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170화 (17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70화

58. 소인배들의 친구 (1)

안동부원군 권철의 저택.

나는 좌우에 영의정 권철과 좌의정 홍섬을 낀 채, 맞은편에 자리한 공신과 공신 후손들을 향해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겠습니다. 제공(諸公)들도 공의전(恭懿殿)께서 친히 작성하신 언서를 조정에 내리셨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여기저기에서 짧은 긍정의 대답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의전의 뜻을 거슬러 공신의 삭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실로 침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물론 몇몇 분들께서는 위사공신의 정당함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공의전께서 마다하시고, 전하께서 언급하지 않으시는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가당한 일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함 확보다.

입장을 표명하지도 않았고 책임을 지기도 지독히 싫어하는 선조만 단독으로 내세웠다면, 명분도 빈약하고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컸지만.

공의전이 협조한 이상 명분은 이쪽에 있었다.

“하다못해 공신의 거취를 정하더라도 우리 공신들이 정함이 마땅합니다. 범인(凡人)들이 공연히 떠들어 공신을 삭제한다면, 어찌 공을 세운 신하를 존중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

“나아가 뭇 사람들은 위사공신의 존재가 인종대왕의 존재를 부정한다지만, 누가 감히 인종대왕을 부정한단 말입니까?”

이에 좌의정 홍섬이 나섰다.

“금천부원군의 말씀이 옳네. 이 사람 역시 위사공신의 자손이지만, 인종대왕께서 승하하셨을 당시에 대왕의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종묘를 증축하자고 건의한 사람이 바로 나였네.”

당시 홍섬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있었다.

인종이 훙하고 명종이 즉위했을 당시 때마침 종묘가 만실이 되었고 홍섬은 판서 윤개와 함께 증축을 청했다.

윤개 역시 위사공신 이등으로 영평군에 봉해진 자.

또 홍섬이 차마 민망하여 자기 입으로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인종대왕께서 훙하셨을 때 명종대왕께 효제(孝弟)를 자처하도록 하여 상하를 분별케 한 사람이 인성부원군 문희공(文僖公)이 아닙니까?”

문희(文喜)란 홍섬의 아버지 홍언필의 시호였다.

“또한 문희공께서는 인종대왕의 종묘에도 배향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뭇 범인들이 공연히 위사공신이 불충하였다는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려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이는 공신 전체를 욕보이는 만행일 뿐만 아니라, 인종대왕과 명종대왕 사이의 절친하였던 우애를 우롱하고, 명종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전하께 폐가 되는 만행입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위사공신의 삭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조정을 어지럽히는 적신(賊臣)이자 소인배라는 뜻이다.

“만일 조정이 간사한 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알고서도 방관한다면, 어찌 스스로나 부친, 조부가 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세간의 오해를 사더라도, 여기 자리한 사람들은 종묘와 사직에 충성하고 나라와 전하께 봉사한 자들이며, 또 그러한 자들의 후손이니 범연히 떨치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위사공신의 일은 공신 전체의 일이다. 이들을 공격하는 것은 우리 전체를 공격하는 일이다. 나아가 왕과 종묘사직에 불충한 일이다!

자리에 참석한 공신들의 얼굴에 진지함과 결의가 깃들었다.

안 그래도 공신 삭제의 여론이 들끓어, 위사공신이건 다른 공신이건 내심 불안해하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서거나 집단행동을 시도했다간 조정 전체의 적이 될지도 몰라 그저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다르다. 내가 구심점이 되어 4대의 공신을 한데 묶고 명분을 세우니 그림이 달라졌다.

“만일 삭제해야 할 공신이 있다면, 고작 서장관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과분하게 공신이 되어 봉군까지 되었는데 근신하기는커녕 도리어 언성을 높여 선배 공신들에게 죄를 따져 묻는 자일 것입니다.”

삼등 광국공신 한산군 이양원(李陽元)!

이에 맞은편에 자리한 젊은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맞습니다! 자신도 공신이면서, 어찌 다른 공신들을 공격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고작 의문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한 번 낸 목소리는 파문이 되어 주변으로 퍼졌다.

“자격 없이 공신이 되어, 공을 세워 공신이 된 자들을 시기하고 멸시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공신 전체에 대한 배신입니다!”

“당장 이양원의 죄를 따져 묻고 공신과 군호를 박탈해야 합니다!”

“아니오! 고작 공신과 군호를 박탈하는 정도로는 종묘사직을 어지럽히고 조정의 질서를 농단한 죄를 청산할 수 없소이다!”

사림 출신인 공신들보다, 훈구파의 후손으로 알게 모르게 설움을 당하고 살았던 공신 후손들이 더욱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소란을 잠시 즐기고는 늦지 않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제공들의 의사가 이 사람의 뜻과 부합하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떠들기만 해서는 종묘사직과 조정을 농단한 이양원의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내가 권철을 바라보니, 권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복을 시켜 문방사우를 준비하게 했다.

곧 두꺼운 권자와 필기도구가 준비되었다. 나는 한쪽 권자를 풀어 서안에 놓고는 모두의 앞에서 서명한 뒤 입을 열었다.

“옳고 정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성취되는 일은 없습니다. 모름지기 소인배가 공론을 농단할 때는 의인들이 목소리를 합쳐 함께 따져 묻는 것이, 공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자, 한 사람씩 나와서 서명하시지요.”

나는 종이를 넘기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고 넘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앞에 나와야 한다면, 그런 얄팍한 수작은 부릴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한 번 이름을 올리게 되면 원컨 원하지 않든 뜻을 합치는 수밖에 없다.

호랑이의 등에 타게 되었으니.

몇몇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크겠지만 영의정 권철과 좌의정 홍섬이 나서서 모범을 보이니 감히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직하게 시간이 흐르고 족히 일백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권자에 새겼다.

“우리는 길일에 맞춰 명단을 제출하고 공신 전체가 감히 종묘사직을 농단하고 조정을 농단한 적신 이양원의 죄를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대들의 정당한 결의에 이 사람이 모두를 대표해 감사를 표합니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4대 공신과 그 후손들의 서명이 함께 적힌 명단이다. 이 정도면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왕도 병신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 실력행사는 서두르지 않는 편이 좋겠지.

아무리 자기가 시킨 일을 수행하기 위함이라도, 내가 가진 힘이 커진 걸 의식하게 된다면 부담을 느낄 테니까.

이양원도 어지간하면 알아서 설설 기겠지.

하다못해 명분이라도 끝까지 그의 편이라면 모르겠으나 공의전마저 못을 박아놓은 마당에 억지를 부린다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럼에도 공론이 자기편임을 믿고서 버틸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멍청한 놈은 아니었으면 좋겠군.

이양원 외에도 꺾어야 할 사람이 많았다. 서인의 정철이 그러했고 동인의 이발이 그러했다.

미쳐 날뛰는 인간 중에는 조헌도 있지만. 선조도 못 말리는 이 또라이를 내가 어찌할 방도는 없다.

이이를 극렬히 추종하는 자라니 이이를 시킨다면 알아서 길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나는 바쁜 몸이었다. 이양원 상대로는 충분히 고생이 많았다. 이쯤에서 알아서 고개 숙여주지 않는다면 실력행사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이틀 뒤.

“어르신.”

을룡이 방문 너머에서 찾았다.

“무슨 일이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대사헌입니다.”

대사헌이면, 이양원인가.

권철의 저택에서 회합을 가지고서 결정한 바가 마침내 놈의 귀에도 닿았나보다.

버티지 않고 찾아온 걸 보면 역시 겁은 난 모양이군. 부디 기껏 찾아와서 개소리나 늘어놓지는 않아야 할 터인데 말이야.

“방으로 들라고 해.”

“알겠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오래지 않아 누군가 맞은편에서 인사했다.

“소관 대사헌 이양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금천부원군 대감.”

“들어오세요.”

“예.”

-끼익

경첩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50대 초반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깡마른 체구에 염소수염이 특정적인 자였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내가 마련한 방석에서 무릎을 꿇어 자리했다.

아무리 내가 정이품 대신이라고는 해도 손윗사람이 보여주기에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다. 하지만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공신 전체를 적으로 돌렸는데.

이래도 목이 뻣뻣하면 그 뻣뻣한 모가지를 쳐달라는 뜻밖에 더 되겠는가?

‘그렇게까지 멍청한 놈은 아니어서 다행이군.’

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편히 앉으셔도 됩니다, 대사헌.”

“아, 아닙니다. 소관은 이대로가 편합니다.”

그래야 할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사헌께서 이 사람을 직접 찾아오실 줄이야.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사람의 지금 처지가 대사헌과 가까이 지낼 상황은 아니어서요.”

“아, 알고 있습니다.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소관으로 인해 노고가 많으시다고…….”

“하하하.”

나는 가볍게 웃고는 답했다.

“이 사람이 노고를 하고 있다 생각해주시니, 대화가 잘 풀릴 것 같군요.”

이양원은 꼴깍 침을 삼켰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봐야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만, 공신 삭제는 사헌부에서 처음 언급한 것은 맞지만 소관이 먼저 시작한 일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사헌부의 공론을 전하께 말씀드렸다지요.”

“예.”

“당시에는 조심스러우셨던 이유가 있었을 텐데요. 그런데 어찌해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당당하게 여론을 선동하고 다니신 겁니까?”

“서, 선동이라니요. 아닙니다.”

이양원은 질색하며 변명을 이어가려 했으나, 나는 그의 영양가 없는 변명이나 들어줄 정도로 무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한 분이 무척이나 불쾌해하고 계십니다. 누구인지는 직접 말씀하지 않으셔도 될 테고. 이 사람이 할 짓이 없어서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도성으로 돌아온 게 아닙니다.”

“예, 예. 바쁘게 해드려 죄송할 뿐입니다.”

“알고 계시다면 대사헌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협조만 해주신다면 일신이나 가정에 위해가 가는 일을 없을 겁니다.”

“…….”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따르지 않으면 일신과 가정에 위해가 가도록 해주겠다는.

이양원은 여전히 질린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나 같아서도 이렇게 세고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협박 같은 과격한 수단을 통해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는 아니다. 단지 내가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에 금이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공신 회합의 좌장이 되었으니. 사실상 공개적으로 정계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거의 이미지를 언제까지고 고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중적인 인사라는 악평만 쌓겠지.

조금은 솔직해질 필요도 있었다.

“전하께 청을 올리세요. 최근 저지른 죄악을 참회하고 있으니 공신과 군호를 박탈하고 직을 면해달라고 말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뺏겠다는 소리였다.

그마저도 자기 손으로 쳐내라는 것이니, 이양원에게는 정치적으로 자살하라는 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겠지.

과연.

“대, 대감…….”

이양원은 처량한 목소리로 자비를 빌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