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77화
60. 정수 추출 (2)
“이 사람이 때마침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요.”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허엽의 눈이 빛났다. 정계 실세 중 하나인 나에게 빚을 지울 일은 많지 않다.
“혹시나 참의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의향을 물어보고 싶군요.”
“말씀만 하시지요.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겠군요. 다름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의원 한 명이 급하게 필요해서요.”
허엽은 잠시 침음하고는 말했다.
“아무 의원이나 한 명 필요한 건 아니시겠지요?”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가급적이면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경력이나 실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음, 때마침 가까운 사람 중에 내의원 첨정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내의원 첨정이요? 대단하군요.”
내의원에서는 No. 3에 달하는 위치다.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에서 No. 3라면, 달리 말해 이 나라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의원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내의원정을 지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품계도 통훈대부이지요.”
“허어…….”
내의원정이라면 No. 1.
어째서 지금은 그보다 밑인 첨정을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잡직이나 내의원만의 생리라도 있나 보지.
문제는 너무 거물이라는 점이다.
사실 첨정만 해도 얕볼 수 없는 사람인데 전직 내의원정이라니.
이런 사람을 빼다 쓰고도 선조의 지랄발광을 감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의원정이라면 그냥 공직자도 아니라 전담의나 다름없으니까.
달리 말하면 왕의 상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이런 사람이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영향에 들어간다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품을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어떤 사유로 의원을 찾으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를 영입하지 않으셔도 다른 의원을 구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이 사람과는 같은 가문 사람입니다. 직접 자리를 마련하고서 당부를 전한다면 이해하겠지요.”
“의외로 양천 허씨에도 대단한 의원이…….”
순간, ‘띠용’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의 충격이 머리를 때렸다.
양천 허씨, 그러니까 허씨 성을 가진 이 시대의 대단한 의원이라면 더 볼 것도 없다. 후대에도 무척이나 유명한 사람이니까.
“실례임을 알지만 혹시 본명이 허준입니까?”
“금천부원군께서 부르시는데 실례까지야……. 맞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어디선가 들어는 보았습니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요. 허어, 하필이면 허 의원이라.”
많은 유명인이 포진한 선조 시대였지만 그중에서도 허준은 손꼽힐 정도의 유명인이었다.
어떻게 이 사람을 잊고 지냈나 싶을 정도.
최고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덕을 보긴 했으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부터 나지는 않는 법이다.
허준의 명성은 당대에도 자자했고 저작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명과 일본에서도 유명해져 동북아 전체에 자자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너무 뛰어나다는 이유로 한동안 의학발전의 침체를 일으켰으니, 괜히 현대 한의학의 뿌리가 아니었다.
“으음.”
내가 감탄 섞인 침음을 흘리자 허엽은 오해하고서 물었다.
“허 첨정에게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자리 마련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길일이 잡히는 대로 연락드리지요.”
“참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고작 사람 하나 소개해드리는 일인데 금천부원군께 이 정도도 못 해드리겠습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너무 거물이라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될 터였다. 어쩌면 허준을 통해 그가 알고 있는 다른 의원을 쉽게 영입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미뤄둔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사실 이 사람이 찾아온 이유는 단지 의원을 구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말씀하시지요.”
“다름이 아니라…….”
* * *
권벽의 일을 처리하고 난 후.
오래지 않아 허엽이 자리를 주선했다.
약속된 장소는 한강 남쪽의 정자였다. 주변에는 오직 갈대만 무성할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만일을 대비해 장막을 치고 머슴들을 세워두었다.
때가 되자 중요 인물이 나타났다.
허준!
“금천부원군 대감이십니까.”
“맞습니다.”
“소관이 기다리게 만들었군요.”
“오래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바깥에 바람이 거셉니다.”
“예.”
허준은 장막 안으로 들어서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현재 내의원 첨정을 지내고 있는 허준이라 합니다.”
이제 삼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남들이라면 이제 대과에 급제할 나이였으나 허준은 이미 당상관 품계에 해당하는 통정대부를 찍은 상태였다.
내의원정에게 주어지는 품계가 일반적으로 정삼품 당하관 품계인 통훈대부가 끝임을 감안하면, 그는 벽을 넘어선 셈이다.
지금은 고작 첨정을 지내고 있다곤 하나 의료인으로서의 실력은 확실했다.
“안으로 듭시죠.”
“예.”
허준은 거부감 없이 안으로 들어와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머슴이 주안상을 바치자 허준은 짧게 ‘고맙네’하고는 머슴을 물렸다.
“일단 한 잔씩 하시겠습니까.”
“좋지요.”
나와 허준은 정철에게도 호평받은 위스키-보드카 잡종, 혹은 사독주를 각자의 잔에 부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첫 잔을 음미했다. 잡맛 없이 깔끔한 높은 도수 특유의 청아한 맛이 안주를 보챘다.
각자 가볍게 입안을 씻어냈고 이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암(眉巖, 유희춘의 호)과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과 미암의 연도 보통은 아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는군요.”
“미암께서는 소관의 은인 되시는 분입니다. 소관을 내의원 의관으로 천거해주셨지요.”
“그렇군요. 이 사람은 함경도에서 일하고 있어 미암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말을 남겼는지도요. 첨정께서는 알고 계신 바가 있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정정하셨지요. 그러다 건강이 안 좋아지셨는지 말도 없이 낙향하셔서, 배웅도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아쉽군요.”
“예.”
나는 쩝, 다시고는 물었다.
“그런데 초당(草堂)께서는?”
“일이 있으시다는군요.”
“이런, 초면인 사람 둘만 세워놓고 자리를 마련한 당사자만 쏙 빠질 줄이야.”
정말로 바쁜 것인지, 아니면 눈치가 좋은 것인지.
어느 쪽이건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진의를 물어볼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초당께 대략적인 말이라도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요.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긴히 찾는다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알려드리지요.”
“경청하겠습니다.”
“편하게 들으셔도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사람이 혜민서나 동서활인서처럼 병자들을 구호하는 시설을 세울 생각이라서요.”
“흠.”
“의원들을 소집하고 있지만 워낙 중구난방이라 질서가 없을 것 같군요. 그래서 기강을 확립해주실 의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허준은 턱을 쓰다듬었다.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마음 같아서는 소관 역시 발 벗고 나서서 동참하고 싶습니다만, 당장은 내의원에 묶인 상태라.”
“첨정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초당과 말을 나누던 김에, 그가 첨정을 추천해서 자리를 청했을 뿐이지요. 고견만이라도 나눠주실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허준은 다급히 부정하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날 혜민서와 동서활인서는 유명무실한 상태이지요. 각지에서 병자들이 나라의 은혜만을 믿고 도성으로 상경하지만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게 현실입니다.”
“…….”
“이런 상황에서 금천부원군께서 발 벗고 의행에 나서시니 의원인 제가 어떻게 도움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하군요.”
“초당께서 괜히 저를 소개해주신 게 아니군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소관이 역할을 자처하고 싶지만.”
허준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연신 턱을 쓰다듬었다.
짧고 뻣뻣한 턱수염이 빗처럼 움직였다.
“지금은 통정대부로서 내의원에서 행 첨정을 지내는 중이라, 과연 전하께서 사직을 받아주실지 의문입니다.”
“사직이라니요? 아닙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하군요.”
어딜 당상관 품계를 버리려 든단 말인가.
관직을 관두고도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금상이 선대왕을 저버리거나, 배신했거나, 왕위를 찬탈했을 경우.
이게 아니면 오직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관복을 벗고 묘소로 내려가는 경우.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관직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은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굳이 그걸 알려주지 않아도 어지간한 사람은 관직을 포기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혹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들어는 보았습니다. 의서가 아닙니까?”
의원들에게 배부되었다는 말을 지나가듯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가까스로나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책 이름이 지랄 맞게 긴 덕이었다.
“알고 계시군요. 소관이 책을 받아서 직접 보고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송나라 때 나왔던 이름 비슷한 서적과 다른 게 하나도 없더군요.”
송나라 때면 거의 반천 년 전인가. 한반도 왕조가 태어나고 망할 정도로 까마득한 세월이다.
그럼에도 변화가 없었다니.
아무리 동북아의 이상이 머나먼 과거인 요순시대에 있고, 그래서 모두의 시선이 앞이 아닌 뒤를 향해 있다지만 너무한 정도였다.
“이 사람도 처음 알았습니다. 의학이 송나라 때부터 침체되어 있었을 줄이야.”
“송나라 때에도 침체되어 있었던 학문일지도 모르지요.”
“흠.”
“신체의 구성에는 변함이 없고, 세상의 진리가 변하지도 않겠지만, 정작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유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해 왔지요. 그런데 의학은 진전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시체거나 시체가 될 예정, 혹은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변화도 발전도 진전도 없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다.
500년 뒤 세상에서는 학자들이 학자로 남기 위해서는 매일 논문을 읽고 바삐 학회에 참석해야 했다.
그럴진대 이 시대에서는 500년 동안이나 진전이 없단다.
과장일지도 모르겠지만 500년 세월 동안 침체되었다는 말이 과장이라도 가능할 지경이라면, 괜히 허준이 아쉬움을 느끼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이하군요. 의원인 첨정께서 이토록 진취적인 시야를 가지실 줄이야.”
“의원은 진취적이면 아니 된답니까?”
“아니요, 단지 놀라워서 그럽니다.”
허준이 비교 대상으로 삼은 유학도 실상은 그다지 변화의 폭이 큰 학문은 아니다.
이상사회를 머나먼 과거인 요순시대로 삼고 있는 것만 해도 그렇고, 군사부일체를 표방하며 스승을 아버지처럼, 스승의 말을 아버지의 말씀처럼 새기며 학문과 교리를 답습하는 것이 그러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론을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타파하는 것을 다음 세대의 역할로 규정하는 현대 학문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서 학문보다도 기술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잡학을 익혔으면서도 이렇게 발전지향적일 줄이야.
“아쉬운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의학이 발전해야 인명을 쉽게 살릴 수 있을 텐데요.”
“맞습니다. 누군가는 인명이 제천에 달려있다고 하지만, 재수가 없어 벼락에 맞고 죽지 않는 이상 어찌 제천만이라고 하겠습니까? 의학에 힘쓰지 않음은 잠겨오는 물에서 헤엄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고서 하늘에 달렸다고 믿는다면 현명한 행동은 아니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허준이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새로운 의서를 집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소관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의서를 집필할 능력은 없으니, 일단은 기존의 의술서를 취합하여 이 시대 의학의 정수를 만들어야겠지요. 그것을 토대로 발전한다면 의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낼 겁니다.”
동의보감의 저자 아니랄까 봐, 딱 동의보감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대단한 계획입니다.”
“예……. 아직까지는 계획뿐이지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집필에 투신하고 싶으나 기회가 없습니다. 보통 바쁜 게 아니다 보니까요.”
허준이 동의보감을 핵심적으로 집필한 기간은 선조가 죽고 난 뒤 어의로서 책임을 지고 유배를 다녀온 몇 년 동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 허준이 하는 말을 보니 농담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의술서를 취합하고 내용을 가려내고 취합하여 다시 작성하는 데만 해도, 상당한 비용과 인력이 들어갈 텐데요.”
“왕명이라도 떨어지지 않는 한 소관 혼자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당장 내의원을 관두지 못하는 탓이기도 합니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요?”
“예. 하지만 늘그막에야 깨작깨작 써 내려가다 죽어서 빛도 못 보게 되지는 않을까 싶군요.”
허준은 자조하듯 쓰게 웃었다.
바로 맞은편에 돈 많은 사람을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