도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금천부원군께서 자네조차 할 수 있는 생각을 안 해보셨을 것 같나?”
“그러실 수도 있지요!”
나를 얕잡아보는 말이다. 당 중진들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정인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인홍이 쉽게 기죽을 사람인가. 세간의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스승이 물려준 칼을 기어코 허리에 차고 다니는 그였다.
또 첫 만남에서는 어땠던가.
내가 따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자 했고 의문이 해소되자 자신의 손을 베어 피를 흘리는 것으로 각오를 보여준 자였다.
“괜찮습니다.”
나는 손을 들며 말을 이었다.
“정 지평의 말씀도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소극적으로 나서는 겁니까?”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지요.”
“소관이라고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은 현실이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고자 모인 게 아니었습니까?”
주변인들의 시선은 여전했지만 그 역시 여전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정인홍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고서 할 말을 이어나갔다.
“현실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추구하고 있으니 대감께서는 이상을 추구하시지요. 그래야 모임도 대의도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정 지평을 얕보고자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대는 당상관 이상의 관직을 지낸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대감께서도 소관이 지평이라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알면서도 물어보냐는 투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비단 이 순간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이상을 추구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들 중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그건.”
정인홍은 선뜻 대답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이상론자는 수없이 많았다. 단지 이상을 실현한 자는 손에 꼽았을 뿐이지.
어중간한 관직이나 전전하다 잊히거나.
조정의 적으로 낙인 찍혀 비참하게 죽거나.
현실과 타협하거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은 있기 마련입니다. 설령 이상을 추구하는 일이라도 다르지 않아요.”
정인홍은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지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결국 입을 열지는 않았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고이 응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이 사람이 정 지평의 뜻대로 해주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상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이 사람이 할 터이니 제공들께서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해주세요. 바라는 것은 오직 그뿐입니다.”
제삼당은 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서인 내부에서 가장 큰 축을 형성하고 있던 제삼당이 태도를 달리하자, 이발을 고문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자며 격화된 공론이 순식간에 와해된 것이다.
앞으로 조정의 흐름이 어떻게 변할까.
정철은 달포 가까이 시간을 끌었으나 끝내 이발을 제압하지 못했다.
이대로 이발이 무죄 방면된다면 제대로 역풍이 불겠지. 나아가 자신이 실망 시킨 선조가 내릴 보복도 각오해야 할 거다.
반대로 동인들에게는 이 순간이 최후의 고비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안도의 순간에 들어오는 비수야말로 가장 날카로운 법이니까.
그리고 선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