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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67화 (167/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67화

57. 역량 총동원 (2)

사랑방에 들어서서 각자 자리에 앉자 권철이 입을 열었다.

“위사공신 삭제 때문인가?”

“알고 계셨군요.”

“금천부원군께서 임기가 다하지 않은 채 교지를 받고 조정으로 올 일이란, 공신 삭제 이외의 이유가 없지.”

“안변부사를 대동한 이유가 있었군요.”

내가 도움이 필요함을 진즉 알고서 데려왔다는 뜻이다.

서로 돕고 살자는 좋은 취지로 벌인 짓이겠지만, 약삭빠른 행동을 보니 정치인은 역시 곧 죽어도 정치인이었다.

“금천부원군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천수가 많이 남지는 않은 듯해서.”

“이해합니다. 책 잡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른 사람도 아닌 안동부원군과 이 사람 사이인데 그깟 배려 하나 못 해주겠습니까.”

“참으로 고맙네.”

“아닙니다. 안변부사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끝내기로 하지요. 이 사람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을 당면하고 있어서요.”

“그래.”

권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전하께서는 금천부원군에게 공신 삭제의 일을 떠넘겼겠지?”

“맞습니다.”

“곤란하게 되었군. 전하께서도 금천부원군이 곤란해지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남의 염병이 자기 티눈보다 못하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으신 분 아닙니까?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하하.”

권철이 힘없이 웃었다.

내가 없을 동안 영의정으로서 선조 곁에서 많이도 고생했을 권철이다. 선조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놈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금천부원군이라면 그새 방책을 세웠을 법도 한데.”

“이 사람이 천재입니까. 전하를 뵌 지 며칠 되었다고 벌서 방책을 마련하게요?”

“금천부원군이 머리를 맞대고자 나를 부르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평소의 금천부원군은 고민을 나누는 것보다는 명령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그동안 이 사람이 안동부원군 대감을 곤란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나 보군요. 예, 예상이 맞으십니다. 같이 고민이나 하려고 안동부원군을 모신 건 아니에요.”

“역시.”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듯 작게 웃는 권철이었다.

나 역시 가볍게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공론이 만들어지는데 대사헌 이양원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헌부에서 처음 공신 삭제의 일이 언급됐다니까요.”

“맞네.”

“이양원은 공론에 협조한 편입니까, 아니면 방조한 편입니까?”

그가 주범인지 혹은 떠밀리게 됐는지에 따라 접근방법이 달랐다.

권철이 답했다.

“처음 그가 어전에서 위사공신 삭제를 언급했을 때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지.”

“방조로군요.”

“당시에는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여론이 생기고 공론이 부합하니, 이제는 정신 못 차리고 공신을 삭제하자는 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네.”

태세전환인가.

참으로 팔자가 좋았다. 분명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겁을 먹은 주제에, 세상이 자기편인 것 같으니까 눈이 돌아간 거다.

“고작 대사헌 혼자서 짖어댄다고 만들어질 공론은 아닙니다. 분명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서인에서는 조헌과 정철이 대표적이네.”

“성질 더러운 인간 둘이로군요.”

정철이야 서인 강경파로 유명한 자였다. 역사적으로도 동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한 사건인 기축옥사를 주도한 자가 아니었던가.

조헌은 젊었을 적의 이이를 잇는 공인 미치광이로서, 왕 앞에서도 도끼를 흔들며 상소를 받아달라고 지랄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몇 년 전 예조 좌랑을 마지막으로 사직하고서 지금은 낙향한 상태인데…….

권철이 그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놈은 선조가 자기 말을 안 들어주면 삐져서 낙향해 놓고는, 자연인 상태에서도 나랏일에 사사건건 끼어들었다.

선조가 한 미친놈 하는 놈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인데도 이따위 간 큰 짓거리를 하는 걸 보니, 선조 이상으로 미친놈일지도 모르겠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기로는 유명합니다만, 정작 영수인 박순은 언급되지 않는군요.”

“지금은 쉬는 중이네. 작년 가을에 잘하던 좌의정을 내려놓고 영중추부사를 지내고 있지. 이런 시끄러운 상황에 끼어들 필요도 없고.”

“현명하군요.”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들이 이상한 것이지, 딱히 현명하지 않아도 정신만 똑바로 깃들어 있다면 이런 때에 나서지는 않을 걸세.”

“맞는 말입니다. 요즘 것들을 얼마나 겁 대가리가 없는지. 편하게 살아와서 등 따시고 배부른 게 거저 주어지는 혜택인 줄 안다니까요.”

“……음.”

나의 한탄에 권철은 멋쩍게 웃었다.

“뭐, 냉정하게 말하면 이 사람도 안동부원군과 같은 선대 사림의 노고 덕분에 수월하게 관문에 들어선 편입니다만.”

권철은 명종대도 아닌, 무려 중종대 권신인 김안로와 맞섰던 사람이었다.

을사사화 시기 소윤과 맞섰던 사림들보다도 선대라 할 수 있었다. 정계 족보로 따지자면 이 시대의 사림들에게 권철은 조부 레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손 뻘인 내가 권철을 맞은편에 앉혀놓은 채로 지금 세대를 철부지라고 하고 있으니.

우습기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아닐세, 금천부원군은 지금의 사림들과는 같은 줄에 놓을 수 없는 사람이지.”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어쨌거나, 서인 영수인 박순은 조용히 있다니 다행이로군요. 동인은 어떻습니까?”

“동인의 영수라고 한다면 역시 이산해겠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예전보다 어렵게 지내는 중이지.”

“왜요? 이 사람이 이산해를 광국공신 일등으로 만들어주었는데.”

“물론 금천부원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산해는 지금쯤 낙향했을 걸세. 단지 한 번 시험 받은 지도력을, 다시 굳건하게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닐 뿐이네.”

이산해가 운하를 반대했다가 역풍 맞고 대판 깨진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는 건가.

심의겸 상대로 불타서 대대적인 정쟁 상태만 만들지 않았더라도 타격은 훨씬 적었을 텐데.

필요 이상으로 서인들과 반목했다가 역풍을 크게 맞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산해를 대신해 영수 행세라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특히 이발(李潑)의 목소리가 세지.”

이발이라면 동인의 영수였다가 기축옥사 때 노모와 아이까지 고문 끝에 죽게 된,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유명인이라면 유명인이었다.

“그가 어째서 힘을 잡게 된 겁니까?”

“분당 이후에 이조 정랑을 지냈네. 자기 사람을 요직에 많이 꽂았으니, 당연히 동인 내에서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운이 좋았군요.”

“더는 아닌 것 같네. 지금 공신 삭제로 동인 내에서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내는 자가 바로 이발이거든.”

“노골적으로 자기편을 만들어놓고는 사리지도 않는다는 말입니까? 약간은 겁을 내는 편이 일신의 안녕에 도움이 될 텐데.”

“겁 대가리가 없나 보지.”

“하하하…….”

지금 행보를 보아하니 괜히 선조에게 찍힌 게 아니었다.

“좋습니다. 덕분에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좀 알게 되었군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일세.”

“한 가지 일만 더 도와주십시오.”

“무엇인가?”

“공신들을 소집할 겁니다. 주범인 이양원은 자신 역시 공신이면서, 다른 공신을 삭제하자는 말을 주도적으로 꺼냈으니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책임감이 크지 않은 듯합니다.”

“알겠네. 내가 사람을 모으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공신의 범위는 어느 정도로……?”

나의 사람들은 중흥공신과 광국공신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권철이 궁금해하는 것은 앞선 공신들의 참석 여부였다. 때마침 말하려던 바였으므로 나는 기꺼이 답했다.

“위사공신과 정국공신의 후사들도, 협조할 수 있는 자라면 불러들이십시오.”

“팔십 년이나 지난 정국공신의 후사들이 지금 도성에 얼마나 남아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삭제의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는 위사공신들도 말인가?”

“이 일을 최대한 키울 생각입니다. 또, 정국공신이 멀다고는 하나 위사공신들과의 연결이 많으니까요.”

대표적으로 현 좌의정 홍섬이 그러했다.

그의 아버지는 위사공신 이등인 홍언필(洪彦弼)이었고 외조부가 정국공신 일등인 류순정(柳順汀)이었다.

이러한 그가 때마침 좌의정이라는 막강한 지위를 지내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또 나에게는 다행이었고.

“일을 너무 크게 만드는 건 아닌가?”

권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대규모의 공신들이 모인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살아있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주인이 누구이겠는가?

당연히 중흥공신 일등 제일인이자 광국공신 일등 제일인인 나다.

혼자서 4대의 공신과 공신 후사들을 거느리게 되었으니, 고작 하루 이틀의 일이라도 왕에게는 굉장히 위협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지금 나를 크게 의식하고 있는 선조를 자극하고도 남는 일이다.

권철은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 가서 밝히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이미 양해를 구했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권철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젖었다.

누구에게 양해를 구했으며 허락을 받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으니.

“……!”

선조는 내가 공신을 집합시키는 것보다도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공신 삭제의 일을 더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이다.

나의 운신의 폭이 넓어졌으니.

이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지위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줄 수 있게 되었다.

권철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길일은 언제로……?”

“일단 명단만 작성해서 회합에 소집할 사람들을 확보해주세요. 나중에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알았네.”

“먼저 볼 일이 있습니다.”

지금 공신 삭제에 대한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만, 지금 그들이 유난히 지랄하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상황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인종비 인성왕후, 현 공의전(恭懿殿)의 건강이 극도로 안 좋아졌다.

공신 삭제에 찬성의 목소리를 내어주면 큰 힘이 되어줄 그녀가 위태하니 삭제 여론을 주도하는 자들에게는 오늘날 같은 호기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나 역시, 공의전에게 볼 일이 있었다.

* * *

며칠 뒤, 경복궁.

오늘은 공의전을 방문하기 위해 입궐하였으나 그전에 볼 사람이 있었다. 나라고 바라는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실의 다 죽어가는 어른에게 문안을 가려는 데 어떻게 왕을 안 만날 수 있겠는가.

허락도 받아야 했고, 선조라는 인간이 외부인이 허락도 없이 공의전과 같은 고위 왕족과 만나는 것을 반길 사람도 아니다.

“전하.”

선조는 천추전에 있었다.

그는 평소 나를 의식하고 견제하며 도움을 청하면서도 지랄도 하는 미친놈에다 또라이지만, 지금은 절실한 입장에 처해서인지 제법 온화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왔나, 금천부원군.”

“인사 올리옵나이다.”

“맡긴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믿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동안 공신을 삭제하라는 목소리가 한 층 더 커졌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신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오늘도 그 일환으로 전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사옵니다.”

“보고할 일이라도 있나?”

“전하께서 윤허해 주신 대로, 공신들을 모으게 되었사옵니다. 그들이 함께 입을 맞추어 한목소리를 낸다면 아무리 기세 좋은 자라 할지라도 과거를 의식하지 않겠사옵니까.”

조광조의 죽음이라던가.

“지금 공신 삭제를 공공연히 떠드는 자들이라고 과거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겠지. 그들이 쉽게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당하신 하교이시옵니다. 때문에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 나서줘야 하는 분이 한 분 계시옵니다.”

“누구지? 나인가?”

별말 없었거늘 은근히 불안한 어조로 묻는 선조였다.

그는 내가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암중에서 얼마나 바삐 뛰더라도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곤란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에게 떠넘기지 않았나.

나 역시 그에게 기대하는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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