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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82화 (18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82화

62. 양날의 검 (2)

며칠 뒤.

을룡의 보고를 받은 나는 인창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골목길을 걸어가니 병원이 나타났다. 소문이 이미 퍼진 상태라 상태가 좋지 않은 병자들이 담장에 기댄 채 개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는 약간의 거리를 벌린 채로 저택을 구경하는 자들도 있었다.

소위 인창방 아방궁이 병자들을 구호하기 위한 시설로 운영되리라는 말은 접했지만, 그게 공허한 언론 플레이인지 사실인지 어찌 알겠는가?

소위 높으신 분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서만이 아니라, 십수 채 건물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올린 대저택을 고작 병자들을 위해 쓴다는 말을, 들어서 알면서도 속으로는 믿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몰려들었건 간에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턱짓했다.

을룡은 저택 입구에 모여든 인파를 치우라는 뜻임을 알아듣고는 앞으로 나아가 우렁차게 외쳤다.

“금천부원군 대감 행차시오! 다들 길을 비키시오!”

을룡의 가갈(呵喝)에 인파를 구성한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길을 텄다.

저택의 벽에 기댄 채 기운 없이 있던 환자들도 하나둘 일어났다.

도성은 물론 충청도와 인근 지역까지 금천부원군이 병자들을 돕고자 인창방에 아방궁과 같은 저택을 세웠다는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그것만을 믿고서 아픈 몸을 이끌고, 혹은 수레에 태워진 채 상경길을 올라선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대, 대감…….”

병자들이 눈치를 보며 몰려들었다.

을룡이 나섰다.

“더 다가오지 마시오.”

“의, 의원은 언제 볼 수 있습니까? 그것만 알려주십시오.”

주변에서 예, 예, 하고 긍정하는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대감께서는 의원들이 진료와 치료를 이행할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고자 행차하신 거요. 그대들이 도움이 급하다는 것은 알지만 이렇게 대감을 방해한다면 개원은 늦어질 거요.”

을룡이 엄히 말하자 병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밝히고 싶은 듯 환자 하나가 토를 달았다.

을룡은 말로 대답하는 대신 성큼 나아가 주절대던 환자를 밀쳤다. 그가 벌러덩 넘어지자 주변 사람들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도움을 구걸하러 온 처지에 잔말이 많은 걸 보니 딱히 절실하지 않은 모양이군.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말고 꺼지는 편이 네놈 신상에 이로울 거다.”

을룡의 과격한 행보에 환자들은 불똥이 튈세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저택 문간에 서며 조용히 일렀다.

“너무 뭐라 하지 말게.”

“어르신, 사람의 심리는 간사합니다. 도움을 주면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요.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처했다는 것이 유세거리라도 되는 줄 아는 자들도 많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위중한 병을 얻은 게 그들 잘못은 아니잖나?”

“이곳도 숭신방 저택과 다를 바는 없습니다. 차이는 대상이 폐질자(廢疾者, 장애인)이냐, 독질자(篤疾者, 중환자)이냐 뿐입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으니, 기왕이면 감사해할 줄 아는 자들이 도움받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자네 말이 맞아.”

인파를 뒤로하고 저택으로 들어서자, 의원과 그들을 보조하는 제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따금 나의 존재를 의식한 자들이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으나, 그러면서도 발은 바삐 움직였다.

“개원 직전이라 그런지 정신이 없군.”

“이런 상황에 병자들이 쏟아진다면 혼란이 가중될 겁니다. 쓸 만한 장정들을 배치하셔서 질서를 확립하시지요.”

“그래야겠군.”

나는 바쁜 의원들 사이로 나아가 허준을 찾았다.

그는 저택의 깊은 곳에서 배정 받은 원장실에 있었다. 그래, 직함이 원장이다.

“구암.”

“아.”

허준은 끼고 있던 서안을 밀어내며 일어나 예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금천부원군 대감. 개원은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의료동에 필요한 물자를 나누는 중입니다.”

“밖에서 보았습니다. 정신이 없더군요.”

“송구합니다. 최대한 서두르고 있지만 끝이 보이질 않는군요.”

“내의원정을 지내셔서 잘 대처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금천병원은 인원은 물론 규모나 시설 면에서도 내의원을 아득히 능가합니다. 게다가 대감께서 전언하신 것도 있고요.”

나는 휘하 의원들을 특기와 적성에 따라 역할과 구역을 나누기로 했다.

환자의 현재 상태와 질병을 파악할 맥(脈)과, 침과 뜸을 시행하여 병세를 완화할 침구(鍼灸)과, 물리치료와 재활을 도울 수기(手技)과, 수술을 시행할 외(外)과, 경문과 독송 등의 방식으로 환자의 심리적 부담을 덜고 정신과 치료를 전담할 주금(呪噤)과, 약재의 목록과 품질을 관리하고 조제를 전담할 본초(本草)과 등.

미래의 상급종합병원이 진료과를 20개 이상 보유하는 것과 비교하면 많이 미진하지만…….

“기존의 주먹구구식 진료와 치료에 혁신을 가져올 겁니다.”

“몇몇 의원들은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면서도 많이 어색해하고 있습니다. 본래 잡과에서 치르는 과목들도 분야가 아니라 의서에 따라 갈라지지 않습니까?”

침술만 하더라도 최초의 침구 전문서라 알려진 ‘명당경’, 황보밀이 편찬한 ‘침구갑을경’과 황제내경의 일부인 ‘영추경’ 등 의서에 따라 과목이 나눠지는 판국이었다.

“질병의 치료법에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최선이지요.”

“음, 맞는 말씀이십니다.”

“구암께서 의원들을 잘 다독여주시리라 믿습니다.”

“예. 다들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개원하게 되면 알아서 체득할 터이니.”

“몇 시진이 필요하십니까? 부담 드리고 싶은 뜻은 없지만 밖에 많은 사람들이 개원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예. 올 때 보았습니다. 반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슬슬 마무리 단계일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금천병원의 솟을대문이 열렸다.

개원만을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은 반색하며 뜰로 들어섰다. 번잡했지만 소란은 없었다. 을룡이 데려온 일손들이 질서를 수립했다.

그들의 안내에 환자들은 차례를 기다리며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거쳐가는 곳은 맥과.

진단만을 위한 과라니 나로서는 어색했지만 이 시대에서는 불가피한 조처였다.

두통만 해도 호흡계, 순환계, 신경계 등 원인이 다양하다. 그런데 의학이 한참이나 미진한 이 시대에서 증상만으로 질환을 맞추기가 쉽겠는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만, 환자들이 각자 배부받은 종이를 보아하니…….

‘어느 세상이건 의사들은 거지같은 필체를 쓰는군.’

영어도 축약하고 휘날려서 쓰면 못 알아먹는데 하물며 한자를 휘날려 쓴다?

이게 언어인지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의 일부인지 분간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휘날려 쓰는 필체인 초서(草書)는 쓴 놈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이러다가 의료과실이 일어나면 참으로 볼만하리라.

‘이것도 얘기를 해야겠군.’

안 좋은 버릇이 이미 들어버린 의원들이 고이 말을 들을지는 의문이다만.

이사장이 까라면 직원은 까야지. 뭐 어쩌겠나? 돈 주는 사람이 갑인 것을.

한참을 구경하고 있으니 들끓었던 인파도 차차 수그러들었다. 슬슬 점심때여서 병원의 입구까지 닫으니 뜰은 금세 한산해졌다.

“사람이 모이면 어떻게든 사고가 발생하기 마련인테 첫날치고는 깔끔하게 잘 돌아갔군.”

나는 을룡에게 말했다.

“덕분이다.”

짧게 감사를 표하니 을룡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필요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구경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내가 계속 남아 있어봐야 얻을 것도 없고 의원들은 부담스럽기만 할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 쉬고 있으니 을룡이 장부를 바쳤다.

“이번 달 지출 내역을 정리해두었습니다.”

“고생이 많구나.”

장부를 받아들자 을룡이 덧붙였다.

“병원 건으로 지출이 상당했습니다.”

“예상한 일이 아니냐.”

“숭신방 저택도 초기에는 대량의 지출이 있었지만 지금은 수익을 발생시키며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병자들이 오갈 뿐인 인창방 병원은 그렇지 못하리라는 지적이었다.

“최소한의 진료비라도 받으시지요. 운영비를 전적으로 어르신께서 혼자 지시는 것은 부담이 큽니다.”

“알고 있다.”

“……무료 운영은 단순히 수익만 내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필요한 상황이 아님에도 공짜라는 생각에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출까지 증대되는 겁니다.”

“갈수록 똑똑해지는구나.”

“재고해주시지요.”

“지금은 아니다.”

“어째서입니까?”

을룡이 책망하듯 물었다.

장부상에는 병원을 짓고 사람을 영입하며, 약재와 기구를 확보하는 데만 막대한 지출이 기재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고분고분 따르는 을룡이 나서는 것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게 웃어주고는 답했다.

“너는 자신이 못났다거나 어려움에 처했다는 것을 유세 거리로 아는 사람이 많다고 했지.”

“예.”

“반대로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유세 부리지 못해 안달난 사람은 없는 줄 아느냐?”

“…….”

을룡은 이해하지 못한 듯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감도는 동안.

-쿵, 쿵.

때마침 대문이 울었다.

“대답이 될 것 같군. 열어주게.”

“알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찾아온 사람이 누구일지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리라.

을룡은 손님을 맞으며 짧게 대화를 나누고는 돌아왔다.

“……내시더군요.”

“전하께서 부르시려는 모양이로군.”

“예상하고 계셨군요.”

“달면 사키고 쓰면 뱉는 법이지.”

“그래서 병원의 재정 상태에서 쓴 맛이 났군요.”

“대답이 충분히 되었나?”

“예.”

나는 작게 웃어주고는 문간으로 나아갔다.

내시는 뻔한 이야기를 할 테고, 나는 입궐을 위해 관복으로 갈아입겠지. 광화문을 가로질러 경복궁에 들어서고는 안내를 받으며 편전에 들어설 거다.

선조는 늘상 해온대로 엿 같은 소리나 지껄일 테고, 나는 능숙하게 대처하겠지. 충분히 대비하고도 남은 일이라 일말의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놈이 원한다면 놀라거나 겁 먹은 척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 * *

나는 인창방 ‘금천병원’을 찾았다.

개원하고서 고작 며칠만 지났을 뿐인데 환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얼굴이 약간은 밝다는 것일까.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가까스로 내려온 동아줄을 발견한 기쁨과 희망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솟을대문으로 다가서니 환자들이 웅성거렸다.

“듣기로 금천부원군 대감은 젊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셨다는데…….”

“그렇다면 저 분께서 금천부원군 대감이신가?”

“아마도…….”

주변이 어수선해지자 을룡이 엄히 말했다.

“금천부원군 대감이 맞으시오. 그러니 뒤에서 수군거리며 결례를 끼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거요.”

그러자,

“그, 금천부원군 대감!”

놀란 반응이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병자들은 감격한 인상으로 허리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천부원군 대감.”

“덕분에 살았습니다, 어르신.”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감사드리겠습니다요.”

“어르신…….”

“대감…….”

감사가 담긴 감격이 이어졌다. 마냥 딱딱하게만 있던 을룡의 태도도 조금은 풀어졌다.

몇몇 환자들은 두 손을 비비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칭송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병자들에게 나아가 말했다.

“그대들이 고치기 어려운 병을 얻어 큰마음을 먹고 병원을 찾았으니, 이제는 안심하시오. 방도가 있는 한 비용은 내가 질 것이고, 노고는 의원들이 자처할 것이니. 그대들은 매 순간과 모든 일들에 감사해하는 것만으로도 족하오.”

선언과도 같은 말에 병자들의 칭송이 한층 두터워졌다.

정치적인 계산을 하고서 세운 병원은 아니었지만 얻을 것이 있다면 얻는 것이 좋겠지. 백성의 지지는 양날의 검이지만, 그렇다고 날이 손잡이에 달린 건 아니다.

내가 꾸미는 일의 마지막 장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고 강력한 무기가 될 터이니.

나는 기꺼이 손을 들어 사람들의 칭송과 환호를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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