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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81화 (18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81화

62. 양날의 검 (1)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면 나라의 안위나 다른 사람의 목숨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선조.

그런 선조를 상대로 말도 안 가리고서 제 할 말만 실컷 하다 일가족은 물론 패거리와 사이좋게 의금부에 갇힌 이발.

당적은 달랐어도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 이발과 함께 어전으로 나아갔다가 되려 트롤링만 당하고서 복수를 시도하는 정철.

누가 주범이랄 것도 없이 (따지자면 선조겠으나) 조정은 개판이 되어가고 있었고 졸지에 나 역시 양지에서 영수로 등판하게 되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말이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탄탄한 체격을 가진 장년인이 말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는 자신의 역작이라도 발표하듯 팔을 뒤편의 저택으로 뻗었다.

웅장한 크기의 솟을대문은 주위의 집들보다도 높았고, 좌우로 뻗은 벽은 콘크리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높게 세워져 있었다.

열린 대문 너머로는 넓은 뜰과 막 지어진 건물들이 깔끔하게 세련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들어가 봐야 알겠군요.”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자.”

나는 대목장의 안내를 받아 시설 곳곳을 확인했다.

진료와 치료를 위한 건물, 환자들을 수용할 복층 병동, 아픈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넓은 후원. 마지막으로 상주 인원이 지낼 수 있는 생활공간까지.

“완벽하군요.”

“마음에 드신 듯하니 다행입니다.”

실력과 열의 있는 사람에게 충분한 지원과 두둑한 보상을 약속한다면 최소한의 결과물은 나오기 마련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일찍 건축되었군요. 혹시 겉만 번지르르한 건 아니겠지요?”

나는 잔뜩 기름을 먹여놓아 미끈해진 대들보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설마요. 소인 역시 놀라긴 하였습니다만 건축 기간이 짧아진 것은 만능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대목장은 자랑하듯 말을 이었다.

“건물을 발주하신 분이 다른 사람도 아닌 금천부원군 아니십니까? 직접 만능분을 개발하신.”

대목장은 바로 옆의 벽을 툭툭 두드렸다. 희게 회칠한 벽이 둔탁하게 울었다.

“원래 이런 벽은 점토와 짚을 섞어 세우지만 만능분으로 빚은 벽돌로 대신했습니다. 기존 방식보다 튼튼할 뿐만 아니라 공기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지요.”

“머리를 잘 쓰셨군요.”

“과찬이십니다. 저희 목장들 사이에서는 만능분을 이용해 건물을 세워보는 건 어떻냐는 논의가 이미 있었으니까요. 단지 소인이 처음으로 기회를 얻었을 뿐이지요.”

“처음 시도하신 것 치고는 잘 해내셨습니다.”

하중이 집중되는 벽 아래쪽을 벽돌로 대체했다. 건물의 수명도 늘어날 뿐만 아니라, 회칠한 흰 부분과 황토로 세운 윗부분이 세련되게 어울렸다.

‘이 세련됨을 유지하려면 관리를 많이 해야겠지만.’

고생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소인에게 다시 맡겨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대목장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나는 조금 더 건물을 살폈다.

동행한 을룡이 아뢨다.

“미리 알려드리는 게 마땅했지만 어르신께 조금이라도 유흥이 될 수 있을까, 만능분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니야. 충분히 마음에 들었으니까.”

“다행입니다.”

“의원들은?”

“바로 부르실 수 있으십니다.”

“벌써?”

“예.”

본래 의원들은 선산을 가진 종가들보다도 거주지 이전에 보수적이다.

한 지역에 뿌리를 박고서 꾸준히 일하여 명성을 얻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까스로 얻어낸 생계 기반을 포기할 사람도 없거니와, 대단한 사정이 있어 거처를 옮기더라도 먼저 자리 잡은 의원들의 텃세를 질릴 만치 당해내야 했다.

충분히 경력과 실력을 쌓은 의원임에도 타지에 와서는 이미 자리 잡은 의원의 제자로 들어가거나, 재산을 털어가며 무료로 봉사하는 이유가 달리 있지는 않았다.

“설득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을 텐데.”

“의원 노릇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로군.”

엉덩이가 무거운 이유가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충분한 보상을 약속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가 확인한 비용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꿍쳐둔 재산이라도 쓴 건가?”

“의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성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명성이 없으면 하루에 진료 한 번 보기도 힘들지요.”

“그런데?”

“정계 실세 중 한 분이시고, 가장 활발히 대외활동을 하시는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전국팔도에서 가장 유능한 의원을 모집한다는데 이만큼 명성을 쌓기 쉬운 일은 없지요.”

“사람을 잘 다루는군.”

“고작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정도입니다.”

을룡은 겸양했지만 이번 일을 포함해 경성에서 수족들을 포섭한 일까지, 그의 능력은 절대 겸양으로 감출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경성에서 확보한 수족 대다수가 도성과 경기도로 이사했다.

내가 경성부사를 겸하고 있었으니 거주지 이전을 확인하고 인가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세종대왕 치세 이래로 대대로 살아온 집안이 하루아침에 타지로 거처를 옮긴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확실히 보통 녀석이 아니야. 설령 나를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해도 말이지.’

배우려는 열의와 재능이 함께하지 않으면 발전할 기회를 아무리 접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이 점에서 을룡은 확실하게 열의도 있고 재능도 있었다. 기회도 쟁취했고 성과도 냈다.

“네가 의심없이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수족이라 다행이구나.”

“……어르신.”

녀석은 순간 격양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보인 모습이 민망해진 것일까. 을룡은 짧게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저 역시 어르신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하하.”

나는 을룡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병원으로 쓸 건물은 완성됐다. 의원들도 모집됐다. 남은 일은 이제 하나뿐이다.

허준!

오직 그만이 내가 세운 병원을 완성할 수 있었다.

* * *

“여기입니까?”

허준이 물었다.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이 정도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나는 기꺼이 답했다.

“물론입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일하시게 될 겁니다.”

허준은 별천지에라도 왔다는 듯 주변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이만한 규모의 건물을 올리시려면 족히 십수 채의 민가는 무너뜨렸겠군요.”

“덕분에 공사 초반에는 아방궁이라도 짓냐는 말까지 나돌았지요.”

아방궁!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세웠으나 직후 진나라가 무너지면서 항우가 불태웠다는 전설의 궁궐이었다.

허준이 답했다.

“들어는 보았습니다. 우연히요.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인창방에 궁궐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규모의 저택을 지으신다고 말입니다.”

“이 사람이 미리 진심을 전하지 못했더라면 오해를 샀겠군요.”

대사헌 이양원을 굴복시키고 사헌부가 시작한 공신 삭제 논란을 불충과 죄로 규정지었기 때문일까.

사헌부의 새파란 지랄쟁이들이 각종 특권을 믿고서 나를 탄핵하던 때도 있었다.

금천부원군이 권세와 부를 믿고서 궁전이나 다름없는 저택을 올린다고 말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준이 말을 이었다.

“고작 풍문 따위에 희롱당하여 금천부원군 대감을 오해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첨정은 현명하신 분이니 풍문 따위에 경도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또 그래야 했을 거고.

언관들에게는 풍문거핵(風聞擧劾, 소문만으로 탄핵할 수 있음)과 불문언근(不問言根, 주장의 근거를 대지 않아도 무방함)의 특권이 주어진다.

얼핏 무적의 특권처럼 보이지만 말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정계 실세의 인망과 평판을 파괴하고자 짜게 지랄한 대가는 컸다.

특히 죄질이 심한 몇몇은 승진을 빙자한 보직 변경을 통해 언관의 특권을 빼앗은 뒤 꼬투리를 잡아 의금부에 처넣었다.

약간의 물리적 교화를 통해 입에서 바른말을 나오게 만드니 떨거지들은 알아서 사직하거나 지방직에 자원하며 흩어졌다.

‘언제까지고 내가 대하기 만만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지.’

대하기 쉬운 권력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해야만 권력에 진정성이 생기는 법이다.

“누구도 자원하지 않는 일을, 막대한 부를 들여서는 물론 최근의 일처럼 정치적 압박까지 고려해가며 나섰거늘 세간의 반응은 한동안 싸늘했지요.”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누군가의 잘못을 굳이 밝혀야만 했다면 금천부원군의 죄를 날조할 것이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고자 동지들을 배신하고 서로 싸우는 작금의 정치인들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첨정께서 이 사람의 편에 서주셔서 든든합니다.”

“대감께서는 제가 의서를 편찬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주시고 실전을 통해 기존 의서를 검증할 수 있는 환경까지 마련해 주셨으니까요. 저에게는 은인이십니다.”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첨정께서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계셨고, 그 꿈이 이 나라를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니까요. 이 사람과 같은 위정자가 나서서 도와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입니다.”

나는 씨익 웃어주었다.

서로 금칠하는 것과 다름없는 민망한 대화가 이어졌고 나와 허준은 뜰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저택의 시설을 전부 확인하셨는데, 어떠십니까? 환자들을 수용하고 의원들의 활동을 보조하는데 차질은 없겠지요?”

“차질이 없다 뿐이겠습니까. 저 역시 환자를 자처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앞으로 함께 일하실 의원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나는 허준과 함께 저택 안쪽의 생활구역으로 향했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먼저 자리 잡은 의원들이 각자의 지식을 뽐내며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끼고는 일어나 이쪽을 향해 예를 표했다.

“행차하셨습니까.”

“다들 면식이 없는 사이라 조금이라도 서먹한 분위기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보니 처음 말을 나누는 것만 어려웠지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함께 일할 사람들끼리 쉽게 친해져 다행입니다. 이쪽을 소개해드리지요. 통정대부 내의원정까지 지내셨던 허 구암(龜巖, 허준의 호)이라 합니다.”

“통정대부라면…….”

삼삼오오 모인 노의원들이 일순 술렁였다.

내의원정 어의가 되어도 의원이 일반적으로 다다를 수 있는 자리는 정삼품이되 당상관은 아닌 통훈대부까지.

당상관인 통정대부와 통훈대부 사이에는 의원이나 다른 잡직들은 넘을 수 없는 마의 벽이 있었다.

그것을 넘어섰다는 것은 허준이 다른 의원들은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실력이나 명성이 부족한 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단지 의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자 마련된 만큼, 질서와 체계는 반드시 잡혀야 합니다. 구암이 이 사람을 대신해 시설의 대표를 맡을 겁니다. 부디 존중하고, 협력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의 소개가 마치자 허준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전직 당상관이 과분한 예를 보이니 의원들도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여 극진한 예를 보였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나는 말을 이었다.

“필요한 약재와 설비는 이 사람이 모두 부담할 터이니, 제공들께서는 명단을 작성하여 필요한 물목의 목록을 제출해 주세요.”

“예.”

“설비가 확보되는 대로 바로 백성들에게 개방될 예정입니다. 다들 오래 의원으로 일해오신 분들이니 차질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나는 가볍게 묵례했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졌다.

내가 이곳을 다시 찾아올 때는 병자와 백성들에게 공개될 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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