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74화
59. 정철, 정철 (3)
“가능하다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과 정 사인 사이가 보통 사이는 아니니까요.”
정철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자 핏기가 조금은 돌아왔다. 떨리던 시선도 차차 안정되어 갔다.
“너무 오래간만에 찾아왔는데 고작 부탁이나 하기는…….”
부담을 드러내면서도 말을 확실하게 끝맺지는 못한다. 애초에 한참이나 연락이 없었던 정철이 나를 다시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나에게 도움을 받기 위함이다.
자기가 사양한다고 내가 동의하고서 말을 돌린다면 도리어 놀라겠지. 그 꼴을 보는 것도 재밌겠지만 정철과는 그다지 친분을 쌓고 싶지 않았다.
나로서는 오래전에 갈라진 사람이라.
“아닙니다. 사간께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 사람이 나서서 돕지 않는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겠지요.”
“감사합니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십니다. 정 사인의 일이라면 이 사람의 일이기도 합니다. 도움을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 오히려 사인께서 너무 부담스러워하신다면, 이 사람 역시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습니까? ……그렇겠군.”
“역시 이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편하게 대해주세요.”
“알겠네. 고맙네. 금천부원군……, 대감.”
“하하.”
나는 가볍게 웃어주고는 물었다.
“어떤 일로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기탄없이 말씀해 보세요. 이 사람이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나설 터이니.”
“금천부원군 대감께 실례가 됨을 알고는 있지만.”
정철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어전에서 지극히 결례를 끼쳐서 말이네. 전하께도 안 좋은 인상을 드렸고 대신들에게도 밉보이게 되었어.”
“음, 심각한 상황이군요.”
“내가 시야가 짧았네. 하필이면 동인, 그것도 극단적이기로 유명한 이발을 대동해서 어전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다니.”
“그 자의 행동 때문에 사인께서 곤란해진 겁니까?”
“……나도 책임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정철은 회피하듯 말을 이었다.
“이발이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나서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걸세. 전하와 중신들이 지극히 불쾌하시는데도 언성을 전혀 낮추지 않고 오히려 잘났다는 듯 거친 말을 내놓더군.”
“정도를 모르는 사람이었군요.”
“그렇네. 덕분에 나까지 곤란하게 되었어.”
“이발을 직접 어전으로 데려오셨으니까요.”
“…….”
정철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때마침 밖에서 주안상을 가져왔다. 안으로 들이니 정철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취한 상태로 나를 찾아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 사람이었다. 주당(酒黨)이라는 표현도 부족해서 주신(酒神)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한두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술이라면 내가 마다할 수 없지.”
“이 사람이 직접 빚은 술입니다.”
“대단하군.”
각자의 잔이 채워졌다. 정철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잔에 담긴 술을 바라보았다.
물처럼 한없이 맑다. 맡는 것만으로도 코를 따갑게 만드는 술 냄새는 능히 도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못지않게 진한 향기가 있다. 바로 곡식 냄새다.
“분명 도수는 여느 소주 이상인데 곡주(穀酒)의 냄새가 상당히 진하군. 마치 곡주를 압축하기라도 한 것 같네.”
“특유의 진한 곡식 냄새가 마음에 드신다면 나머지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내가 손을 내밀며 권하자 정철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잔을 기울였다.
나 역시 잔을 기울였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청아함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뜨거워진다. 뒷맛은 약간 고소한 느낌이다. 빈 공간을 짙은 곡식 냄새가 채운다.
‘위스키랑 보드카를 섞인 느낌으로군.’
맥주를 증류하여 처음 나온 술을 담았다. 도수는 최소 70% 이상. 특유의 맛은 거의 사라지고 향기만 남았다.
“……좋군. 이런 술을 직접 빚어내다니 금천부원군 대감의 조예도 대단하네.”
“착잡한 심정에 조금의 위안이라도 되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뿐이겠는가.”
나와 몇 잔을 더 돌렸다. 도수가 높다보니 마실 때는 몰라도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더 늦기 전에 본론을 이어가는 편이 좋겠군. 정철이 고작 술자리나 즐기고자 나를 방문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주안상을 마련한 것은 어디까지나 제정신인 상태에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부담감과 경계를 허물기 위함이다.
진탕 마시고 뻗기 위함이 아니라.
“취중진담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니 기탄없이 말하겠습니다. 설령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술김에 저지른 일이니.”
“알겠네.”
“사인께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경위는 잘 알겠습니다. 계기가 확실하니 타개할 방법도 분명하지요.”
“무엇인가?”
“이발이 엄벌을 받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이는 겁니다.”
“……어째서? 그게 도움이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이발은 큰 죄를 지었고 사인께서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요. 자칫 불똥이 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철저하게 선을 긋는 행동이 도움이 됩니다.”
“이미 이발이 나를 배신자라고 불렀는데.”
“이미 배신자가 되었으니 더욱 당당하게 배신을 할 수 있지요. 이제 와서 태도를 달리한다고 그가 고마워할 것 같습니까?”
“그건 아니겠지.”
정철은 착잡한 표정으로 잔을 기울였다.
“이발은 이대로 두어도 유배를 당할 것 같은데, 엄벌을 받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이자는 것은.”
정철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태장도유사. 유배 이상의 형벌은 오직 사형뿐이다.
이발을 죽이자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래야 공신 삭제에 대한 소리가 쏙 들어갈 테니.’
서인인 정철이 동행한 동인 이발을 배신하고 나아가 극형을 주장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러고도 동서인들이 철지난 공신 삭제를 붙든다면 진심으로 박수쳐서 존중해줄 자신이 있다.
이미 정쟁으로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뼈에 새기고도 공통된 목표를 위해 묻어두고 힘을 합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예전처럼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 상태가 되겠지.
괜히 선조가 신하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당쟁을 유도한 게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렇다.
‘이발 외에도 피를 보는 사람이 여럿 생길지도 모르지만, 나를 건드리고도 하하호호 원하는 바를 이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대가를 치러야지.’
선조를 공신 삭제로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건, 왕을 압박하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역시 압박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선조 그놈 성격에 자기 일이라고 스스로 책임지고 처리하겠는가?
게다가 나는 몇 번이나 선조에게 해결사로 기용되었다.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이 말이다.
동서인은 대외적으로 당색이 없는 나에게 적을 확실하게 만들고 싶었겠지.
그래야 내가 다른 쪽에 붙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눈치 보는 일이 없어질 것 아닌가?
금천부원군 급의 존재라면 설령 자신의 편이 되지 않더라도, 위협적인 변수로 남겨두느니 피아를 확실하게 해두는 게 낫다는 거다.
‘나를 농락하려 드는 건 너희들 자유지.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은 나의 자유다.’
선조가 나에게 전가한 공신 삭제를 묻는 것도 성사하고, 동시에 동서인들에게 나를 함부로 건든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일거양득이 아니냐?
“서인 내에서 사인을 지지하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압니다. 목소리를 합쳐 이발을 보다 엄벌에 처하자고 주장하신다면, 전하나 중신들은 사인의 진심을 알고서 용서해 드릴 겁니다.”
“하지만 이발은…….”
“이발의 처우는 전하와 중신들이 결정하게 될 겁니다. 만일 이발이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면 전하와 중신들이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지요. 그럴 생각까지는 없다면, 당초 논의대로 유배로 끝나지 않겠습니까.”
“음.”
“사인께서 죄책감 같은 걸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죄인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같은 중차대한 문제가 고작 몇 명이 주장한다고 결정될 일도 아니거니와…….”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따지자면 이발이 먼저 사인을 배신한 거죠. 혼자 온 게 아님을 알면서도 전하와 중신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
“어차피 동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발이 먼저 사간을 위험에 빠뜨린 건 인정하지 않고, 사간이 인의를 저버리고 배신했다며 언성을 높이겠지요. 그러고도 당하고만 계실 수는 없잖습니까.”
“……맞네. 이발은 나를 위험하게 만들었지. 그러고도 사과하기는커녕 나를 배신자로 몰아갔어. 실상 먼저 배신한 것은 이발인데도 말이야.”
“이만하면 이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충분히 드린 것 같습니다.”
정철은 착잡한 얼굴로 잔을 기울였다. 독주가 단숨에 바닥을 드러냈다.
고작 한 잔만으로는 부족했다는 듯 정철은 내가 따라줄 새도 없이 자신의 병을 기울였다. 잔이 흘러넘칠 정도로 따르고는 이번에도 거침없이 잔을 끝까지 기울였다.
그것이 결단에 도움이 되어준 걸까.
정철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내 편이어서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 술은 이름이 무엇인가?”
“음.”
위스키, 보드카.
내가 만든 술은 둘 사이의 어딘가지만 어느 쪽에서라도 이름을 따오기는 힘들었다. 조선에서는 의미도 없이 혀만 꼬는 단어가 될 터이니.
하지만 두 단어의 뜻은 근본적으로 같다.
위스키의 원산인 스코틀랜드에서는 위스키를 ‘으슈거-베허(Uisge-beatha)’라고 부른다. 생명의 물이라는 뜻이다.
보드카의 어원은 ‘지즈데냐 바다(Жизденя вода)’라고 하며 뜻은 마찬가지로 생명의 물이다.
그러니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위스키와 보드카처럼 생수(生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사독(蛇毒). 독기가 대단한 주제에 알게 모르게 사람을 취하게 만드니 이 이름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공감이 가는군. 적절한 이름일세.”
“몇 병 더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나눠드리겠습니다.”
“그래주겠나?”
“물론입니다.”
나는 기꺼이 응해주었다.
며칠 뒤.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서인이 서로를 향해 물고 뜯기 시작했다.
동인들은 정철이 배신행위를 하고도 이발의 엄벌을 주장한다며 분개했고, 서인은 이발이 정철을 곤란하게 하고도 사과하지 않으며 배신이라 호도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공신 삭제?
그딴 게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 *
-쿵, 쿵.
대문 울리는 소리가 있었고,
“대감.”
을룡이 알렸다.
사랑에서 휴식하고 있던 나는 방문을 열고 물었다.
“누구지?”
“궐에서 왔다고 합니다.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수염이 없고 피부가 희며 몸이 가는 것을 보니 내시가 틀림없습니다.”
“내시인가.”
그렇다면 누가 나를 불렀는지는 뻔하고도 뻔했다.
상황이 정리되어가니 이제 청산을 원하는 걸까.
선조가 나에게 노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리라고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뭐라도 잘못 처먹지 않고서야 그럴 놈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이 새끼는 팔자 좀 폈다 싶으면 뒤통수를 친단 말이지.’
전생에서도 검증된 바였다.
심장이 떨렸다. 놈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럽고 불쾌하지만 거부권은 없다. 나는 갓집에서 갓을 꺼내 쓰며 말했다.
“의복만 정제하고 바로 나서겠다고 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