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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68화 (168/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68화

57. 역량 총동원 (3)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 나서줘야 하는 분이 한 분 계시옵니다.”

나의 말에 선조가 불안한 듯 물었다.

“누구지? 나인가?”

“아니옵니다. 신이 도움을 청하려는 분은 왕대비 공의전입니다.”

“공의전……. 그래. 공의전이 이런 시기에 단호하게 대처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금천부원군에게 협조하겠는가?”

위사공신에 임명된 자들은 명종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을 인정받아 공신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명종은 자연스럽게 왕이 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위사공신들은 그 이유를 명종에게 적대하는 세력의 존재, 대윤과 사림에게서 찾았다.

당시 대윤이 지지하던 자는 선대왕인 인종이었다.

위사공신의 존재는 곧 인종을 찬탈자나 다름없게 만들고 있었다.

과연 인종비인 공의전이 자신의 지아비를 여전히 찬탈자로 남기고 싶어할까?

창창한 나이에 지아비를 잃고서 과부가 된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졸지에 조정과 왕실의 적이 되어 그동안 쥐죽은 듯 살아야 했다.

어쩌면 명이 다하는 이 순간 남은 것이라곤 죽더라도 오명을 씻고자하는 열망일지도 몰랐다.

“신하들을 진정시키지 않음을 좋게 생각할 수는 없지만, 먼저 공신을 언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공의전은 이 순간 시끄러운 적신들보다는 자신의 위치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음…….”

“공의전을 만나 설득하고 싶사옵니다. 만일 공의전이 직접 목소리를 내어준다면 오늘날 입만 산 적신들의 세가 크게 꺾일 것이옵니다.”

“그런 일이라면 마땅히 윤허하겠다.”

“신은 전하의 부름을 받아 다급히 조정으로 돌아왔으니, 신이 공의전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대외에 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옵니다.”

“알아서 처치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선조에게 볼일은 끝났다.

예를 표하고 물러나려는 순간.

“예전의 금천부원군은 성실하고 원리원칙에 맞는 말만 했지.”

“……설령 신 스스로는 반기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전하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라면 마땅히 감안하고 희생하여야지 않겠사옵니까.”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선조는 실망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이러한 변화가 마음에 든 듯 했다.

“계속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에게 충성하라.”

“예. 각골명심하겠나이다.”

선조는 나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는 듯했다.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 * *

잠시 후.

경복궁 교태전.

교태전(交泰殿)은 본래 왕비, 즉 중궁을 위한 공간이나 지금은 공의전이 쓰고 있었다. 할머니가 안방을 차지한 셈이지만, 그녀의 건강이 무척이나 좋지 않은 지금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예법에 충실한 조선이라 할지라도.

솟을대문을 넘어 뜰에 들어서니 지긋한 나이의 상궁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금천부원군 대감이십니까?”

왕을 호종하는 궁인들과는 달리, 공의전을 호종하는 궁인들은 나를 본 적이 없음에도 단번에 신상을 알아 맞췄다.

참으로 신기한 노릇.

하기야 높으신 분들 수발을 들려면 보통 눈치가 아니어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오늘은 공의전을 뵈러 왔습니다. 긴히 드릴 말이 있으니, 폐임을 알지만 안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

건강이 좋지 않은 공의전에게 머리 아픈 일을 안겨다주는 것은, 나나 그녀를 모시는 궁인들에게나 반가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적으로 공의전을 배려해주기에는, 그녀는 이번 사건에서 너무나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상궁은 착잡한 표정이었으나 곧바로 발을 돌려 교태전으로 향했다.

몇 명의 궁인들이 지키고 선 복도를 지나니 주변이 점차 더워졌다. 위독한 병자가 있으니 최대한 한기가 들지 않게 하겠다는 조처인가.

“공의전은 이곳에 계십니다. 소란을 피울 수는 없으니, 먼저 들어가서 금천부원군 대감의 방문을 알리겠습니다.”

“예. 서두르실 필요 없으십니다.”

상궁은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대화가 끝나자 문 좌우를 지키고 선 궁녀들이 소리 없이 문을 열었고, 상궁은 좁은 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방문을 알리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궁은 금세 돌아와 이만 입장해도 된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입구 좌우를 지키고 선 궁녀들은 나를 의식해서인지 보다 문을 넓게 열려고 했으나,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내비치고는 몸을 틀어 문간을 넘어섰다.

“…….”

내부에는 노년의 여인이 얼굴만 내놓은 채 숨만 쉬고 있었다.

비쩍 마른 얼굴은 세심히 살펴보지 않아도 병자의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분명 삶의 최후의 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며, 괜히 신하들이 이 시점에서 유난을 떠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의전은 천천히 돌리더니 눈을 반개하며 말했다.

“그대가 금천부원군이시오?”

“그러하옵니다.”

“나라의 대들보와 같은 자라는 명성은 익히 들었소. 하지만 이제야 내가 그대의 얼굴을 보게 되는구려.”

“미리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할 뿐입니다.”

“……그대가 보낸 약재들을 잘 받았소. 약방 제조도 상품(上品)의 약재라며 자랑을 하더이다. 마음 같아서는 덕분에 쾌차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으나 빈말을 하기에는 병세가 지극히 위중하니 이해주기를 바라오.”

“개의치 마시옵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막상 본론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선조를 의식하여 오랫동안 위사공신의 삭제를 먼저 언급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공의전의 상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의전은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공무가 다망하실 금천부원군께서 다 죽어가는 나를 찾아온 이유는, 고작 얼굴이나 익히기 위함은 아니겠지요.”

“……송구하옵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하시오.”

공의전은 운을 띄우고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설령 어떤 이야기라도, 지금의 나는 화를 내거나 그대를 책망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니.”

어쩌면 그녀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외지로 떠났던 대신이 임기가 다하기도 전에 돌아와, 휴식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자신을 방문했으니.

더군다나 대동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그녀에게 긴히 전해질 이야기라고는 선조의 진심뿐이리라.

공신 삭제에 대해서.

나는 씁쓸하게도 공의전의 짐작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

“오늘날 공신 삭제의 일이 크게 논란이 되고 있음은 공의전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과거의 일을 바로잡는 것은 물론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금천부원군께서도 알고는 계시군요.”

“물론입니다. 다만,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 있다면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을 바로잡고자 현실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겠지요.”

공의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반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어쩌면 노려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최후를 향해가는 이 순간, 마지막으로 바라는 일을 저지할 생각이냐며.

원망해도 좋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라고 오늘날에 처한 상황이 스스로 원한 것이겠는가.

단지 나 역시 마찬가지일 뿐이다. 공의전의 명이 다 해 가는 것도, 이때다 싶어 공신 삭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신하들도, 어떠한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아 나에게 지금의 사태를 떠넘긴 선조도.

내가 원해서 그리 행동한 게 아니다.

그러니…….

“공의전께서는 이 나라의 왕대비이십니다.”

“나에게 책임감을 물을 생각이시오?”

“몇몇 위치는 애석하게도 한 사람만을 배려하기에는 너무나도 막중한 위치입니다.”

“전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듯 한데.”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도 위험해질 수 있는 말을 태연히 하는 걸 보니, 공의전은 확실히 목숨에 대해서는 초연해진 듯했다.

목숨을 포기한 사람은 이익에 개의치 않게 된다. 바라는 일이 있다면 오직 숙원이 완성되는 것뿐.

실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공의전께서 전하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건, 지금의 지위가 가진 역할과 중요성이 희석되지는 않습니다.”

“결국은 나에게만 책임감을 강요하시겠다는 말씀 아니오, 금천부원군?”

“오늘날!”

나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힘있게 운을 띄웠다.

공의전은 반개한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마치 자신에게 큰소리 칠 상황이냐는 듯.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공의전께서 이렇게 되신 이유는 인종대왕께서도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지하지 못하셨기 때문이지요.”

인종은 즉위 후 고작 8개월 만에, 상을 치르다 몸이 약해져 죽게 됐다.

문정왕후와 다른 문종의 지지자들이 그러한 상황을 방조하기는 하였으나 쇄약사를 자처한 사람은 누구도 아닌 인종이다.

“지금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소, 금천부원군?”

금방이라도 눈을 감고 세상을 뜰 것 같았던 공의전이 거친 목소리로 따졌다.

하지만 고작 공의전의 화나 돋우자고 한 말이 아니다. 아직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아무리 선대왕을 잃은 슬픔이 크다고 한들,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삭이지 못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내버려 둬서는 안 됐습니다!”

나는 기꺼이 공의전에게 ‘들으라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마음고생을 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셨던 공의전께서도, 어찌 똑같은 행동을 하려 하십니까?”

“…….”

“지금 위사공신을 삭제하자는 자들이 진심으로 인종대왕과 공의전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리라 생각하십니까?”

내가 따져 묻자 공의전은 답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이제 와서 위사공신의 삭제가 언급되는 이유가 신하들이 왕을 견제하기 위함임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또 선조가 조정을 장악한 사림 전부와 맞설 수 없음을 알기에, 위사공신을 삭제해줄 것이라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과 인종과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랐겠지.

“설령 공의전께서 바라시는 대로 위사공신이 삭제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필요에 의해 이용되었을 뿐이지요.”

“명예가 회복되지 않소!”

“공의전께서는 지금 하시는 말씀이, 진실로 그렇기 때문인지, 혹은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인지 냉정하게 판단하셔야 할 겁니다.”

“내가 아무리 늙은 여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린 금천부원군이 가르치고 들 정도는 아닌 듯하오.”

“지금 위사공신을 삭제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 중에서 인종대왕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대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그들이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건 결국은 공의전을 기만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렇게 순진한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위사공신을 삭제하게 힘을 보태 달라는 자들은, 공의전은 물론 도리어 인종대왕의 명예마저도 이용하고 있음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공의전은 잠시 침묵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다면 지아비와 지아비를 지지해주었던 사람들을 모두 앗아간 자들에게는 어떻게 복수해야 한단 말이오?”

공의전은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빛이 흐려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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