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64화
56. 고향의 시험 (3)
공의전(恭懿殿).
인종비 인성왕후가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인성왕후는 죽은 뒤에 받은 시호이고, 지금은 공의(恭懿)라는 존호에 전(殿)이라는 존칭을 붙여 불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인성왕후는 오래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중신들이 함께 문안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중신들이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은 인성왕후가 쾌차할 수 있느냐가 아니었다.
왕실의 어른이 편찮으시다니 찾아가 문후를 여쭌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위사공신(衛社功臣)들의 위훈 삭제를 지지받아야 하니…….’
위사공신이 뭐하는 놈들이냐.
명종 즉위년과 치세 2년 차 두 번에 걸쳐 벌어진 을사사화-정미사화를 통해 대윤과 사림을 정계에서 축출하고 공신에 임명된 소윤들이다.
하지만 열흘 붉은 꽃 없고 권력은 십 년을 가지 못한다던가?
소윤의 천하는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죽자 함께 무너졌다.
명종은 문정왕후가 주도한 정책을 폐기하고 자신만의 정치를 시작하려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죽고 선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선조는 고작 십대 중반의 나이였고 제왕학도 교육받지 못했으며, 얼떨결에 왕이 되었으나 정치적 감각만큼은 타고난 자였다.
그는 자신이 정계에서 닳고 닳은 훈구파 늙은이들과 어울려서는 그들의 꼭두각시 신세를 벗어나기 힘듦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래서 훈구파와 손을 잡는 대신 그들과 맞섰던 사림을 대거 기용했다. 문정왕후 사후 끈 떨어진 연이 된 데다 왕에게도 찍힌 훈구파는 사실상 소멸하고 조정은 사림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 세력 교체 과정에서 인성왕후의 입지가 이상해졌지.’
을사사화-정미사화를 통해 대윤과 사림을 축출하고 공신이 된 소윤은, 녹훈의 근거를 명종 옹위에서 찾았다.
자신들이 명종을 잘 모셔 그를 방해하는 세력을 무찌르고 왕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거다.
소윤에게는 쏙 마음에 드는 명분이었을 거다.
명종을 왕으로 만드는 데 공이 있다 함은, 달리 말해 명종은 자력이나 자연스럽게 왕이 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에 왕이 된 명종은 공신들에게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 되며, 왕이 머리가 두꺼워져 숙청을 시도한다면 배은망덕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위사공신들이 자신들을 공신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문종이 자신들 도움 없이는 왕이 될 수 없었을 이유로 대윤과 사림을 꼽았다.
이로 인해 대윤이 지지했던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는, 졸지에 명종에게 가야 했을 왕위를 앞서 차지한 찬탈자가 되어버렸다.
자.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선조의 정통성은 명종에게 있다. 그리고 명종은 위사공신들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위사공신을 삭제한다면,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주고 족보상 아버지가 된 명종의 은인들을 배신하는 셈이다.
명종에 대한 패륜은 말할 것도 없다.
선조에게 위훈삭제란 자신의 정통성 원천인 부왕 명종에 대한 패륜에 더해 그에게서 이어지는 자신의 즉위 정당성까지 해치는 초특급 자해인 셈이다.
그러나 선조의 지지기반은 사림이다.
사림에게 소윤은 불구대천의 원수다. 선조는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을사사화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로 인해 을사사화를 통해 공신이 된 자들의 정당성이 자연스럽게 부정되었다. 위훈삭제의 근거를 스스로 마련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위사공신의 삭제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조가 자기 보신을 위해 지지기반인 사림을 배신하는 꼴이 된다.
‘절대권력을 이룩하려는 선조로서는 어느 쪽도 고르기 힘들지.’
이런 상황에서 위훈삭제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인종비 인성왕후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지.
사림들로서는 인성왕후가 죽기 전에 지지를 받아 위훈삭제를 이뤄내고자 최대한 애쓸 수밖에 없었다.
선조도 그것을 느꼈을 테고.
‘그러니 이런 타이밍에 나를 불렀다는 것은…….’
복잡한 상황에 처한 자신의 구원투수로 나를 낙점했다는 것이 된다.
만약 선조가 아닌 다른 왕의 요청이었다면 나서서라도 맡을 중임이다. 왕에게 빚을 지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과거의 위사공신과 같은 입장이 되는 셈이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지금의 왕인 선조는 미친놈이고, 자신의 권력 강화에 방해된다면 나라에 이익이 되는 자는 물론 같은 편조차도 숙청하는 사이코패스라는 점이다.
‘자신이 왕이 되는데 도움이 되어주고, 떨거지들이 빨대 꽂으려는 시도도 차단해준 전 영의정 이준경마저 제 손으로 쳐냈으니.’
이놈이 명종의 위치에 있었으면, 문정왕후조차 뒤주에 가둬서 강에다 처박았을 거다. 자기 왕 노릇에 방해된다고. 임오화변은 애들 장난이 되었겠지.
그걸 못 해서 대신 자기가 왕으로 있는 조선을 구원해준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키고, 수군이 다 증발한 다음에야 사과하는 척 품계 한 단계 빼고서 복직시킨 게 아니겠나?
쓰레기답게 어떻게든 쓰레기 같은 짓을 저질러야겠다는 선조의 뚜렷한 목표의식이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나는 원 역사에서 이순신이 당한 취급을 내가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엿이나 먹으라고 하고 싶다만.’
선조가 어디 보통 쓰레기인가.
그에게 나란 쓸모 있는 말에 지나지 않았고 그 역할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곧바로 숙청 대상이 될 터였다.
보라.
막상 입조하라면서도 다음 관직으로 무엇을 내린다는 말이 없다. 협조하지 않으면 의정부 좌우참찬 같은 유명무실한 관직이나 내리고서 두고두고 괴롭힐 가능성이 십 중 구 할이었다.
‘여튼 이 쓰레기는…….’
최대한 빨리 없어지는 게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그 정의를 실현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꼴에 자기가 적이 많다는 건 알아서, 중신이 방문할 때도 철저하게 몸수색을 하니까. 게다가 겁은 얼마나 많은가?
기미상궁에게 한 끼 가득 기미 시키고는 반 시진은 지나야 안심하고 밥을 먹는다.
칼침을 통한 ‘한 방’ 치료도, 독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철저함에,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다.
자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죽어 마땅한 짓을 계속한다는 건 보통 간담이 아니라는 뜻이거든.
그런 면에서는 대단한 놈인 셈이다.
* * *
여러 인연들과 아쉬움만 잔뜩 남긴 채 경성을 떠난 지 보름째.
나는 도성에 도착했다.
“이 사람을 호위하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이 공(公).”
이순신에게 감사를 표하자 그도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는 이 나라에는 없으셔서는 안 될 분이시니까요. 곁에서 지켜드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어 오히려 소관이 감사할 뿐입니다.”
남들 같았으면 전형적인 아부로 들렸겠으나, 이순신은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어조가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의례상 하는 말임을 광고라도 하듯.
재미없기로는 괜히 류성룡조차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궐을 찾아 전하께 인사드리고 싶지만, 경성에서부터 쉬지 않고 오느라 제정신이 아니군요. 복장도 예법에 부합하지 않고요.”
좀 쉬겠다는 뜻이었다.
“교지의 내용을 떠올리면 전하께서는 금천부원군 대감과의 만남을 여간 기대하시는 게 아닌 듯했습니다. 예법보다 어심에 부응하지 않는 것이 더 결례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내가 선조라는 놈을 잘 아는데.
옷 어설프게 입고 만나려 들면 자기를 우습게 생각한다고 생각해서 두고두고 원한을 가질걸.
“흠흠.”
나는 솔직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으나, FM인 이순신이 이해할 리도 없거니와 왕을 능멸하느냐고 성내지나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어찌 신하로서 감히 왕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법입니다. 중차대한 일일수록 섣부른 판단보다는 원리원칙이 대체로 좋은 해법이 되지요.”
원리원칙.
이순신에게 딱 맞는 해명이었다. 과연 FM 이순신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소관이 식견이 짦아 금천부원군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 공(公)께서도 공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했을 뿐이니, 그것을 무례라고 지적할 수는 없겠지요. 덕분에 마음 놓고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늦지 않게 입조할 터이니 공(公)께서는 이만 선전관청으로 귀환하셔도 됩니다.”
“예. 그럼.”
이순신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그와 함께 나를 호위했던 말단 병사들도 이제야 쉬겠다는 얼굴로 터덜터덜 멀어져갔다.
전시에는 몰라도 평시에는 인기 좋은 상관이기는 어렵겠군.
보는 눈이 없어지자 나는 육조거리 너머로 보이는 광화문 지붕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는 지랄맞은 선조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어휴.”
어떻게 한숨부터 나오냐?
차라리 대가리 싹 밀고 여진족인 척 두만강을 넘어가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적어도 창칼은 솔직하다는 점에서, 정계보다야 전장이 훨씬 바람직하고 정직한 공간이다.
여기 도성은, 나도 그렇지만 전부 서로 뒤통수만 치려는 쓰레기 같은 놈들밖에 없으니까.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나보다 내가 입성했다는 소식이 먼저 선조에게 전해진다면 원한을 살 터이니.’
여유를 오래 부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나는 즉시 저택으로 향했다.
“대감 마님!”
“돌아오셨습니까요!”
저택에 돌아오니 식구들이 반겨주었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제법 시간이 흘러서인지 인상이 변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다들 이 사람을 반겨주니 참으로 기쁩니다. 상전이란 대체로 눈에 안 보일 때가 가장 반가울 텐데 말이에요.”
“아닙니다, 대감께서는 천것들도 아껴주시고 잘 대해주시니, 마치 집안의 어른과도 같아 자리를 비우실 때는 모두가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이렇게 성히 돌아와주셔서 저희들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고마운 말이로군요.”
“언제나처럼, 목욕부터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장기간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다음에는 항상 목욕을 했다. 피로한 몸을 쉬게 하는데는 이만한 방법도 없으니.
시간이 빠듯하긴 하나 서두른다면 목욕 한 번 못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머슴이 몇몇 식구들과 함께 물러나자, 나는 남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 사람에게 식구란 그대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간만의 해후를 제대로 풀고 싶지만 일단 안방부터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대들도 이만 쉬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남은 머슴과 식모들은 각자 인사를 올리며 해산했다. 나는 모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저택 뒤편, 안방으로 향했다.
* * *
해후는 충분하지 못했고 휴식은 부족했다. 선조는 내가 느긋하게 방문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나는 서둘러 관복으로 갈아입고 마음을 바로잡았다.
경복궁으로 통하는 육조거리를 거닐고 있으니, 안면만 익혀두었던 하급 관리들이 인사를 해왔다. 나는 전하의 부름을 들어 인사를 짧게 끝내고 광화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천추전(千秋殿) 앞.
박석이 깔린 뜰로 들어서니 편전내시가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금천부원군 대감, 오셨습니까.”
“전하의 부름을 받고 막 경성에서 돌아온 참입니다. 전하께서는 천추전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 안에서 공무를 보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지요.”
“예.”
안내를 받아 천추전으로 들어서니 고요한 가운데 온돌의 온기가 발바닥에서 느껴졌다. 내부는 어두웠고 궁인들은 마치 돌덩어리처럼 인기척 하나 내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욱 가라앉은 분위기.
좋은 징조는 아니다. 누구도 선조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역시 공신 삭제로 곤란해진 모양이군.’
공신을 삭제한다면 부왕을 왕위에 올린 자들을 배신하고, 부왕을 배신하는 셈이요.
그렇다고 삭제하지 않는다면 지지기반이자 작금의 조정을 장악한 사람의 지지를 잃을 터이니.
남의 몸은 안 사리더라도 자신의 몸과 이익만큼은 지극히 사리는 선조로서는 무엇도 선택할 수 없겠지.
하지만 놈에게 단호하게 결단을 내릴 능력이나 용기는 없어도, 책임 소재나 중대한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저열한 습관은 멀쩡하다.
그래서 내가 불려온 것 아니겠는가?
“전하.”
편전 내시가 입을 열었다.
안에서 신경질적인 답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
“……함경도 병마절도사 금천부원군 이순신, 입사하였사옵니다.”
“아.”
선조의 목소리가 금세 밝아진다.
그가 말을 이었다.
“들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