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66화
57. 역량 총동원 (1)
“전하.”
나는 운을 뗐다.
도망칠 수도 없는 시련을 마주했다. 누군가는 힘든 일을 마주하면 즐기라고 한다. 하지만 즐길 수 있는 부류의 일은 아니다.
생사를 걸고 역량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다.
“말하라.”
짧게나마 놈의 마음에 어울려주어서일까. 아쉬운 처지에 처했음에도 도리어 높았던 언성이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좋은 신호였다.
“뭇 신하들이 진심으로 충성하지 않고 전하를 곤란하게 만드니, 신 역시 지극히 불쾌하고 안타깝게 여깁니다.”
“…….”
이번에는 맞장구치지 않는 선조였다.
놈에게도 당면한 문제는 있었다. 화풀이만 도와주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고작 그 정도를 위해서 나를 부른 것도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말을 이었다.
“신은 미욱하고 근신하는 마음이 심하므로, 감히 전하의 마음을 멋대로 짚을 수 없으니 진정으로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모르옵니다. 부디 신에게 원하시는 바를 하명해주시옵소서. 일신을 초개로 여기는 한이 있어도 충심으로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뤄낼 것이옵니다.”
“음.”
선조는 짧게 침음했다.
신하에게 대놓고 밀명을 내리는 일은 달갑지 않다. 자신이 아쉬운 처지에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니.
하지만 나는 말이라도 받아두어야 했다.
그가 원하는 방향을 내가 정확하게 알지 않고서 멋대로 짚어가며 행동한다면,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선조에게 찍히는 수가 있으니까.
이미 찍힌 상태지만.
더 찍힐 필요는 없잖은가?
어차피, 내가 경성에서 일할 때도 그는 쇼맨십을 위해 나에게 밀명을 내렸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과연.
선조는 입을 열었다.
“지금 적신(賊臣)들이 위사공신의 삭제를 공공연히 떠드는 이유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적신(賊臣).
사실상 자신의 적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한 셈이다.
책임은 지지 않겠지만, 내가 그들을 공격하더라도 무방하겠지. 한결 운신이 편해졌다.
나중에 말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감안해야겠지.
선조는 말을 이었다.
“금천부원군은 적신들의 행위로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명을 받드옵나이다.”
“그래.”
선조는 만족한 듯 짧게 대답하고는 물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이러한 공론이 발생한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 원인만 제거한다면 공론은 반드시 파도 앞의 모래처럼 무너질 것입니다.”
“지금 신하들이 평소보다 목소리 높여 공신 삭제를 떠드는 이유는 공의전(恭懿殿)의 병세가 지극히 심각해진 탓인데, 이를 어떻게 제거한다는 말인가?”
마치 공의전을 제거하기라도 할 거냐는 투였다.
딱히 문제 삼을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공의전은 자신으로 인해 지금 상황이 벌어진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터.
그런 그녀를 해치고 싶지는 않다.
다른 방법만 있다면.
“소위 공론이라 함은, 여러 사람이 같은 생각을 했기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누군가 앞장서서 공공연히 입에 올렸기 때문입니다.”
“흠. 맞다.”
“이제 자신이 입에 담은 말이 여러 사람의 지지를 받아 공론이 되었으니, 누가 시작했는지 신은 모르겠사오나 분명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터이옵니다.”
“금천부원군의 판단이 정확하다. 공신 삭제를 가장 먼저 입에 담은 곳은 사헌부였다. 대사헌인 이양원은 지금 물 만난 고기처럼 설치고 있지.”
이양원(李陽元)인가.
접점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에 대해서라면 조금은 알고 있다.
본관은 전주.
정종, 현 공정왕(恭靖王)의 현손. 남의 족보야 알 바 아니라지만 결정적으로 이 인간은 명종 18년 종계변무사 서정관으로 참석했다.
내가 종계변무를 성사했을 때 당시의 공훈을 인정받아 광국공신 삼등에 책록되고 한산군(漢山君)이라는 군호도 받았다.
모를 수가 없지.
‘그런데 위사공신을 삭제하자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
자기도 공신이면서 왜 공신을 때리나?
미친놈이 따로 없다.
물론 사헌부를 시끄럽게 만드는 놈은 대사헌이 아니다. 짖어대는 것은 대체로 품계 낮은 하급 관리들이다.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하지만 대사헌이 사헌부의 장관이고 얼굴 마담인 이상, 설령 이양원이 물꼬를 튼 게 아니라도 책임소재는 분명히 있었다.
‘자기 몸보신 하나 못하고 아랫놈들에게 잡아먹히는 주제에 장관은 무슨 장관이란 말인가? 덜떨어진 놈.’
고작 이런 놈이 군호를 달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들도 우습게 보이는 거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전하, 사헌부에서 처음으로 언급이 되었다면 설령 이양원의 주도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도, 그는 대사헌으로서 사헌부의 장관이고 소속 관리들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으니 오늘날의 불충과 무능에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대사헌은 여러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아 기세등등하기가 나를 능멸할 정도이니, 어떻게 해야 벌을 줄 수 있겠는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기탄없이 말해보라.”
“위사공신 앞의 정국공신(靖國功臣)도 한때는 사림에 의해 삭제가 논의된 적이 있었던 줄로 아옵니다.”
조광조에 의해서.
결국 그는 공신들과 그들의 훈구파 당여들에 의해 대대적인 역풍을 맞고 유배를 당한 뒤, 배소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여기에 조광조를 기용하고 성장시켜주었던 중종이 가담한 이유로 배신이다, 손절이다 등의 평가가 있지만.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데 협조한 백 명의 공신들을 치자고 한다면 응할 왕이 어디 있나? 왕에게는 자기 손발을 자르고 그들을 적으로 만들라는 소리인데.
중종이 조광조를 기용한 이유는 훈구파에게 경쟁자를 만들어주어 충성과 지지를 강화하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조금 이뻐해 줬다고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고자 자신을 지금의 위치로 올려준 왕과 그의 지지자들을 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자살 시도인 거다.
‘그건 대사헌 이양원도 마찬가지지.’
선조는 내 말을 이해했다.
“이양원이 큰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 하지만 오늘날은 정국공신의 삭제가 논의되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당시에는 조광조를 위시한 사람이, 조정을 장악한 훈구파와 공신들을 치는 형세였다.
지금은 과연 선조의 말마따나 다르다.
공격을 하는 이양원도, 공격을 받는 공신들도 사림이다.
적대 당파를 밀어내고자 벌이는 정치공세가 아니기 때문에 정당성과 여론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과거 공신과 훈구파가 그러했듯 조광고와 사림을 쥐 잡듯이 잡는 일은 어렵겠지.
하지만.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은인이며, 해를 끼치는 사람은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이양원은 자신도 공신이면서 전하는 물론 다른 공신들을 업신여겨 오늘날의 일이 벌어지도록 협조, 또는 방조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흠.”
“허락만 해주신다면 신이 다른 중흥공신과 광국공신들을 모아 오늘의 일을 논의하고, 이양원이 전하께 얼마나 불충하였는지 알리고자 하옵니다.”
“……나의 의사가 있었다고 직접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떻게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거다.
물론 예상했던 바다.
“전하께 불충하고 불의한 자를 치죄한다고, 신이 전하께 불충하거나 불의한 행동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나의 장담에 선조는 안도한 투로 답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신들을 소집하건, 다른 무슨 일을 하건 금천부원군 그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의와 이유를 잊지 않는 한 나는 최대한 용인하겠다.”
“망극하옵니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금천부원군을 믿고서 긴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니, 마땅히 잘해내리라 믿는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신은 언제나 전하의 안위와 평안만 걱정할 뿐입니다.”
“……가라.”
선조는 짧은 명령으로 자리를 파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선조는 그런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걱정거리가 많이 남았다는 듯 방향성 없이 눈만 뜬 채 서안만 두드릴 뿐.
궁인들이 좌우에서 열어준 문 너머에서 나는 선조에게 머리를 숙였다.
-드르륵.
문이 닫히고 나는 발을 돌렸다.
* * *
며칠 뒤.
“오셨습니까, 안동부원군 대감.”
나는 권철부터 불렀다. 거의 2년의 세월은,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권철에게는 특히나 영향이 컸다.
“돌아오셨군, 금천부원군.”
목소리에는 힘이 없고 눈동자는 탁하다. 여생이 길어보이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약하거나 주저하는 모습은 없다. 설령 이 순간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권철은 오래전부터 의식하고 있던 인생의 걱정거리를 다 해소한 뒤였다.
자신이 죽고 난 뒤 인물이 없어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던 안동 권씨.
이제는 내가 있다.
유능한 후사라고는 못하겠지만 막내 권율도 권철이 죽기 전, 대과로나마 급제했다.
정적이었던 좌의정 오겸으로 인해 잃었던 권력도 되찾았다. 아니, 더욱 강해졌다.
나를 대신해 서인 내의 제삼당을 이끌고 있는 그는, 명백하게 서인의 영수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동안 웃는 낯으로만 대하지는 못했지만.’
그나 나나 서로에게 여한은 없으리라. 다만 나는 권철이 죽더라도 나에게 입은 은혜는 갚고 죽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함께 오신 분은?”
권철은 초면의 손님을 대동한 채였다.
권철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나에게 손님을 소개했다.
“권벽(權擘)이라는 사람인데, 마지막으로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지냈네.”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금천부원군 대감.”
쉰 정도 되었을까. 지극한 나이였지만 일흔을 넘기고 예순을 향해가는 권철 옆에 서니 한참은 정정해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변부사.”
“예.”
짧게 인사가 끝나자 권철이 어렵게 입술을 뗐다.
“권벽은 최근 안변부에서 돌아왔네. 하지만 임기 때문은 아니고……. 부사가 직접 설명해주겠나?”
“알겠습니다.”
권벽은 응하면서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말을 꺼내기 어려워했던 권철의 태도도 보아, 고작 나와 안면이나 트고자 데려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미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귀찮게 되었으나 불쾌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권철이 나에게 빚을 지게 되면, 나의 일을 돕게 만들기 쉬워질 테니까.
“말씀하세요. 나와 안동 권가가 보통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소관이 안변부 부사를 지내고 있을 당시 함경도 순무어사가 파견된 적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허봉(許篈)이 순무어사를 수행했지요.”
제삼당 당여들인 허엽의 아들이자 유희춘의 제자로, 나의 임지인 경성까지 찾아와 부친과 조정의 분위기에 대해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조정이고 함경도고 별다른 일이 없어 가볍게 회포만 푸는 형세가 되었지만, 아는 사람을 경성에서 손님으로 맞기란 흔한 일이 아니어서 그런대로 즐겁게 지냈다.
“그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불미스러운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예……. 송구하옵게도. 당시 안변부에 기근이 들어 증전미(蒸田米)를 백성들에게 풀었는데, 때마침 방문한 순무어사가 그것을 조정에 보고하는 바람에.”
“음.”
증전미(蒸田米)는 밭벼를 쪄서 말린 것으로, 쌀이 귀한 함경도에서는 예산확보를 위해 모아서 엄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을 납부하지 않고 사사로이 백성에게 풀었다니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푼 것인지, 단지 빼돌리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는지, 혹은 사실대로 말하기 부끄러워 돌려 말한 것인지는 알아봐야겠지만.
“부사의 곤란한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이 사람이 적절하게 도움을 드릴 터이지만, 지금은 중차대한 일이 있어서.”
“그, 그렇습니까.”
권벽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은 임기가 다하지 않은 채 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중차대한 일을 이행하기 위해 안동부원군을 부른 것이고요.”
집안사람인 권벽의 일로 곤란해하던 권철은 때마침 내가 돌아와서 부르자, 이때다 싶어 데려왔나 본데 지금은 그를 신경 써줄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안동부원군과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소관은 금천부원군 대감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중차대한 일임을 알아서인지 권벽은 더 이상 시간 끌지 않고 먼저 저택을 나섰다. 그렇게 나와 권철만 남게 되자, 나는 사랑방 안쪽으로 권철을 안내했다.
“듭시지요. 막 사정을 알려드린 대로 가벼운 일은 아닙니다.”
권철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함께 사랑방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