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73화
59. 정철, 정철 (2)
“정 사간!”
이발이 언성을 높였다. 어전과 중신들 앞에 자리했거늘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태도를 달리한 정철은 입을 닫은 채 고개만 숙일 뿐.
“사간이 먼저 전하께 이양원의 일을 함께 상주 드리자며 나를 현혹해놓고는, 상황이 엄중해지니 혼자서만 발을 빼겠다는 거요!”
“…….”
정철은 침묵했다.
설령 배신자로 낙인찍히더라도 왕과 서인 중신들 모두에게 적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됐다. 정치적 자살이 아니라 일신의 자살과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이발은 여전히 자신의 행위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전하, 조정에는 이렇게나 간적이 많사옵니다! 곁에 이러한 자들밖에 없는데 어떻게 인군께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발이 책망하듯 물었다.
간신들이 왕 주변에 있는 이유는, 왕이 그러한 신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둘이라면 인군의 눈을 속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주변이 간적뿐이라는 이야기는 왕의 인사능력을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정철이 변심하기 전에도 선조의 얼마 없는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발은 홀로 남고도 제가 여포라도 된다는 듯, 왕과 중신들이 모인 어전에서 모두를 적으로 돌린 채 다시 선조를 도발했다.
“내가 조정에 간적이 있음을 알겠다.”
“이제라도 아셨다니 천만다행이옵니다. 부디 간적들의 직책을 뺏고 원방으로 유배 보내어, 다시는 조정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이 헌납의 주장이 나의 뜻과 일치하는구나. 게 밖에 아무도 없느냐! 위사들은 족히 어전으로 들라!”
선조가 문 쪽을 향해 외치자 대문을 지키고 있던 위사들이 들어와 예를 올렸다.
“부르셨사옵니까.”
이발은 자신의 뜻이 이행되는 줄 알고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참상관을 갓 넘어선 말단 당하관이 무엇을 알겠는가.
지도력을 시험 받고 있는 이산해와 맞설 정도로 동인 내에서는 영수나 다름없는 입지를 구축했다지만, 실상 그 권력은 이조정랑으로서 동료를 많이 만들었다는 데서 나온 것이지,
왕이 허락하거나 인정한 실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부류의 권력은 안개나 신기루와도 같다. 왕을 적으로 만드는 순간 허상처럼 흩어질 뿐이니.
선조가 선언했다.
“내 조정에 간적이 있어 치울 생각이다. 그 간적을 추포하여 왕옥(王獄, 의금부)에 가둬라!”
선조는 누가 간적인지 확실하게 명시하지 않았으나 대신 턱짓하여 이발을 가리켰다.
이만하면 병적으로 책임지기 싫어하는 선조 치고는 확실한 신호였다. 갑사들은 예를 표하고는 이발에게로 나아갔다.
“왜? 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인가! 전하께서는 그대들에게 간적들을 추포하라 하지 않았나!”
이발이 주춤거리며 외치자, 갑사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전하께서 추포하라 하셨던 것은 간적‘들’이 아니라 간적이었소.”
“……!”
“어전이니 전하께 결례 끼치지 말고 순순히 따라오시오.”
이발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이리저리 팔을 내질러 저항하였으나, 책상물림인 그가 우악스러운 무인 여럿을 동시에 이겨내기란 불가능했다.
점차 줄이 이발의 팔과 허리를 조여들었고 이발은 선조를 향해 발작적으로 외쳤다.
“전하! 신은 단지 간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을 뿐인데, 어찌하여 간적으로 몰아가시옵니까!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이에 바로 곁에 있었던 정철이 이때다 싶었는지 일갈했다.
“간관으로서의 역할을 빙자하여 인군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한평생 나라를 위해 봉사한 대신들을 비방하는데 어찌 간적이 아니란 말이오? 더 이상 소란 일으키지 말고 위사들에게 협조하시오!”
“뭐라?! 이 자리에 나를 불러낸 것은 그대이면서도 간신들 앞에서 지레 겁을 먹고 변심한 주제에, 누구를 가르치려든단 말이오! 그대야 말로 진짜 간신이오! 배신자! 배신자!”
이발은 끌려나가면서도 정철을 향해 배신자라고 외쳐댔다.
선조는 질렸다는 듯 손짓하며 일렀다.
“무엇들 하는가! 속히 끌어내라!”
위사들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면서 저항하는 이발을 끌고 나갔다.
일단의 무리가 대문을 열고 나서자 싸늘한 바람이 어전을 채웠다. 내시들이 늦지 않게 대문을 다시 닫았으나 주변은 이미 식을 대로 식은 상태였다.
“…….”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끌려나갔으나 선조는 여전히 불쾌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새파란 관리가 알량한 권력을 믿고서 자신을 간적으로 몰아갔는데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왕까지 비방했다는 거다. 덕분에 잘 내색하지 않는 왕의 면상이 대놓고 찌그러지지 않았나.
중신들 마음 같아서는 소란을 일으킨 이발의 죄를 처벌하자 주장하고 싶었으나 분위기상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짧은 침묵이 있었고.
“이미 근래의 일로 조정이 번잡한데, 일개 당하관이 어전에서 이토록 소란을 일으키니 실로 착잡하다. 내가 정치를 못한 탓인가?”
모두가 침묵했다.
선조는 신경질적으로 콧김을 내쉬고는 권철을 바라보았다.
“영의정은 대답해 보라.”
“저, 전하…… 아니옵나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근래의 조정이 이토록 시끄러운가?”
“조정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어느 선대왕의 치세에도 있었던 일이옵니다. 근래의 일 또한 마찬가지이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아니겠사옵니까?”
“그렇다니 내가 조금은 위안 삼을 수 있겠다. 때마침 내가 마음이 번잡하여 간관을 옥에 가두게 되었는데, 언로를 핍박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니 방면하는 것이 좋겠다.”
당연하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오래 왕을 모셔온 권철은 왕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근의 일과는 별개로 헌납의 행위는 지극히 불충하고 무례하였사옵니다. 오히려 이미 번잡한 성상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니 엄벌에 처함이 마땅하지 않겠사옵니까.”
“영의정의 판단을 믿겠다.”
선조가 자신이 간관을 벌하고 언로를 탄압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을 우습게 알고 능멸한 간적을 벌주지 않을 수는 없다.
이따금 종잡을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이런 면에서는 일관적인 선조다.
“…….”
영의정 권철을 욕받이로 내세운 선조는 이제 정철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태도를 바꾸긴 하였으나 괘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간적을 어전으로 데려온 것도 바로 그였다.
“사간.”
“예, 예…….”
호명 받은 정철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발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다. 정철은 이발의 뒤를 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헌납을 어전으로 데려와 극도의 소란을 야기하였나?”
“헌납이 이토록 무례한 자인줄은 몰랐사옵니다.”
“설령 잘 알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전으로 데려와 분란을 만든다면 문제가 되는 법인데, 사간은 대사간 다음으로 관청을 대표하는 자임에도 잘 알지도 못하는 자를 함부로 어전으로 데려왔군.”
“주,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 책임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
“물러가라.”
“마, 망극하옵니다.”
정철은 허리를 숙이다 못해 접어가며 극진한 예를 표하고는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렇게 어전이 비자 선조는 여전히 불쾌한 얼굴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한참이 지서야 선조는 입을 열었다.
“회의는 파하겠다. 각자 관청으로 돌아가 소임을 다하라.”
“예.”
중신들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하나둘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선조는 어좌에서 내려와 거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 * *
북촌 관광방.
흰 벽돌담이 인상적인 저택.
손님이 찾아왔다.
“간만이시로군요.”
“그, 금천부원군…….”
정철이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가신 채였다.
‘대략적인 상황은 전해 들었지만. 보통 배짱은 아니로군. 다른 왕도 아닌 선조 앞에서 그렇게 난동을 벌이다니.’
뭐, 그 결과로 이발은 투옥되었고 정철은 선조에게 찍혔다.
선조가 지랄 맞은 인간임을 알고서 벌인 일인 줄 알았는데 새파랗게 질린 걸 보면 아닌 모양이었다.
당하관이라 왕을 면대할 일이 적어 악명을 과소평가한 모양인데……, 괜히 누울 자리도 봐 가면서 다리를 뻗으라는 게 아니다.
‘덕분에 이발은 알아서 떨어져 나갔군.’
나는 공신 삭제 이슈를 잠재우라는 밀명을 받았다.
계기는 공의전의 다가오는 죽음. 발원지는 대사헌 이양원.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인 자들은 서인의 정철과 조헌, 마지막으로 동인의 이발.
공의전과는 합의했고 이양원은 굴복시켰다. 이제 양당의 시끄러운 주둥이들을 막을 차례였는데 정철과 이발은 자폭했다.
‘하지만 아직 공론이 잠재워졌다고 할 정도는 아니야.’
공신 삭제는 사림의 숙원이었다. 내가 전면에 나서면서 수습 단계에 들어섰지만, 동시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입만 막는다고 사람의 시선이 돌아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
때마침 발생한 정철과 이발의 자폭은 나에게는 호재였다. 이 일을 키운다면 공신 삭제는 묻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철이 도움이 필요한 티를 팍팍 내며 나를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알아서 홍시가 떨어지는군.’
나는 흐릿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지금은 사간원 사간을 지내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예……. 진즉에 찾아봬야 했는데 이제야 인사드려 송구합니다.”
“편하게 대해주세요. 이 사람과 사간 사이가 딱딱하게 격식을 차려야 할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뭐, 아쉬운 사람이 격식을 차리기 마련이다. 우리 사이가 남다르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보지 못해 거리가 멀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제 와서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태도를 싹 바꾼다면 멍청한 거지.
그리고 정철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이 지극히 아쉬운 상황에 처했음은 알고 있던가.
“아닙니다……. 금천부원군께서는 나라의 중신이시고 소관은 일개 사간인데 옛정만을 들어 어떻게 경망스럽게 굴 수 있겠습니까.”
“음, 알겠습니다. 사간께서 그편이 더 편하시다면 강제할 수는 없지요.”
“예에.”
“안으로 듭시지요. 귀한 손을 오랫동안 세워두었군요.”
정철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법 진중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대청 대신 사랑방을 찾았다.
마냥 이야기만 한다면 재미가 없겠지. 정철은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라 주안상도 봐오게 했다. 그의 입맛에 맞을지는 의문이지만.
술을 가리는 사람은 아니니까.
안으로 들어오자 은은한 온기와 바깥의 시원한 바람이 섞였다.
하석을 자처한 정철은 사랑방 내부를 신기하다는 듯 훑어보았다. 다녀온 곳이 많은 나의 방은 알게 모르게 특이하거나 이국적인 장식품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병풍을 등지고 상석에 자리하자 정철은 자세를 고쳐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나였다.
“회포를 푸는 것도 좋지만, 미안한 말씀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근심이 있으신 듯합니다.”
“……예. 사실은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말씀드렸듯 이 사람과 정 사인 사이가 보통 사이는 아니니까요.”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