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71화
58. 소인배들의 친구 (2)
“이 사람이 직접 나서야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이양원은 차마 답하지 못했다.
“대사헌께서 직접 찾아와주셨기에 기회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을 귀찮게 만드시겠다면, 송구하지만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양원 한 사람을 박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 그는 공론을 등에 업고 있다고는 하나, 천하무적은 아니다. 선조에게는 적신(賊臣)으로 규정되었고 나는 공신 전체를 대신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양원이 아니라 이양원 할아버지가 와도 죽는 수가 있었다.
과장이 아니다. 작정하면 죄인의 할아버지 따위, 손주를 잘못 둔 죄를 물어 무덤을 파헤치고 두 번 죽일 수도 있다.
“그대는 공신 전체는 물론 윗분도 적으로 만들었어요.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강제로 반성하게 만드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강제성이 더해지면 폭력이 수반되게 마련이지.
“어쩌시겠습니까? 기어코 이 사람의 기대를 배신하시겠습니까? 갈 데까지 가보시겠다면 기꺼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과정은 그대가 만들더라도 결과는 이쪽이 만들겠지만요.”
이어지는 압박에 이양원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치인에게 정치적 자살이란, 일신의 자살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는 것은 가죽이나 다름없는 몸뚱이뿐.
가볍게 자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야말로 인간은 현명해져야 한다. 한 사람의 이기적인 행위로 여러 목숨이 사라지는 수가 있으니까.
“대, 대감…….”
“결정하셨습니까?”
“하겠습니다. 쓰겠습니다. 전하께 글을 올리겠습니다.”
이양원이 처량하게 말하자 나는 서안을 밀어냈다. 서안에는 이미 필기도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요. 마음에 변하실 수 있으니 이 자리에서 글을 지으시지요.”
“……전하께 바칠 글을 짓는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재계하여 예를 다함이.”
“목욕재계야 원하신다면 이 사람의 누택에서도 할 수 있으십니다. 또 감히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전하께서도 대사헌의 목욕재계 여부보다는 글의 내용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실지?”
혹시라도 집으로 보냈다간, 마음을 고쳐먹을 수도 있거든.
그 정도면 양반이지만 이도 저도 못 하다가 대들보에 목이라도 맨다면 곤란해진다. 죽어도 소(訴)는 올리고 죽어야지.
“예, 예…….”
이양원은 결국 도망가지 못하고 글을 써내려갔다.
짬밥이 있어서인가. 자신의 죄를 밝히고 처벌을 자처하는 글이 일필휘지로 만들어졌다. 깨알 같은 크기의 글자에도 절도가 있어 명문이 따로 없었다.
먹물이 마를 동안 나는 입을 열었다.
“대사헌께서는 옳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도 분명 기뻐하시겠지요.”
“……예.”
“이 글이 공개되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사헌을 찾아 진심의 여부를 물어볼 겁니다. 앞뒤 사정을 재려 들겠지요. 충고 하나만 해드리겠습니다.”
“…….”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그 내막이 이 사람에게 전해진다면,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뭐든지 뒷정리가 중요한 법이지요. 이 사람은 기껏 치워놓은 난장판이 다시 어지럽혀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여, 염려치 마시옵소서.”
“그대가 이 사람을 실망시키지만 않는다면 금의환향(錦衣還鄕)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진심으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곧 벌어질 일을 마주하게 된다면 나를 감히 거스를 생각은 들지 않을 거다.
공의전에 이어 이양원까지 꺾였다.
하지만 공론은 발원지만 처단한다고 해서 바로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동서인 놈들도 이미 발을 돌리기에는 너무 먼 곳까지 갔다.
이제 와서 뜻을 거두게 된다면 위사공신은 비 온 뒤의 땅처럼 탄탄해지게 된다. 나아가 왕을 압박하려는 시도도 무위로 돌아가겠지.
좌절된 정치 행위는 언제나 역풍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과연 왕이 자신을 압박하려는 적신들의 행위를 청산 없이 지나가고자 하겠는가? 하다못해 다른 왕도 아니고 선조인데.
남은 떨거지들은 이대로 순순히 포기하지 않을 거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고 나 역시 이미 대응을 세워두었다.
나는 이양원에게 권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한 잔 하고 가시지요. 사양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이 사람은 배려심이 깊으니까…… 하하.”
나의 웃음에 이양원은 멋쩍게 웃었다.
말과는 달리 나는 그다지 배려심이 깊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다.
을룡을 시켜 한 쌍의 술상을 마련한 뒤 나와 이양원은 각자의 잔을 채웠다.
이양원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잔을 받들고서 나의 말을 경청했다.
“이 사람이 그대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어서 소(訴)를 쓰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공의전과 전하께 오늘날의 소란이 폐가 되기 때문에 진정시키려는 것이지요.”
“아,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하관들을 통제하지 못한 것, 그리고 공론에 부합한 것에 죄를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헌부의 젊은 관리들은 언제나 사나운 법이며 사람은 이익 앞에서 항상 초연할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요.”
“소관은 사헌부의 장관이니 하관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 맞습니다……. 또 대사헌으로서 냉정하지도 못했지요.”
이양원은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먼저 이해의 뜻을 보여주니 그 역시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전형적인 소인배였을 뿐이지 특별히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이 귀한 줄은 안다는 점에서는 나의 마음에 들었다.
“이 사람이 당장 대사헌을 배려하겠다 약조했어도 진심으로 믿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 아닙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금천부원군 대감이신데…….”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법이지요. 대사헌께서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 사람에게 보여주셨으니 이 사람 역시 행동으로 보여야 이치에 맞을 겁니다.”
나는 문갑을 열어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족히 사람의 주먹만 한 크기의 주머니는 내용물의 무게로 인해 축 늘어져 있었다.
돈처럼 확실한 것은 없었다. 입금과 지출은 존중의 표현이고 정당한 대가의 지불이다.
내용물이야 이양원도 짐작했겠지만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크겠지. 하지만 내 앞에서 당장 열어보기는 힘들 터이므로, 나는 배려심을 발휘해 주머니를 먼저 열어주었다.
“……!”
문에 바른 한지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지극히 흐렸음에도 주머니 안의 쇄은은 스스로가 광원이라도 된다는 듯 밝게 빛났다.
순도 99% 이상의 고순도 은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마저도 하나하나가 손가락 마디만한 굵기였다. 주머니 속에서 몇 개만 꺼내도 북촌에 기와집 저택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나는 술과 안주가 채 식지도 않은 주안상 위에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꽈르륵.
굵은 금속 덩어리들이 협판 위로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부 대사헌의 것입니다.”
“……마, 망극하옵니다.”
이양원은 신줏단지 모시듯 주머니를 받든 채, 정성스러운 손길로 입구를 닫은 뒤 상의 안쪽에 집어넣었다.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일은 없으니.
술자리가 이어지고 이양원은 거나하게 취하면서도 주머니가 품속에 고이 있는지 틈틈이 확인했다.
거금이 품 안에 있는데 잘 간수해야지.
자리가 파하자 이양원은 올 때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태도로 만족한 채 저택을 떠났다.
믿을만한 머슴을 붙여 뒤를 밟게 하니, 이양원이 제 발로 승정원에 소(訴)를 바쳤다는 소식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 * *
좌우 대신들이 시립한 가운데, 도승지 박계현(朴啓賢)이 대사헌 이양원의 사직소를 낭독했다.
공의전의 더 이상 공신 삭제를 언급하지 말라고 언서(諺書)로 못을 박은 데다 처음 공론을 만들었던 이양원까지 사직하자, 어전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금천부원군은 왕명을 받들어 도성으로 돌아왔으며 4대의 공신 및 그 후손들과 회합을 가진다는 초유의 사건을 일으켰다.
평소의 선조라면 고이 용납하지 못했을 일이건만 금천부원군은 너무나도 태평히 일을 저질렀고 선조도 언급이 없었다.
게다가 영의정과 좌의정까지 회합에 참석했다.
눈치 빠른 중신들로서는 보통 상황이 아님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 반사적인 태도에 선조는 생각이 많아졌다.
‘금천부원군에게 너무 힘을 몰아주게 된 건 아닌가?’
고작 늑대를 물리치려고 안방에 호랑이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조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거나 중차대한 일을 책임져야 할 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앞세워 왔다.
이순신 역시 오늘날 처음으로 선조에게 이용된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종계변무를 성사시키고자 임지에서 불러내서 썼다. 최근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있던 그를 임기가 다하기도 전에 불러들였듯이.
그리고 원하는 바가 이뤄질 듯하면…… 생각을 달리하곤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나라를 거의 구원하여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이순신을 위협으로 느끼고 숙청해버린 것처럼.
공신 삭제의 일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지만 선조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완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평소의 선조답게 배가 불러서 딴생각을 품게 되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군. 이대로는 필시 금천부원군의 입지가 커질 터이니…… 미리 다음 직책을 정해주디 않아서 다행이로구나.’
명목상 이순신의 직책은 여전히 함경도의 병마절도사였고, 여기 도성에서의 실권은 하나도 없었다.
나아가 이미 그를 대신할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임지로 떠났으니, 이순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임기는 다시 쓰일 여지도 없이 하루하루 닳아가고만 있었다.
곧 품계만 남은 무직자가 되겠지.
이대로 방치해도 무방하겠으나 귀환과 함께 단숨에 조정의 중심으로 등극한 금천부원군을 무직 상태로 둔다는 것은 노골적인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실직은 미리 채워두고 한직이 빈다면 아껴둘까…….’
이미 금천부원군은 명나라에서 돌아온 직후 마땅한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한 품계 낮은, 그것도 지방직을 지냈으나 선조는 그것을 배려해야 할 이유로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더 이용해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이해했을 뿐.
자기편을 만드는 재주라고는 추호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감각은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만행에 금천부원군이 내심 불만을 품거나 분노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금천부원군이 진실로 충신이라면 군말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선조의 귀결은 언제나 답정너였다. 자신의 지랄과 독선을 군말 없이 받아주면 충신이요 아니면 적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선조의 발상과는 별개로, 금천부원군은 내막을 알게 된다면 기뻐하리라.
선조가 자신을 견제한다는 짓이랍시고 고작 한직이나 맡기려는 것과, 자신에게는 이래도 된다며 여전히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금천부원군은 선조의 착각과는 달리 고작 한직을 맡긴다고 좌절될 인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실직이 없는 것을 기뻐하며 정치공작에 집중하겠지.
또한 비수는 경계 받지 않을 때 가장 치명적인 법이다.
선조는 감각은 있을지언정 통찰력은 없는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