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65화
56. 고향의 시험 (4)
선조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들라 하라!”
윤허가 떨어지자 편전 내시가 왕명에 응하시라는 듯 물러났다. 앞으로 한 발 자국 나아가니 입구 좌우를 지키고 있던 젊은 내시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드르르륵
고대하던 상황의 시작의 알림이로군.
열린 문 너머로 선조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초췌한 인상이었으나 눈만큼은 맑았다.
하지만 정신이 맑은 사람으로서 눈이 맑은 게 아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안광이 형형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지.
그 먹이가 지금 나라는 사실은 그리 재미있지 않다.
“왔나, 금천부원군?”
“교지를 받든 직후 최대한 서둘렀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왕이 부른다면 설령 발이 없는 자라도 기어서 와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금천부원군은 두 발이 멀쩡히 달려있는데도 시일이 제법 지체되었군.”
미친놈.
“후임 병마절도사가 도착할 때까지 국경지대의 안전을 위해 조치를 하느라, 바로 출발하지 못하였사옵니다.”
“그게 금천부원군에게는 정당한 이유인 건가?”
“공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소인에게 중임을 맡긴 나라에 봉사하고 전하께 충성하는 일이라 생각했사옵니다.”
“그대가 봉사하고 충성해야하는 대상이 나이지, 국경이 아니야!”
선조는 언성을 높이며 따졌다.
“만일 그대가 진심으로 왕에게 부합하고 충성하는 자라면, 내가 불렀을 때 어떠한 일이라도 뒤로하고서 바로 도성으로 떠났겠지!”
새로운 개념의 충성을 제시하는 선조였다.
하기야 놈에게 조선이란, 설령 왕이 책임을 다하여 가꾸고 길러야 할 나라라도 자신에게 충성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기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는.
그래서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서 살려하지 않았나?
다 망해가던 나라를 이순신이 겨우 살려놓자, 그의 명성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백의종군시키지 않았나.
놀랄 것도 없는 발상이다.
놈은 한결같이 미친놈이었고, 그래서 대응이 오히려 편한 면도 있었다.
“……어심을 헤아리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하지만?!”
선조가 어찌 감히 왕에게 변명할 수 있냐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멋대로 단정짓기 전에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어찌 신하가 감히 왕의 마음을 헤아리려 들 수 있겠사옵니까.”
시끄럽던 선조가 일순 닥쳤다. 해명을 계속 해보라는 듯이.
“신이 무지할지라도 무례는 범하고 싶지 않아, 감히 전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최소한의 공무는 이행한 것이옵니다. 부디 이러한 신의 근신하는 태도를 알아주시옵소서.”
허리를 깊게 숙이며 청했다. 철저하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니,
“…….”
선조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명나라에서도 품계를 받아 설령 왕이라도 쉽게 대할 수 없게 된 내가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이다.
물론, 이미 다른 마음은 한참 전에 골백번이고 더 품었지만 선조가 관심법이라도 펼치겠는가.
내가 겉만이라도 굴복하고 굴종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조금은 안심하게 되겠지.
물론 그 병적인 정신상태로는 다시 의심하게 되겠지만.
“크흠.”
선조는 짧게 헛기침하고는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라.”
“명심하겠나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짦은 침묵.
선조가 나를 부른 이유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는 신하에게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금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보채지 않고서 가만히 기다렸다. 너무 늦지 않으면 좋겠군. 이러한 나의 배려를, 오히려 왕을 우습게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길어진다면 적당히 물러나는 척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금천부원군은.”
다행스럽게도 선조는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하명하시옵소서.”
“그대는 최근 조정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을 아는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제 돌아와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음.”
선조는 짧게 침음하고는 말을 이었다.
“뭇 제신들이 위사공신을 삭제하기를 바라고서 공론을 만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털어놓듯 말하는 선조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럴싸하게 운을 띄울 수 없었나.
하기야 왕이나 되는 놈이 하급자가 임기가 다하기도 전에 불러들여서 도움을 구하고 있다. 어떻게 아쉬운 티를 안 낼 수가 있겠는가?
명령이니 까란 대로 까라고 해도 결국에는 내가 아쉬우니 도와달라는 소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래도 선조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나에게 판단을 물었다.
“금천부원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귀찮은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가 아쉽지만, 아쉬운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한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판단을 물어보지만,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불쾌해하고 화내고 원망하겠지.
일반적인 경우에서 이런 놈이 상관이라면 제끼고 올라가는 방법이라도 있지. 선조는 왕이라서 제낄 수도 없다.
……아직까지는.
지금은 맞춰줘야 할 때였다.
“공신을 삭제하는 일이라면 지극히 중차대한 일로 생각하옵니다.”
“그래서 내가 금천부원군의 생각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냐? 공론이 시끄럽지만 왕으로서 가벼이 판단할 수 없으니 그대와 같은 중신의 의향도 들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거지, 언성은 왜 높여?
이놈이 악질적인 이유는 자기가 아쉬운 상황에서 도리어 지랄을 한다는 점만이 아니다.
위사공신 삭제의 일에 내가 목소리를 낸다는 건, 사실 나에게는 굉장히 불리하고 불합리한 일이다.
공신을 보전하자고 하면, 내가 공신이기 때문에 공신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잃지 않고자 선배 공신들을 보전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지금 위사공신의 삭제를 주장하는 자들이 동서인 가리지 않고 지금의 조정을 장악한 사림 전체라는 점이다.
위사공신을 보전하자고 했다가는, 자칫 이들 모두를 적으로 돌릴지도 몰랐다.
이치에 맞지도 않고 명분도 없는데 자신의 이익만을 보전하고자 모두와 척을 지게 되는 셈인데, 명확하게 ‘정치적 자살’이라 표현할 수 있는 짓이다.
반대로 내가 공신을 삭제하자고 하면 그만인가?
‘아니지!’
자신도 공신이면서 다른 공신을 우습게 여긴다는 말이 나올 터였다.
물론 공론이야 삭제를 주장하지만, 공신을 삭제하게 된다면 다른 공신들의 권위도 손상된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 한 번 공신을 삭제해버리면 나중에는 선례를 빌미 삼아 언제라도 공신을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공신 삭제를 주장하는 것은 다른 공신들을 적으로 만드는 행위다.
그런데 지금 공신들이 누구인가?
나에 의해 만들어진 중흥공신과 광국공신들아다. 하다못해 정적도 아니라, 모조리 내 편인 자들이었다.
스스로가 원컨 원치 않건, 중흥공신과 광국공신으로서 권위를 지킬 생각이라면 각각의 공신을 탄생시킨 나를 공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신을 삭제하자는 짓은, 나와 같은 편이자 지지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공격하고 배신하는 행위였다.
물론, 내가 그들을 공신으로 만들어주었으니 조금 손해를 입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그따위 순진한 발상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
결과적으로 위사공신 바로 앞인 정국공신(靖國功臣) 삭제를 주장했던 조광조가 어떻게 되었던가? 뒤지게 다굴 맞고서 유배당해, 배소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런데도 선조 이 새끼는 나에게 판단을 미룬단 말이지?’
선조가 또라이에 쓰레기고 사이코패스이긴 하지만 정치적 감각이 없거나 멍청한 건 아니다.
분명 나의 처지에서는 공신 삭제를 왈가왈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터임에도, 대놓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 의도는, 내가 어느 쪽으로도 판단을 내린다면 그것을 공공연히 떠들어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건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를 부른 거 아니겠나?
자신은 조금의 정치적 이익도 잃을 생각이 없으니, 내가 대신해서 모두의 적이 되거나, 스스로 팔다리를 자르는 꼴이 되어도 본인은 알 바 아니니까?
‘생체 쓰레기 같으니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와 저열함을 응축한 다음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내면 그게 선조일 거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
“…….”
후.
나 역시 공신 삭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에는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이었으므로, 시원한 답변을 내놓기는 어려웠다.
이용당할 게 분명했으니까.
물론, 선조가 나를 부른 이유는 이용하기 위함이니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다. 선조 역시 인내심이 많은 자는 아니다.
의심까지 많으니 내가 순진하게 이용당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면 바로 보복하겠지.
‘일단은 이 쓰레기가 원하는 말이나 내놓아야겠군.’
선조가 불쾌해하기 전에 나는 서둘러 답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은 어찌하여 공론이 공신 삭제의 일을 논하는지 모르겠사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전하께 필요한 일이라면 응당 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셨을 터인데, 어찌하여 공신 삭제와 같은 중차대한 일을 신하된 자들이 먼저 언급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흥!”
선조는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내 말이 바로 그것이다. 어찌 이 나라의 조정에는 왕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냐?!”
선조는 성토하듯 말을 이었다.
“이 시점에서 위사공신의 삭제를 공공연히 언급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불충이고 반역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대신, 선조는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서안을 요란하게 내려쳤다.
-쾅!
좁은 집무실에서 폭음이 터지니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고막이 웅웅 울었다. 하지만 선조는 여전히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대고 있었다.
사실 신하들도 어련히 눈치없는 짓을 저질렀다.
놈들도 많고 많은 지원자들 중에서도 검증되고 엄선된 자들이다. 발상이 멍청할 수는 있어도 타고난 두뇌마저 멍청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정계생활을 해본 자라면 무엇이 자신의 보신에 유리한지 알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위사공신 삭제라고?
선조는 위사공신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된 명종의 후계자였으며, 동시에 훈구파를 척결하고 독립된 자신만의 인재풀을 갖고자 조정을 사림으로 채운 자였다.
그런 그의 앞에서 위사공신 삭제를 떠들어댄다는 것은 어떻게든 선조를 곤란하게 만들어보겠다는 발상 이외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물론 사림 입장에서 위사공신은 자신들을 학살하고 축줄한 원수들이며, 어떻게든 청산해야 할 자들이었다.
공신 삭제에 큰 힘을 보태줄 인종비 인성왕후, 현 공의전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상태라면 더더욱 급하겠지.
하지만 선조가 또라이라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을 터였다.
‘분명 이 개또라이 쓰레기를 조련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나 본데.’
이 개또라이 쓰레기께서는 언제나 그랬고, 또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듯 절대로 자신이 선택하여 스스로 손해를 볼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 희생당할 가능성이 높았고, 그 희생자로 내가 선택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은 없었겠지.
위사공신을 보전하여 모두의 적이 되느냐, 혹은 삭제하고서 함께 공신이 된 자들을 배신하고 그들의 적이 되느냐.
어느 쪽이건 나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동서 양당 입장에서는 여전히 자연인인 나에게는 당적을 확실하게 만들 계기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자기편을 안 만들고 배길 수는 없을 테니까.
‘역시…….’
도성에는 쓰레기 같은 놈들 천지다.
서로 뒤통수 칠 생각만 하고 있지.
하지만 선조나 양당의 중진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쓰레기통에서 단지 운이 좋아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