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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79화 (17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79화

61. 무장중립동맹 (1)

“오셨나. 금천부원군.”

병석에 누워 있던 권철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동공에는 생명력이 흐릿하게나마 묻어났으나 이제는 흐릿함과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지난 회의 때는 정정하셨는데 그새 벼락이라도 맞으셨습니까. 다 죽어가시는군요.”

질 나쁜 첫 인사였으나 권철은 역정을 내기보다는 피식 웃어버리며 어울려 주었다.

“내 천수는 여기까지인 것 같네.”

“의원이라도 불러드릴까요. 용한 사람을 이번에 알았습니다만.”

“의원은 지겹게도 보았네. 이제 침이나 뜸 맞는 건 물릴 정도야.”

“그렇다면 배려해 드려야지요. 이 사람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금천부원군. 이제 다시 볼 일이 없다니 아쉬워서 불렀네. 바쁜 와중에 귀찮게 만든 건 아니겠지?”

권철은 자신이 곧 죽을 것처럼 말했다.

주변의 아들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확신하는 죽음을 당당히 부정하고 싶겠으나, 눈앞에 펼쳐진 권철의 모습이 현실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당장 죽지는 않더라도 유명이 많이 남지는 않았으리라. 어쩌면 말하던 도중에 명을 다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최후의 만남이란 나에게도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머지않을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많으니 나는 당당하기로 했다.

“설마요. 이 사람 역시, 안동부원군을 마지막으로나마 다시 뵐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잘 부르셨습니다.”

“다행이군.”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편하게 하시지요.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건 아니고?”

“정 못 들을 말이라면 곧 죽어가는 사람의 헛소리로 치부하고서 잊지요.”

“크크크…….”

권철은 빈정 따위는 상하지 않았다는 듯 거칠게 웃었다. 간간히 섞이는 가래 소리가 다시 한번 그의 건강 상태를 드러냈다.

“금천부원군에게는 새삼스러운 말이겠지만.”

“말씀하시지요.”

“안동 권씨를 잘 부탁하네. 그나마 막내가 대과에 급제했지만 이제야 사람 태를 내기 시작한 정도일세. 장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혹하게 부리면서 잘 가르치게. 놈이 금천부원군 반만이라도 하면 안동 권씨가 백 년의 영화를 누리는 것도 꿈만은 아니겠지.”

“귀한 남의 아들을 이 사람이나 안동부원군과 같은 족속으로 만들어서야 쓰겠습니까?”

“선택지가 많았다면 내가 한두 놈쯤은 곱게 길렀을지도 모르지.”

권철의 아들들은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기껏 곁에 불러두고서 가혹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내가 불렀나? 애비가 다 죽어가는 마당에야 효자인 척을 하겠답시고 찾아온 것을 힘이 없어 못 쫓아낸 것이지.”

“기왕 가시는 길이라면 자식들에게 잘 대해주시죠. 이 사람이 아직 저승은 안 가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족히 40년 정도는 볼일이 없을 겁니다.”

“흥.”

권철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식들을 원망하고 경멸한 권철이었다.

그는 미약한 안동 권씨를 일으키느라 고군분투해왔다. 결국에는 의정대신의 반열에 오르며 성과를 거두었으나,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에는 손에 꼽히는 명문가가 많았고 안동 권씨는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일개 가문임에도 조정 전체를 장악하고도 부족해 반으로 갈라져서 싸우기까지 하며 세력을 과시했던 파평 윤씨.

다섯 형제가 모두 공신이 되고 군호를 받으며 의정부 당상직까지 돌아가며 지내며 전설로 남은 광주 이씨.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랬다곤 하나 한때 왕을 능가하는 존재감을 자랑했던 권신이 이끌고, 왕비 네 명을 연이어 배출했던 삼한갑족 청주 한씨 등.

권철이 바라는 것은 안동 권씨를 이들을 능가하는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 아들 모두 손자를 볼 나이가 되어서까지 고작 대과 하나 급제하지 못했으니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이제는 다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장인은 소질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오래전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살아오며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막내의 소질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군.”

“등잔 밑이 어두운 법입니다. 이 사람의 진가 역시,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친부가 아니었지요.”

현직 영의정을 지내며 왕을 제외하고는 무서울 것이 없을 터임에도 새파란 신입 관리를 영입하고자 타협을 시도했던 자가 있었다.

“평소에는 쌀쌀맞더니 다 죽어가는 지경에야 금칠 한 번 받아보는군.”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금천부원군께서는 아비도 못 알아본 자식의 재능을 알아보셨다?”

“이 사람이 어디 한두 번 한 말입니까.”

권철은 따지지는 않았다. 내심 만족스러웠는지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맺혔다.

결정적으로, 많이 늦기는 했으나 결국 권율은 권철이 죽기 전 대과에 당당히 급제해 보였다. 내가 이전부터 꾸준히 주장해온 권율의 자질이 마냥 헛소리만이 아님이 조금이나마 입증된 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안동부원군의 핏줄입니다. 대감께서는 이 사람에게 안동 권씨의 미래를 부탁하셨지만, 조만간 이 사람이 나설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안동부원군의 핏줄이 안동 권씨를 반석에 올려놓으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한이 없겠는데.”

“편히 눈 감으실 수 있으시겠군요.”

내가 확언하듯 말하자 권철의 얼굴이 온화해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실망만 시켜온 자신의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예전과 같은 경멸은 없었다. 단지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자식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는 아버지의 시선만 있을 뿐.

아무리 장성하여 각자 손주를 볼 나이가 됐을지라도 아버지의 눈에 자식들이란 한없이 걱정의 대상이었다.

“아, 아버지.”

권철이 이불 밖으로 손을 뻗자, 삼남 권순이 받들었다.

“얼굴들이나 만져보자꾸나.”

“예, 예.”

권순이 허리를 숙여 권철의 손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권철의 손이 힘없이 권순을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막내 권율까지, 아들들의 얼굴을 한 번씩 쓸어내린 권철이 힘없이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낳았구나…….”

권철의 자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불렀다.

“이만 물러들 가거라. 금천부원군께서도. 이만 쉬고 싶다.”

* * *

정승집은 개가 죽으면 문정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온다던가?

직접 경험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영의정 안동부원군 강정공(康定公) 권철.

한때 그의 육신이 머물렀던 사랑방에는 제사상과 함께 글자가 깨알처럼 새겨진 신주가 자리했다.

사랑방 바로 맞은편 공터에는 상주인 장남과 권율을 포함한 형제들이 몸을 웅크린 채 절을 올리고 있었다.

권철은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으나 자식들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였다.

곡소리는 없었으나 형제들은 반 시진이 꼬박 넘도록 말 한마디는 물론 미동도 없었다.

은근히 걱정도 들었지만 나를 포함한 조문객 누구도 그들의 애도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음.’

주변에는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즐비했다.

미래와는 달리 조선에는 유복친(有服親)이라 하여 고인과의 관계에 따라 명확하게 정해진 상복을 입어야 했다.

이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상복을 입을 경우 졸지에 집안을 콩가루로 만드는 수가 있으므로 철저해야 한다.

다만 상복의 종류만 해도 다섯이나 되는 데다 고인과의 촌수는 물론 본가냐, 외가냐, 처가냐에 따라 갈리고 적자냐, 서자냐는 물론 장자나 장손에 해당하느냐 아니냐, 딸이라면 출가를 했느냐 안 했느냐 등등 눈 돌아가는 계산을 거쳐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손녀사위가 처조부를 위해 상복을 입을 필요는 없지만.’

대신 오복을 입는 범위인 유복친(有服親) 외의 친척도 상복 유사한 복장으로 애도를 표할 수는 있었다.

이를 심상(心喪)이라 하는데 꼴에 예법도 있어서 조복가마(弔服加麻)한 백포도포(白布道袍)에 백포건(白布巾), 백포대(白布帶)에 이거니 저거니 뭐니 해서 입을 게 많았다.

귀찮았지만 권철을 위해 입었다.

그는 나에게 단순히 처조부만이 아니었으니까.

“…….”

구석에서 상 하나를 차지하고서 조용히 술대접을 기울이고 있기를 한참.

나와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금천부원군. 여기 계셨구려.”

너무나도 당당하게 곁에 자리하기에 아는 사람인가 싶었더니, 진짜로 아는 사람이었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형님.”

친형제들과는 거의 보지 않고 사는 내가 형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율곡 이이.

그는 깊게 눌러 쓴 갓을 올리며 나에게 미소 지었다.

“왕이 불러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도성을 찾으셨습니까?”

이이는 내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낼 동안 부제학을 끝으로 사직하고서 해주(海州)로 내려갔다.

얼마 전에는 왕이 이이에게 대사간 관직을 내리며 다시 불렀지만 이이는 얼굴도장만 찍고는 다시 사직했다.

‘신이 쓸 만한가의 여부를 알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시사(時事)에 대해 하문하셔야 하옵니다. 그렇지 않으시겠다면 다시 부르지 말기를 바라십니다.’

라는, 제법 패기 좋은 발언과 함께 말이다.

선조가 즐비한 인재들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곤 나라 발전이나 개혁이 아닌, 진열장 채우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동인들의 대스승인 이황도 비슷한 꼴을 당하지 않았던가.

선조는 기껏 이황을 불러놓고는 판중추부사라는, 발언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자리에 세워두었다.

이황은 졸지에 진열장 장식품이 된 채로 유명을 달리했고 선조는 이때다 싶었는지 뭇 사림들의 주청을 선심 쓰는 척 받아들이며 시호를 내리고 의정부 영의정으로 증직했다.

이이는 그렇게 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안동부원군 대감께서 천수를 다하셨다니 마땅히 조의를 표해야지 않겠나?”

“말릴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뜰에 자리한 권씨네 형제들을 가리켰다. 이따금 저택에 들어서는 조문객들도 형제들 주위에서 예를 표했다.

이이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조의를 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짝 당혹한 기색을 비치더니, 작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조의는 표하겠지만, 보아하니 금천부원군께서는 벌써 이 사람의 마음을 읽은 것 같군.”

그랬다.

왕이 불러도 호기로운 발언과 함께 사직하고 물러난 이이다. 아무리 안동부원군이라는 거물이 죽었다지만 고작 조문이나 하고자 해주에서 도성까지 찾아왔겠는가.

그리고 기껏 찾아와서는 나부터 찾는다니, 다른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을 찾아온 걸 보니, 먼저 찾아간 사람이 협조적이지는 않았나 보군요.”

“그건……. 음. 안타깝게도 말이지.”

이이는 쓰게 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역시 금천부원군의 안목은 대단하군. 이 사람이 먼저 찾아간 자가 있을 줄은 어떻게 알았나?”

“형님 생각하는 방식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이이는 사림의 분열과 동서 양당의 정쟁을 무척이나 우려하는 자였다.

시키는 사람이 없음에도 이이는 동분서주하며 동인과 서인 사이를 봉합시키고자 바삐 움직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그가 낙향하게 된 원인은 입만 아프게 하며 들어주는 것이라곤 일절 없는 선조의 영향도 컸겠지만 바람과는 달리 갈수록 악화되는 정계 상황도 한몫 거들었을 거다.

때마침 동인의 영수 중 하나인 이발과 그의 추종자들이 대거 옥에 갇히지 않았나.

확정된 것은 없지만, 여러 사람을 조지다 보면 개중에 한 사람쯤은 없는 죄도 만들어서 토설하기 마련이다.

‘동인이 개박살나는 상황이 초읽기 상황이라는 뜻이지.’

누군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판이 커지지는 않았지만, 이발이 워낙 왕과 중신들에게 단단히 찍힌데다 칼자루를 쥔 서인과도 서로 배신자로 몰아가는 극악의 관계로 치달아서 분명 죽는 사람이 나올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이가 도성을 찾았다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뻔했다.

선을 넘기 직전인 현 조정의 상황을 어떻게든 봉합하기 위해서겠지.

그리고 처음에는 정철부터 찾아갔을 거다. 이번 사건의 향방을 주도할 사람은 바로 그였으니까.

하지만 마음대로 됐겠나?

안 됐으니 나를 찾아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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