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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69화 (16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69화

57. 역량 총동원 (4)

“과연 금천부원군이라도 지금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억지를 부리지 않을 자신이 있소? 설령 가능하더라도 나의 처지를 겪어보지 못한 이상 그것이 진심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요.”

“……왕대비 마마.”

나는 어렵사리 운을 뗐다.

“과거 소윤이 인종대왕과 대윤을 해친 이유는 저들의 세상을 이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실로 간악한 자들이었소.”

“오늘날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림은 소윤을 몰아낸 자들이외다. 그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소.”

“아닙니다. 같습니다. 권력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

“왕대비 마마의 통한을 이용하여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고 이미 좌절시킨 적들의 마지막 흔적마저 지우려고 하는 것이, 위사공신 삭제의 본질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모두 사악한 것은 아니지만, 천성이 흉악하고 저열한 자들은 항상 권력을 좋아하더라.

그것은 설령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와 왕실조차 팔아먹었던 소윤을 상대로 맞선 사림이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다.

과연 사림이 고통 받는 나라와 왕실을 구원하고자 소윤과 맞선 것이었나?

아니다.

사림은 훈구와 철저하게 분리되는 존재가 아니다. 어느 사림도 훈구와 혈연이나 학연에서 무관할 수 없다.

사실상 권력의 이인자였던 자들이 일인자인 훈구파를 몰아내고서 빈자리를 차지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사림이 오늘날 철저하게 훈구파의 흔적을 지우려는 이유는, 훈구파가 몇 번이고 사림을 탄압하고 축출했음에도 철저하지 못해 자신들에게 세상을 빼앗겼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

“왕대비 마마. 소관이 바라는 것은 위사공신의 보전이 아닙니다.”

공의전의 시선에 의문이 어렸다.

“위사공신을 삭제해서는 안 된다기에 보전하자는 줄로 알았소. 하지만 보전하자는 것도 아니라면 금천부원군께서는 무엇을 바라신다는 말이오?”

“위사공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을 내리더라도 전하께서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옵니다.”

“……그래서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겠다는 거요?”

“꼭 결정을 내려야만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옵니다.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신하들이 위사공신의 일에 대해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지 모르겠소.”

“이미 대처할 방안을 생각해두었습니다.”

공의전을 찾기 전에 권철을 만나 공신들을 모두 소집하도록 명령해두었다.

달리 말하면 공의전의 의사가 어떻건 공신들을 소집할 생각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능하기로 명성이 높은 금천부원군이라면 필히 대단한 방도를 생각해두었겠지요.”

“오직 왕대비 마마의 의사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나는…….”

공의전은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모두 나라와 선조를 위한 일이라지만, 나라와 선조는 그녀에게 해준 게 없다.

꽃다운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공의전에게 먼저 떠나간 지아비를 찬탈자로 만들었으며, 선조는 그런 그녀를 골칫덩이라 생각하고 오랫동안 외면해왔다.

이제와서 관심을 주는 이유는 공의전이 공신 삭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일 뿐. 개인적인 처지나 처우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왕족과 신하 된 자의 의무란 왕과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라지만, 일방적인 충성이란 있을 수 없다.

“왕대비 마마의 마음은 소관이 잘 압니다. 그럼에도 찾와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어, 소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공의전은 답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자신에게 이러냐는 듯.

“왕대비 마마께서 소관을 도와주신다면, 소관은 왕대비 마마의 한을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위사공신을 삭제하지 않고도 어떻게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단 말이오?”

“단지 공신만 삭제해봐야 그들은 언제까지고 인종대왕과 왕대비 마마께 원한만 품을 뿐이지, 진정으로 반성할 일은 일절 없습니다.”

“…….”

“오직 행동과 정성만이 그릇된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릴 수 있는 법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오?”

“예.”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냉정하게 말해 오늘날 위사공신의 후손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처지였다.

위사공신은 훈구파 핵심 인물로서 사림을 축출하고 숙청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이다. 그들을 만들어준 훈구파 세상에서는 훈장이었을지 몰라도, 사림 세상인 지금에서는 낙인이나 다름없었다.

위사공신 후손들 중에서도 삭제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존재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자신은 지난 을사사화와는 무관한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달리 말하면 위사공신 후손들도 어떻게든 청산은 원하고 있다는 뜻이지.’

공의전이 용서의 기회를 준다면 기꺼이 응할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알려주시오. 방도가 무엇이오?”

“위사공신들은 단지 명종대왕에게 충성한 자들이니, 근본적으로 왕에게 충성한 것을 잘못으로 몰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대신 선대왕인 인종대왕과 공의전께 지극한 무례를 끼쳤으니, 후손들이나마 돌아가며 효릉(孝陵, 인종의 무덤)에서 상복을 입고 묘지기를 자처하여 예를 표한다면 능히 속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겠소?”

“원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이옵니다. 왕대비 마마께서는 위사공신의 후손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는 다릅니다.”

공의전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잠이라도 자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즈음 공의전이 다시 눈을 떴다.

그녀는 한결 편해진 어조로 말했다.

“좋소이다. 위사공신의 후손들이 그렇게 속죄를 해준다면 나는 그들을 용서해 주겠소. 또 위사공신의 삭제에 대해서는 전하를 위해 되도록 언급하지 않도록 조정에 언서(諺書, 한글로 쓴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소.”

“왕대비 마마……. 오늘 일은 소관이 각골난망하겠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일방적인 은혜를 내린 것이 아니라, 위사공신들의 속죄를 약속 받고서 그대의 뜻을 받아준 것이오. 그것을 잊으시면 아니 되오.”

“물론이옵니다. 위사공신의 후손들은 대대로 효릉에서 봉사하며 조상의 죄를 갚을 것입니다.”

“좋소…….”

공의전은 눈을 감고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붕 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내가 기운을 많이 써서 피곤하니, 금천부원군께서는 이만 돌아가셔도 좋소. 언서(諺書)는 늦지 않게 조정에 전해질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예. 그럼. 소관은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만일 인종대왕께도 그대와 같은 충신이 있었다면…….”

공의전은 흘리듯 중얼거렸다.

충신이라.

나는 그저 예만 표한 채 침소에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복도로 나오니 궁인들은 말없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극진한 예의 표현이었다.

비록 공의전이 언성을 높일 때만 하더라도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는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의 원한을 풀어주게 되었으니.

나는 궁인들에게 가볍게 묵례한 다음 교태전을 빠져나왔다.

가까스로 공의전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약속한 대로 언문이 조정에 전해진다면 여론은 흔들릴 거다.

물론 신하들이 공신 삭제를 주장하는 이유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다. 공의전의 편지만으로 대세가 완전히 바뀌지는 않겠지.

그래서 실력행사가 뒤이을 거다.

명분을 등에 업은 실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 * *

며칠 뒤.

권철의 저택에는 대청은 물론 뜰에 임시로 세워진 평상까지 더해 족히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했다.

일반적인 자리라면 집 주인인데다 자리를 주재하였으며, 현직 영의정이기까지 한 권철이 상석을 차지해야 마땅하겠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금천부원군 대감, 이런 자리에는 그대보다는 내가 상석에 자리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권철이 나의 바로 오른편 자리에서 속삭였다.

“이 자리가 탐나십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 금천부원군은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서는 편이 아니었잖나.”

“한동안은 그랬지요.”

선조와 조정의 이목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적인 자리 외에서는 공공연히 나서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권철의 건강도 예전만은 못하다. 그는 나를 대신해 오랫동안 서인의 영수 중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제삼당의 바지사장으로 기능해왔다.

그런 그가 세상을 등진다면 조직은 흔들리게 될 터.

늦지 않게 나의 존재감을 부각하여 진정한 제삼당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야 했다.

그런데 때마침 공신 이슈로 조정이 시끄러운 참이었고, 여론을 뒤집을 자리가 마련되었다. 막 북방에서 돌아온 내가 존재감을 드러내기에는 최적이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언제 이 사람이 모습을 보여주겠습니까. 그리고 안동부원군께서도 건강은 생각하셔야지요.”

“흠흠……. 아쉽군.”

“배가 부르셨습니다.”

“갈 때가 되어서 아쉬움이 늘었을 뿐이네.”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드리죠.”

사적인 대화는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자세를 고치고 오른편에 앉은 좌의정 홍섬을 향해 예를 표했다.

“좌상 대감. 바쁘셨을 텐데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의정 안동부원군 대감께서 참석을 부탁하셨고……. 또 공신과 공신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는데 이 사람이 안 빠질 수는 없지.”

홍섬은 위사공신 이등 익성부원군 홍언필(洪彦弼)의 아들이며, 정국공신 삼등 여원군 송질(宋軼)을 장인으로 두고 있었다.

대가 멀어져 공신 당사자들이 빠짐없이 세상을 등진 이 시점에서, 위사공신과 정국공신을 동시에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맞습니다.”

“음, 그런데 금천부원군께서는 그새 북방에서 돌아오셨군.”

그는 아직 정이품에 불과한 내가 자리를 주재한 권철을 제치고 상석에 앉은 모습에 당혹한 눈치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권철이 나에게 공손한데 제삼자가 무어라 하겠나? 게다가 공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흥공신과 광국공신으로 두 번이나 일등 제일인이 된 내가 상석에 앉은 게 마냥 억지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홍섬에게 기울여 조용히 답했다.

“전하께서 부르셔서.”

홍섬은 일국의 좌의정이며, 금상은 성격 더럽고 지랄쟁이에 미친놈이며 의심암귀로 유명한 선조였다.

때마침 내가 왕명을 받들고 도성으로 돌아와 이런 자리의 상석을 차지하는 것이 그냥 벌어진 일은 아님을 알고 있을 터였다.

최대한 협조해주겠지.

“음.”

홍섬은 이해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나는 대청과 평상에 자리한 공신, 공신 후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중흥공신 일등 제일인, 광국공신 일등 제일인 금천부원군 이(李)로. 자리를 마련해주신 영의정 안동부원군 대감의 추대를 받아 상석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인사드리겠습니다.”

작게 허리를 숙이니 좌우와 맞은편에 자리한 사람들이 깊게 허리 숙이며 예를 표했다.

현직 영의정과 현직 좌의정이 자리를 마다하고 좌우에서 나를 지키고 있는데, 누가 감히 거스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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