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78화
60. 정수 추출 (3)
허준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대로는 당대 의학의 정수를 써 내리지 못하고 늙어 죽는 것은 아니냐, 하고서.
‘영입하고자 운을 띄웠을 때도 명확하게 거부하지 않았지.’
마치 자신이 상황만 받쳐준다면 협조해주기라도 할 듯.
이제는 돈 많은 사람 앞에서 돈 없어 아쉬운 티를 내고 있었다.
‘어쩌면…….’
허준은 내가 나서주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여태 보여온 애매한 태도를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다.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다면 선을 명확하게 그었겠지. 허준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나의 적극성을 은근히 유도하고 있을 뿐.
“첨정의 숙원에 대해서는 이 사람도 지극히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공감해주신다니, 감사하군요. 큰 힘이 됩니다.”
“하하하…….”
나는 가볍게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만일 첨정께서 숙원사업에 착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기꺼이 지원해드렸을 텐데요.”
“그렇습니까?”
허준이 은근히 달아오른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기대하던 말을 듣기라도 했다는 듯.
“의학의 발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높은 분에서부터 낮은 자들까지 빠짐없이 혜택을 받는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더욱 높습니다.”
“대감의 말씀에 지극히 공감합니다.”
“때마침 참의께서 열의를 가지고 계시다니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요.”
“흠흠.”
“하지만 첨정께서는 지금 바쁘시다니 아쉽군요.”
내가 쓰게 웃자 허준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상의원정의 경력까지 가진 어의. 관직을 관둘 수는 있어도 바로 다른 곳에서 일하기는 어려웠다.
왕의 건강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어의니까.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향에 놓인다는 것이 왕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는 없다.
‘문제는 누가 선조의 압력을 감당하느냐지.’
허준이 거처를 시원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
하지만 받아주는 이쪽은, 허준이 제 발로 온다고 해도 선조를 의식해야 했다. 이미 견제를 당하고 있는 나로서는 충분한 부담이었다.
적어도 허준이 상의원에서 나와 나에게 의탁하는 과정에서 내가 개입했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됐다.
“만일 대감께오서 소관이 의서를 쓰는 데 후원해 주시겠다 약조만 해주신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 사람은 별개의 일로 치고 싶군요.”
대가성이라도 마찬가지다.
허준이라고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는 편이 좋겠지.
“자랑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이 사람은 조정에서 제법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작 지돈녕부사를 지내고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람, 나아가 의심하고 음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트집 잡히고 싶지는 않아요. 이미 적지 않은 약자들을 구제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새로운 구호 시설을 세운다는 결정만으로도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는군요.”
“음.”
내가 해줄 수 있는 한계를 명확하게 긋자 허준도 짧게 침음만 흘릴 뿐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약간 냉각된 상태에서 각자 조용히 술잔만 기울이기를 두어 각 째.
한참이나 고민하던 허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는 이미 결단을 내리셨다니, 소관 역시 결단을 내려야만 하겠군요.”
“이 사람이 가진 대외적인 평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래에 들어 세간의 인식에 변화가 있었던 듯하지만……, 하하.”
여전히 평판은 좋은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대감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감히 의심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빙긋 웃어줄 뿐이었다.
“다만 소관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회의에만 참여하지 않는다 뿐, 엄연히 당상관의 반열에 있습니다.”
당상관의 위치는 단지 자질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설령 허준이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 하더라도, 다른 방면으로도 노력하지 않았다면 잡직 관리들에게는 이상향이나 다름 없는 당상관에 이르지는 못했을 거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려놓자니 아무리 숙원사업이 코앞에서 아른거려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만일 나의 영향으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면 돌아올 때 변명을 내세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왕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어의다. 나가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제 발로 나가 남의 밑에서 일하다가 다시 돌아와 어의 노릇을 하려 드는 것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번에 관직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남은 한평생 다시 사모 쓸 생각을 접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첨정께서 느끼실 부담에 대해서는 이 사람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양측 모두, 서로 원하는 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할 뿐이지.
‘더 압박할 카드는 많지만 압박하고 싶지는 않군.’
결정적으로 나는 나의 시설을 통제할 의원이, 꼭 허준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허준의 위치가 너무 중요하고 높아서 받아주는 입장에서도 문제가 될 정도다.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강요할 필요도 없는 상태였다.
“다음 기회는 없겠지요?”
허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원의 약조를 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첨정께서 숙원을 풀 수 있을지 의문이로군요.”
“음.”
“뭐든지 계기가 있을 때 선택해야지요. 첨정께서는 지금이 때인 듯합니다. 거듭 드리는 말씀이지만 강요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허준도 내가 꼭 그를 기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님을 알 터였다.
자신이 협조를 제공하게 되면 부담을 지는 쪽이 자신만은 아니라는 것도.
“조금만 더 고민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이 자리를 벗어나기 전에 결정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재촉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시설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어서요.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거든요.”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겠습니다.”
허준은 자신의 짧고 뻣뻣한 수염을 연신 쓰다듬었다.
중독적인 감촉은 이해하겠지만 고민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각자 술잔만 기울이는 상황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허준은 술기운 때문에 볼을 은근히 상기한 채로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떤 대답을 하시더라도 존중하겠습니다.”
“그러셔야 할 겁니다. 내의원직을 그만두기로 했으니.”
허준이 호기롭게 답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군요.”
“잘 생각해 보니 고민할 가치도 없었습니다. 내의원 의원이야 굳이 소관일 필요는 없지만, 금시대 의학의 정수를 취합하는 일은 소관만이 할 수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로군요. 이 세상에 의원은 많지만 첨정은 단 한 분뿐이시니.”
“시설을 맡더라도 금천부원군 대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로군요. 기왕 시작하기로 했으니,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 말입니다.”
“실무 때문에 곤란해지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어쩌면 시설을 맡는 게 숙원을 이룩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겁니다.”
경력과 명성 높은 의원들은 각자의 경험과 이론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할 테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환자들은 검증을 도와줄 터였다.
“그렇겠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소관 역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시설 설립을 위해 을룡과 그의 수족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을 동안.
조정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동서 양당의 전쟁이 가열된 상황에서 서인 핵심 인물인 정철이 동인 핵심 인물인 이발이 갇힌 의금부의 당상관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발의 죄상은 어전에서 극도의 무례를 끼쳤다는 것이 전부이나, 선조와 정철은 이 이상의 정황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황 정도는 얼마든지 날조되기 마련이다.
약간의 고문까지 더해진다면 더없이 적절하다.
물증도 없고 근거마저 빈약하겠지만, 원 역사의 기축옥사가 어떻게 벌어졌던가?
위조와 낭설로 범벅이 된 소위 ‘정여립의 반란’ 사건으로 촉발되지 않았던가.
이번 일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이미 이발과 가까웠던 사람 십수 명이 한꺼번에 의금부에 하옥됐고, 도성 분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냉각과 가열이 동시에 진행됐다.
이 일이 적당한 선에서 정리되기를 바라는 대다수 사람들은 쉬쉬했으며.
보다 커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불 난 집에 부채질하고자 바삐 입을 움직여댔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날.
-쿵, 쿵!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제법 소란이 큰 편이었다.
이웃 사람들이 어떤 간 큰 놈이 저러나 싶을 정도로.
관광방의 흰 벽돌담 집 저택은, 지돈녕부사를 맡으며 끗발이 떨어졌다곤 하나 4대 공신과 그 후손들을 대표하는 금천부원군의 거처였다.
그런데 누가 감히 소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을룡도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불쾌한 얼굴을 하고서 대문으로 나아갔다. 누군지는 몰라도 좋게 대하지는 못하리라.
그런 생각과 함께 여전히 울리는 대문을 연 순간.
“……빙부님?”
소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권율이었다.
그는 면식을 익힌 을룡과 인사를 채 나누지도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는 안에 계신가?”
“마침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안동부원군께서 급히 찾으시네.”
영의정 안동부원군 권철.
금천부원군이 도성으로 돌아왔을 즈음에는 삶의 황혼에 다다라 있었다. 해는 거의 저물었고 그는 삼도천에 발을 담근 채였다.
왕이 아니고서야 금천부원군의 아성에 맞설 사람은 없다곤 하나, 권철은 금천부원군의 처조부가 되는 자.
그의 아들이 연락도 없이 급히 찾는다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서둘러주게.”
“예.”
을룡은 다급히 사랑방을 찾았다.
안에서 물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빙장이 찾아왔습니다. 안동부원군께서 급히 대감을 찾으신답니다.”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던데.”
“예. 무척이나 급해 보이시던데, 혹시…….”
“알았다. 바로 나가도록 하지.”
잠시 후.
사랑방에서 금천부원군이 나섰다. 하늘색 도포를 고수하는 취향은 변함이 없으나 그것을 걸친 그에게서 순수한 청년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금천부원군은 험한 외직과 고생 많은 내직을 거쳐 남들보다 두 배는 빨리 늙어버렸다. 그리고 달라진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아쉬워할 수는 없으리라.
환경을 포함해 금천부원군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과거의 모습을 고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또 하나가 달라지려 하고 있었다.
* * *
“듭시지요.”
권율이 안쪽으로 향해 팔을 뻗었다.
열린 사랑방 방문 너머에는 안동부원군 권철이 있었다. 그는 이부자리 위에서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자리해 있었다.
주변은 권철의 아들들이 지키고 있었다. 다들 인기척에 나를 발견하고는 묵례로 조용히 예를 표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권율이 밝혔다.
“아버지, 금천부원군께서 오셨습니다.”
잠시 후.
권철이 어렵사리 눈을 떴다. 탁하게 물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오셨나. 금천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