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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76화 (17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76화

60. 정수 추출 (1)

조정에는 삭풍이 여전했지만 나와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선조는 동인을 괴롭히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고.’

덕분에 나는 편했다.

가까웠던 권철을 떠나보낸 참이지만 그에게는 나를 대신해 슬퍼할 사람은 많았다.

나까지 침울해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기왕 여유가 생긴 참이니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것을 돌보기로 했다.

“게 아무도 없느냐.”

나의 부름에 을룡이 사랑방 방문 앞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숭신방 저택을 오랫동안 관리하지 못한 것 같다.”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문서상으로만이 아니라 제가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현장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없었나?”

“물론입니다. 구성원들이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어 운영비나 세금 납부에 차질은 전혀 없습니다. 축적된 자산도 상당하고 분기별로 누적액이 늘어나는 중입니다.”

“대단히 양호한 편이군.”

“그렇습니다.”

“구성원들 의견은 어떤가?”

“당연히 만족하는 편입니다.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버려진 처지에 대감께 구원을 받았으니 어찌 다른 생각이 있겠습니까.”

“흠.”

사람이 배가 부르면 생각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숭신방 저택의 사람들은 고생한 세월이 길어서인지 다들 여전히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내가 나설 구석이 없는 건가.

좋은 일이었지만 조금은 아쉬웠다.

‘뭐, 꼭 숭신방 사람들에게만 신경 써야 한다는 법칙은 없지.’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다. 거기에는 믿고 의지할 곳이 없어 다친 몸을 이끌고 부랑하는 자들만 있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고아라던가 병자가 그러하리라.

그나마 고아는 친인척이나 마을 사람들이 거두어 돌보았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중앙의 유접소(留接所)와 지방의 진장(賑場)이 고아들을 수용했다.

병자에게도 동서활인서와 혜민서가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허리를 조아 매는 나라의 재정에 복지기관이 제대로 운영될 리 만무했다.

병자 구호 기관 중 하나인 재생원도 혜민서에 통합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지금은 혜민서마저도 간간이 타 기관으로의 합병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산과 인원이 적으니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역할이 없어 감축, 축소, 합병 논란이 생긴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고아는 민간에서 크게 담당하고 있지만 병자들은 그렇지 못하지.’

병자들도 민간의 일이지만, 먹이고 재우기만 하면 최소한의 여건은 충족되는 고아와는 달리 환자는 나아가서 의료인과 약재까지 부담해야 했다.

나아가 병증이 위중할 경우에는 특히나 전문성을 가진 의료인과 흔치 않은 약재를 조달해야 하니 비용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마냥 민간에서만 부담하기는 어려운 것.

미래에서도 의료비로 가정이 파탄 나는 일이 흔한데 하물며 조선 시대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동서활인서와 혜민서를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러한 부류였다.

가정과 민간 단위에서는 희망을 찾지 못해 나라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라면 무언가 다를까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도성으로 모여든 자들.

하지만 그들을 반겨주는 것은 피폐해진 국립시설이다. 사람을 치료해주기보다는 시구문(屍口門) 밖으로 옮겨 보이지 않는 곳에 매장하는 경우가 더 많은.

“숭신방의 사람들은 괜찮다니 수용인원만 확대하면 되겠어.”

내가 외직을 지낼 동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숭신방 저택을 많이 찾았다.

숭신방 식구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그들을 못 본 체할 수 없어 꾸역꾸역 받아들였고 덕분에 설계상 수용인원보다 상주 인원이 배는 많아진 상태였다.

그러고도 별 불만 없이 잘살고 있다니 다행이지만 이대로 사람을 계속 들이다 보면 결국에는 뉠 자리도 없는 콩나물시루가 될 터.

늦지 않게 기존 저택을 확장하던 새 저택을 세우던 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유능한 목장을 섭외하지요.”

“그리고…….”

나는 생각해둔 것을 꺼냈다.

“내가 구제할 사람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만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시설도 세우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음.”

을룡은 짧게 신음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평소에는 군말 없이 내 명령을 이행하는 을룡이었으므로 지금과 같은 반응은 특이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행동도 아니었다.

“네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아무리 선행이라도 선은 있는 법이지.”

광범위한 구제 활동으로 들어가는 비용,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 등은 솔직히 지금의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산이라면 수표로 뒤를 닦아도 무방한 수준이고 4대 공신을 대표하는 금천부원군에게 감히 불만을 표출할 놈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게 가능한 놈은 오직 선조뿐이고, 그래서 문제가 되는 놈도 오직 선조뿐이다.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일은 대체로 나라의 일로 인식되고 있지. 과연 내가 한몫 거들겠다고 나서면 선조가 좋게 생각할지 의문이로군.’

마침 선조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왕이 아니었다.

약자 구제에 대해 그동안 해온 것도, 하고 있는 것도, 할 계획도 없지만 장애인 구제에 이은 병자 구제가 자신의 영역을 침해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이미 선조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부분이 있거나 단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고 견제했으며 그 대상에는 설령 자신에게 충성하는 (척하는) 사람조차 포함되어 있었다.

설령 사회적, 정치적으로 상당한 명성과 지위를 가진 나라도 선조의 눈에 벗어나서는 좋을 일이 없었다.

을룡은 그것을 우려하는 것이겠지.

“걱정할 필요 없다. 모르고서 하자는 것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혜민서나 활인서 같은 병자 구제 시설이야. 물론 두 기관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지. 그래서 기존 기관을 대체할 시설의 필요성이 절박하지.”

“병자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시설만 아니라 의원과 약재들은 물론 사망자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매장지와 그에 따른 부속 시설과 인력이 필요할 겁니다.”

“재물이 얼마나 들어가건 나에게 부담되는 일은 아니지. 오히려 의술에 재능 있는 사람을 영입하는 것이 더 어려울 테지.”

“명망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을룡이 말했다.

그는 능력이 좋으니 어떻게든 사람을 찾아낼 거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사람들을 뭉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의원이라면 더욱 어렵겠지.

이 시기의 학문은 그다지 체계적인 편은 아니었고 의학도 다르지 않았다. 학맥에 따라서는 물론, 의원 개개인에 따라서도 입장과 해석이 다를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 목숨이 걸린 일에 타협이 가능하겠는가?

매번 의견 충돌이 날 때마다 환자들의 목숨을 걸어가며 누가 옳고 틀렸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결국에는 공인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경력과 권위가 있는 사람이 나서줘야 했다.

“음…….”

내의원(內醫院)이나 전의감(典醫監)에서 나름 입지를 가졌던 의원이 도와준다면 좋으련만.

각기 왕족과 관리의 의료를 전담하는 기관이라 이곳 기관에서의 경력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쪽 방면으로는 지식은 물론 인맥마저 전무한 나다.

그렇다고 대뜸 찾아가서 나랑 일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하면서 엄지를 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도 따로 알아봐야겠구나.”

* * *

며칠 뒤.

나는 일단 권벽의 일을 처리하고자 저택을 나섰다.

그는 과거 안변부사를 지냈으며 함경도에서 보관해야 할 세미의 일종인 증전미(蒸田米)를 사사로이 이용했다가 때마침 방문한 어사 허봉에게 발각되어 파직되었다.

권철은 나에게 협조해주는 대가로 권벽을 도와주기를 청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니 이제는 내가 나의 역할을 이행할 때지.

중한 죄는 아닌 데다 명분이 굶고 있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인 만큼, 덮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고발자인 허봉의 의사가 중요했다.

‘그 친구가 협조할지 의문이긴 한데.’

이제 와서 말을 뒤집는 것은 내가 그때 실수했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허봉은 나의 당여인 허엽의 아들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제 아버지가 까라면 까야 하는 법.

그렇다고 무작정 이래라 저래라, 감 놔라 배 놔라 명령질만 했다간 부자가 쌍으로 빈정 상하는 수가 있었다.

나도 최대한 좋게 협조를 부탁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 오너라!”

나의 외침에 대문이 슬쩍 열렸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노복은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셨습니까.”

“집주인에게 방문 의사를 통기하였는데.”

“예. 들었습니다요. 안으로 듭시지요.”

노복은 물러나서 대문을 활짝 열었다. 허엽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청에 서안을 깐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금천부원군 대감.”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참의.”

허엽은 현재 이조참의를 지내고 있었다.

제삼당 내에서는 노수신과 이미 졸한 유희춘과 연배가 맞먹을 정도로 원로이지만, 품계가 낮은 데다 역사가 좋지 않아서 지분은 여타 당여들과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스승이었던 서경덕과 이황을 따르는 동인들이 최근 수세에 몰려서 인지 은근히 위축되어 있었다.

적이 다르다고는 해도 학맥으로 치면 동인들은 사제와 사질들인데 지금 정철을 위시한 서인 강경파들에게 줘 터지고 있으니 어찌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듭시지요.”

“예.”

발을 옮기니 허엽이 노복에게 일렀다.

“여기 주안상 둘 마련해 오너라.”

그렇게 자리하자 허엽은 상석을 양보하고는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어인 일로 금천부원군께서 누택을 다 방문하시게 되셨습니까?”

“외직을 지내면서 한동안 귀한 인연들을 못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노관을 찾아주시니 영광이로군요, 영광. 하하하.”

허엽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 역시 작게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근래에 조정이 많이 소란스럽지요.”

“아, 예.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닙니다. 고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사대부들끼리 이렇게 서로 날을 세울 줄이야.”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

“그건……, 음.”

허엽은 쓰게 침음하고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동인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이 보기 편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이 사람이 대감의 뜻에 따라 서인에 적을 두긴 하였으나, 단지 필요에 의해서일 뿐이지요. 마음 같아서는 동인을 편들고 싶습니다.”

“참의의 우려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잘 알겠습니다. 때마침 이 사람이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습니까? 천만다행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아 그럽니다.”

“알겠습니다.”

이제는 내 본론을 꺼내도 되겠지.

하지만 볼일이 권벽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의원 확보도 시급한 일이니.’

허엽이 발언력이나 권세는 약하더라도 오랫동안 조정을 위해 일해온 노신이다. 때마침 찾아온 참이니 그의 지혜를 빌려볼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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