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80화
61. 무장중립동맹 (2)
이이가 찾아간 곳은 허엽의 저택이었다.
허엽이 반겨주자 이이가 인사했다.
“참의 영감. 연락도 없이 대뜸 찾아와서 송구합니다.”
“아니오. 오래간만에 대사간을 볼 수 있어서 좋기만 하외다.”
“하하.”
“그런데 금천부원군께서는 어찌?”
허엽이 나를 의식하며 묻자 이이가 답했다.
“영감께서도 작금의 사태에 우려가 많으시지요. 때마침 금천부원군 대감과 논할 일이 있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 언젠가 금천부원군께서 대책이 이미 있다, 말씀하셨는데. 그 때문인가 보군요.”
“대책이요?”
들어본 적이 없는 이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허엽이 답했다.
“일전에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누택을 찾으셨을 때 이 사람도 오늘날 조정의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했소이다. 그때 금천부원군께서는 이미 복안이 있다 하셨소.”
“그렇습니까. 이거야, 원.”
이이는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괜히 상경했군요.”
“다들 안으로 듭시지요. 그리고 금천부원군 대감…….”
허엽은 뜰을 가로질러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허 참의가 사직을 했는데, 대감 때문입니까?”
“하고 싶은 일이 있다기에 지원을 약조하였는데 그새 사직을 했군요.”
“의원임에도 통정대부까지 올라 자부심이 남달랐는데 설마 사직할 줄이야.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한답니까?”
“의학을 발전시키고 싶다는군요. 이 나라의 백성들 모두를 위해서요.”
“분명 숭고한 목표이지만…….”
허엽은 공감하지는 못하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겠지요. 참의에게는 참의만의 길이 있는 것이고, 우리들에게는 우리만의 길이 있습니다.”
나는 이이가 먼저 향한 대청을 향해 팔을 뻗었다.
허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돌렸다.
상석은 자연스럽게 나의 차지가 되었다. 허엽과 이이는 양편에 앉았다. 허엽이 주안상을 주문하기 무섭게 이이가 본론을 꺼냈다.
“금천부원군께서 계획이 있으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이전과는 달리 격식을 차리는 이이였다.
웃어른인 허엽이 나에게 공손하기 때문인가. 덕분에 자리가 어색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이이를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조정이 양당으로 분열되어 반목을 일삼는 것은 고작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지요. 그동안은 위사공신 삭제를 위해 목소리를 합쳤을 뿐, 목표하던 바가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반목하게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음.”
이이가 짧게 침음을 흘리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저들에게 다시 힘을 합칠 계기를 주어야지 않겠습니까? 공신 삭제 논의가 비록 좌절되었다고는 하나…….”
말을 이어가던 이이였으나 허엽이 눈치를 주자 입을 닫았다.
지방에서 살다 이제야 상경한 이이와는 달리 허엽은 도성을 지키고 있었고 내가 귀환한 직후 보인 행보를 잘 알고 있었다.
공신 삭제 논의를 되살리자고?
내가 아무리 할 짓이 없어도 그동안의 고생을 무위로 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나마 허엽이 눈치를 줘서 다행이지.
“위사공신의 처우에 대해서는 이미 공의전과 전하께서 못을 박으셨으니 다시 논의를 일으키는 것은 충의에 부합하지 못합니다.”
“……이해했습니다.”
“이미 계획이 있다고 했지요.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 벌어지는 상황의 영향과 여파를 축소하는 데 확실한 해법이 될 겁니다.”
“무엇입니까?”
때마침 허엽이 주문한 주안상이 내어졌다.
이이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는지 서둘러 상을 안쪽으로 옮기고는 바로 물었다.
“알려주시지요.”
술잔을 기울이더라도 일단 계획이 무엇인지 들어는 보자는 투였다.
들어주기 어려운 일은 아니지.
“우리…… 그러니까 제삼당은 오랫동안 서인의 일원으로 위장해 활동해왔습니다. 그때 분명히 말을 해두었지요. 이는 단지 필요에 의해서일 뿐, 그들과 마음을 함께 하는 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설마.”
“생각하고 계시는 바가 맞습니다. 상황이 극렬한 국면에 치달아 이미 서인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지금. 이보다 대의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때는 없습니다.”
제삼당의 대의가 무엇인가.
사림의 분열을 억제하고 양당의 정쟁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거다.
이러한 명분과는 달리 여태 제삼당은 서인의 중요한 축으로 성장하면서 기반을 확보하고 세를 불리는데 집중했지만.
그것도 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노골적으로 서인에서 이탈하려는 인상은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 사간이 주도하는 흐름을 거부할 수는 있겠지요.”
보이콧(Boycott)인 셈이다.
“서인 내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제삼당 당여들이라면 현 상황에 동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겁니다.”
동서 양당에 대한 의리는 없지만.
당초 이러한 판을 만들었던 이유인 공신 삭제 이슈를 묻기 위해서라는 목적은 완수한 지 오래였다.
또 사태의 주도권이 선조에게로 넘어간 지금, 원 역사에서도 증명되었듯 그를 내버려 뒀다간 초유의 부수적 피해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나아가 선조는 다음 차례로 서인을 압박하면서 양당의 세력과 영향을 축소하며, 대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 들겠지.
단지 제삼당을 구성하게 된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선조의 견제와 인재풀의 타격을 축소하기 위해서라도 슬슬 나서줘야 했다.
“동인들은 물론 서인 내에서도 온건적인 입장을 가진 자들, 양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경직되어가는 조정의 분위기를 우려하는 자들까지 모두 힘이 되어줄 겁니다.”
“더 강하게 당쟁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겁니까?”
이이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사람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조정의 평화를 추구하고 싶지요. 하지만 이 사람과는 대치되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대사간께서도 아셔야 할 겁니다.”
개중에는 선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이도 모르지는 않겠지.
“으음…….”
“이런 상황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면 우리들 역시 당쟁의 주체가 되겠지요. 물론 그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이미 지금 조정은 충분히 어지러우니.”
“금천부원군 대감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당장은 당쟁을 억제하는 것이 급선무겠지요.”
이이가 씁쓸한 어조로 인정했다.
이에 허엽이 나섰다.
“역시 금천부원군이십니다. 서인 내에서도 큰 지분을 가진 저희들이 움직인다면 강경파들도 위축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다들 유의할 바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허엽이 물었다.
“이 사람이 지시를 내렸다고 해서 모두가 한 몸이 되어 갑자기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편이 오히려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말씀드렸듯 정쟁이 보다 격해지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습니다. 개중에서는……, 서인 내에서 강한 세력을 갖춘 우리들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자가 존재하지요.”
물론, 선조다.
“음.”
왕이 자신들의 편이 아님에, 나아가 어쩌면 이 순간에는 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허엽은 물론 이이까지 쓰게 침음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에서 왕의 만행은 순수하게 주위 중신들이 잘못 보좌하기 때문이라는 철부지 같은 착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선조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자였고 그는 지금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당쟁을 격화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동인 다음의 표적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 된다면, 우리는 대의명분만이 아니라 일신의 안녕은 물론 가족과 가문의 안정까지 잃게 될 겁니다.”
“…….”
“누구도 이 중에서 이발의 뒤를 쫓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설령 이 자리에는 없는 제삼당 일원들이라도요.”
이이는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그가 착잡함을 드러낼 동안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좋은 그림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적어도 우리들을 매력적인 다음 희생양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씀하시지요.”
허엽이 청했다.
“일단은 제삼당 당여들 중에서 한 사람만 나서서 의견을 개진합시다. 그를 중심으로 다른 당여들이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며 공론을 만드는 것이 그나마 이상적인 흐름일 겁니다.”
“그런 일이라면.”
허엽과 이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제삼당을 다시 규합하는 중심으로서는 나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외직을 전전하느라 직접 나설 일이 없었다 뿐, 제삼당을 규합했으며 당여들의 관계에 중심에 놓인 사람이 바로 나니까.
때마침 바지사장 역할을 했던 권철이 천수를 다한 지금, 내가 진정한 영수로 자리 잡기에는 이보다 좋은 시기도 없었다.
‘약간 우려스럽기도 하군.’
다 좋지만 정철의 공격적인 행보를 정면으로 보이콧하기에는 선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성으로 돌아온 직후 권철의 건강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내가 이제는 정면으로 나설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공신회합이라는 이벤트를 벌이긴 했지만.
‘이 시점에서 내가 영수로서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 시기적절하게 보일 수 있단 말이지.’
선조가 나를 지돈녕부사로 삼은 일은 놈이 가진 나에 대한 인식을 정면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 이상으로 의심과 견제를 사는 행동은 그다지 현명하지는 않다.
물론 연출에 따라서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영수가 되었다는 식으로 상황을 짤 수도 있고, 이를 통해 선조가 나를 견제하기보다는 어쩌다보니 영수가 된 자로서 조정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수단으로서의 이용가치를 더 높게 평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이전까지는 당색도 당적도 없었던 내가 몇 마디 했다고 서인 내부에서 핵심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제삼당 당여들이 우르르 붙는다는 건 충분히 작위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내가 영수로 등극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니.’
조정이 연이은 사건으로 시끄럽고 정계의 판세가 지극히 혼란스러운 지금처럼 내가 자연스럽게 영수에 등극하기 좋은 상황은 없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바지사장을 맡겨놓은 채 상황이 일단락되고, 조정이 제법 오랫동안 평화로운 분위기를 이어가다보면 바지사장이 진짜 영수가 되는 수가 있었다.
제삼당 당여들은 이미 권철의 지시를 받들어 이행해온 지 오래였고, 몇몇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권철을 영수로 모셨으며 또 다른 일부는 바지사장의 지도를 거부했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제삼당은 물론 나와 제삼당 사이의 관계에서 이로울 것이 없었다.
‘원래는 공신 삭제의 건으로 내가 등장해야 했는데.’
왕의 의사에 부합하면서 내가 영수로서 성장한다면 선조도 무턱대고 손을 대기 힘들었겠지만.
막상 공신 삭제의 일이 너무나도 쉽게 진압되고 바로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면서 내가 제때 나서지 못했다.
결국에는 이런 상황에 이르렀지.
아쉬웠지만 시간은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내가 영수로 등극할 수 있는 마지막 적기일지도 몰랐다.
“두 분께서 여전히 이 사람을 지지해 주니 고맙군요. 기꺼이…… 중임을 맡겠습니다.”
선언과 함께, 마치 전장 한복판에라도 선 듯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