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75화
59. 정철, 정철 (4)
“왔나.”
선조가 말했다.
그는 후원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연못의 물이 바람 따라 일렁였다.
“금천부원군의 노고가 많아 치하하고자 불렀네. 바쁜 와중에 내가 그대를 곤란하게 한 건 아니겠지?”
“아니옵니다.”
“다행이군.”
선조는 감흥 없이 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소란이 이제야 잦아들었네. 하지만 조정이 시끄럽기는 여전하더군.”
“그러하옵니다.”
공의전의 죽음을 앞두고 위사공신 삭제를 위해 잠시 맺어진 휴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동서인은 다시 패를 나누어 싸우기 시작했다.
“금천부원군이 꾸민 일인가?”
“신은 단지 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하고자 최선을 다했을 뿐이옵니다.”
“그대에게도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군.”
“왕명을 수행하는데 신의 호불호와 같은 사심이 개입해서는 안 되겠지요.”
“당연한 것이다.”
선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당한 면상을 보아하니 공신 삭제를 잠재운 것이 오로지 자신만의 공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오만하고 거만한 선조다.
설령 남이 대신 똥을 치워주어도 자신이 명령한 일이니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겠지. 이 조선에서 주인공은 오직 그뿐이었고 나머지는 명령하면 따를 뿐인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금천부원군은 도성으로 귀환한 이래도 실직을 받지 못했지. 일전에도 자리가 없어 나라를 떠받드는 정이품 대신임에도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맡았으니 내가 미안한 마음이 있었네.”
“아니옵니다. 신하인 자에게 지위의 고하가 무슨 상관이 있겠사옵니까. 오직 전하께 충성하고 나라에 봉사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이행할 뿐이옵니다.”
“말뿐이라도 고맙군.”
그렇게 말이라도 안 했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으려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선조였고 상대방이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괘씸이니 불충이니 지랄이 짠 인간이었다.
“이제 금천부원군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고자 하네. 뭇 사람들은 육조의 일이 나라에 있어 더없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선조는 말끝을 늘였다.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민망하거나 부끄러워서는 아니다. 능글맞은 시선은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고 마치 반응을 기대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놈은 자기 입으로 내가 육조의 일을 맡지 못할 것이라 밝혔다.
‘나라를 위해 누구보다도 헌신했음을 두 번의 일등공신 제일인과 금천부원군이라는 군호가 증명하고 있는데도, 기어코 핵심 관직인 육조 판서는 주지 않겠다?’
사실상 실권을 가지지 못하도록 견제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자기편을 만드는 재능이란 추호도 찾아볼 수 없는 자였다. 이러고도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가 있기를 바란단 말인가.
누구라도 선조 상대로는 적으로 남고 싶을 터였다.
어차피 받을 의심과 견제라면, 굳이 놈을 상전으로 모시면서 뒤통수도 맞아줄 필요가 어디 있나?
‘왕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고 배때지에 칼 안 들어가는 건 아니거늘…….’
언제까지고 자만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교하시옵소서.”
“금천부원군은 아쉽지 않나?”
“육조 판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신은 단지 전하께서 맡기시는 일을 수행할 뿐이옵니다.”
“하하하…….”
선조는 달갑지 않은 투로 웃었다.
오히려 내가 불쾌한 티를 내주기를 바랐다는 듯.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놈에게 저열함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았다. 편한 마음으로 나를 의심하고 견제할 수 있는 꼬투리를 바라는 그 발상을 모르는 줄 아느냐.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는 놈에게 충신으로 남을 터였다. 그래야 반전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금천부원군이 충신이라 다행이다.”
“…….”
“지돈녕부사. 그대를 위해 내가 남겨둔 자리이다.”
마치 대단한 후의라도 된다는 듯 오만한 표정을 짓는 선조였다.
지돈녕부사, 돈녕부 지사가 무엇인가? 왕족으로 인정되는 가까운 왕족을 제외한, 약간 거리감 있는 왕의 친척들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중요성이 가까운 왕족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자들을 관리하는 것이라, 사실상 하는 일이라곤 출생과 사망에 따른 명단 교체가 전부지만 실무에 비해 조직이 쓸데없이 비대했다.
왜냐하면…….
‘품계만 남은 자들에게 감투를 씌워주기 위해서지.’
사실상 하는 일도, 맡은 역할도 없는 돈녕부 상위직의 존재 의의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휴식을 위해서나 감투만을 씌워주기 위해서는 아니다.
돈녕부 당상관직인 의정부 삼의정, 육조 판서와 같은 조정 핵심 관직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때문에 자칫 외척의 구심점으로 성장할 수 있는 왕의 장인은 국구(國舅)가 영돈녕부사, 즉 돈녕부 영사를 맡았다. 이하 판돈녕부사와 지돈녕부사도 역할은 다르지 않다.
‘본질은 실권을 제한하고 견제하는 데 있다는 뜻이지.’
자기 똥을 대신 치워준 사람에게 보여주는 성의라고 하기에는, 사실상 은혜를 원수로 갚은 꼴이다.
하지만 선조의 면상은 여전히 당당했다. 자신이 이렇게 박대하더라도 내가 충신이라면 군말 없이 따라야지 않겠냐는 듯.
선조는 누구도 진심으로 충성할 수 없게 만드는 당사자임에도, 동시에 자신이 신하를 믿지 못하는 이유를 신하에게서 찾는 자였다.
그러니 이렇게 뻔뻔할 수 있겠지.
“별로 기뻐하는 기색은 아닌데.”
선조는 주체하지 못하는 저열함을 다시 한번 발휘했다.
그럼 내가 기뻐서 방방 뛰기라도 할 줄 알았나.
면전에서 엿을 먹이고도?
“전하, 신은 전하께오서 어떤 역할을 맡기셨더라도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어째서 그렇지?”
“단지 명령을 이행할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흐음.”
선조는 트집 잡을 구석을 놓쳐서인지 짧게 침음을 흘렸다.
“좋다. 교지는 따로 내리도록 하지. 금천부원군은 이만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라.”
“예. 망극하옵나이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 * *
며칠 뒤.
어전.
경관 당상관직을 지내게 된 나 역시 회의에 참석했으나, 돈녕부의 당상이 무슨 존재감이 있겠는가?
몇몇 사람들은 도성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낸 금천부원군이 고작 지돈녕부사 따위를 지낸다는데 당혹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감히 어전에서 의문을 표하거나 해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단지 선조의 의중을 짐작만 할 뿐.
회의는 평소처럼 진행됐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안건이 먼저 논의되고, 차차 시답잖은 일들이 보고의 느낌을 띄며 오가던 중.
좌우 시립한 신하들의 대열 속에 숨어있던 자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신 사간원 사간 정철, 전하께 한마디 말씀 올리고자 하옵니다.”
왕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무슨 배짱으로 다시 이 자리에 나타났냐는 듯.
‘정철? 어전에는 무슨 일이지?’
나도 은근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철의 표정을 보아하니 막상 그도 스스로 바란 일은 아닌 듯했다. 낯빛은 어둡고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으니까.
차라리 당당했다면 배짱이 좋아서라고 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저도 부담스러워하면서 나서기는 왜 나선단 말인가?
‘외압이 있었나.’
곧 밝혀지겠지.
고작 얼굴이나 보여주려고 나선 건 아닐 테니까.
“정 사간은 어찌하여 다시 나섰는가?”
선조가 먼저 운을 띄우자 정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난날 이(李, 이발)가 극악 패려한 짓을 저질러 성총을 어지럽히고 조정에 분란을 야기하였는데, 신 역시 책임이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그가 저지른 만행은 신이 사주한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그런데?”
“하오나 어찌 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오늘날 의금부의 잘못을 감히 입에 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중신들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이이 사고를 친 주제에 어디서 감히 누군가를 또 지적하려 드냐는 듯.
정철은 그저 송구하기만 하다는 듯 허리를 깊게 숙였다. 몸은 선조를 향한 채였으나 꼭 선조에게만 향한 사죄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죄인 이(李)의 죄상은 모두의 앞에서 드러나 깊게 왈가왈부할 가치도 없사옵니다. 그런데 고작 유배를 논의하고, 장형은 속전으로 대체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어찌 처벌이 합당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에 선조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정 사간은 죄인에게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합당하다고 보는가?”
“극형에 처함이 옳사옵니다.”
“극형이라…….”
선조는 음미하듯 단어를 천천히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비록 죄인의 만행이 악독하다고는 하나 극형을 집행할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李)는 간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는가?”
“간관의 역할이란 간언을 통해 조정을 맑게 유지하는 것이지, 성총을 어지럽히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게 아니옵니다. 오히려 죄인은 자신의 직책을 방패삼아 죄를 저지르고자 했으니 엄히 벌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사간의 뜻은 알겠다. 임시로 의금부 동지사를 맡길 터이니 차질 없이 죄인의 죄상을 조사하도록 하라.”
“……망극하옵나이다.”
정철은 종삼품 사간원 사간에서 무려 두 단계나 높은 종이품 의금부 동지사까지 맡게 되었다.
그에 맞는 품계까지 내려진 것은 아니었으나 고위직을 한 번 역임한다면 그만큼 올라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전이나 다름없을진대 정철의 얼굴은 여전히 밝지만은 못했다.
“사간은 이만 물러가라.”
“예.”
정철은 어전에서 퇴장하는 그 순간까지 몸을 낮추며 근신했다.
중신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못했으나, 정철이 사라지자 그들의 얼굴에 은근한 혼란이 서렸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정철이 나에게 들은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이발의 제거나 다름없는 말을 하고자 어전을 찾는다고?
정철은 동서인 양당 정쟁의 한복판에 있었고 싸울 땐 싸우더라도 사릴 땐 사려야 했다. 왕의 눈에 나기라도 한다면 자신만 아니라 서인 전체가 침몰하는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선조의 만족스러운 면상을 보아하니…….
이발이 먼저 왕의 눈에 난 모양이었다.
‘나를 지돈녕부사라는 한직으로 몰아냈던 건 정철과 이미 합의가 되어서였나.’
나에게는 병신 같은 모습만 보여온 선조지만 역시 단순한 병신은 아니었다.
때마침 동서인의 분열로 공신 삭제가 묻혀가니 자신이 나서서 쐐기를 박고 싶었나보군.
정철도 들은 말이 있고 나서서 한 말이 있으니 이발을 고이 두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선조가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동인은 영수인 이산해의 지도력을 의심하며 사분오열한 상태였고 이발의 존재처럼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변수란 기회를 노리는 자에게는 달갑고 지배하는 자에게는 곤란한 것.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조는 동서 양 당을 돌아가며 조지는 방식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정철을 이용해 기축옥사의 판을 키운 뒤, 훗날 책임을 정철에게 전부 씌우고 서인을 찍어 누른 게 그러했다.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