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63화
56. 고향의 시험 (2)
“냄새가 좋군요.”
신립이 평가했다. 술 냄새와 함께 옅게 느껴지는 구수한 향기. 오곡 중에서도 이와 동일한 향기를 풍기는 곡식이 있었다.
“보리로 만든 술입니까?”
“바로 알아내시는군요. 맞습니다.”
“이런 냄새는 보리만 낼 수 있지요. 신기합니다. 보리로 만든 술이라니.”
“함경도에는 쌀이 귀합니다. 이 사람의 활동무대인 북방은 더욱 그렇지요. 잡곡으로 만든 술은, 다른 지역이라면 독특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이곳에서는 아닙니다.”
“익숙해져야겠군요.”
“육진이 설치된 이후 하삼도의 많은 주민이 이주하였지요. 정든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지에서 살아가게 된 애환을, 잡곡으로 어설프게나마 빚은 술로 달래려던 심정에 공감하는 것도 이곳 술을 음미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소관이 세종대왕 치세의 사람은 아니지만, 어째,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
신립이 부임하게 될 조산보는 함경도 중에서도 동북면 최북단에 있다.
종사품인 만호라도 도성에서 익숙하게 접했던 술을 임지에서 기대할 수는 없겠지. 신립이 그걸 모르지는 않는다니 다행이었다.
“선비답게 유유자적하는 마음을 가지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나는 신립의 농을 받아주고는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내놓은 술의 재료는 다른 함경도의 술과는 재료가 같지만, 만들어진 방식은 다릅니다. 신 공(公)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요.”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친히 마련해주신 자리에서 실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이란 말입니다. 하하.”
나는 가볍게 웃어주고는 대접을 챙겨 항아리의 술을 담았다. 거품 가득한 금빛 액체였다.
신립은 채워진 대접을 건네받고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많은 기포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상한 것은 아닐까, 싶은데도 색이 너무 곱고 맑습니다.”
내가 만든 술은 다름 아닌 맥주(麥酒)!
언젠가 소시지구이를 안주로 곁들여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선에서는 이루기 불가능한 꿈이라, 다른 욕망과 마찬가지로 잊고 있었다.
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밖을 나다니지 않으며 공무에 집중할 동안, 여유시간을 해묵은 꿈을 이뤄내는데 투자했다. 눈앞의 맥주는 그 결과물이었다.
나에게는 역작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보리차에 알콜만 탄 수준을 탈피하고자 얼마나 고민했던가? 맥주의 주재료인 홉(Hop)을 대체할 재료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공무보다 이쪽에 더 힘이 들어갔다.
“한 번 시음해보시지요.”
“예.”
신립은 대접을 기울이더니, 가볍게 맛만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내려놓았다.
“어떻습니까?”
“평소 접해본 술과는 다르군요. 쓴맛도 강하고, 기포가 올라와 입에 머금고 넘길 때 따가운 느낌도 들고…….”
“첫인상이 좋지는 않군요.”
“그건 아닙니다.”
신립은 애써 부정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다른 술도 마찬가지지만 술만 마셔서는 의미가 없다.
걸맞는 안주가 있어야지.
제대로 된 것으로.
내가 바란 것은 맥주만이 아니다.
소시지는 구현이 어렵지 않았다. 브루어리 지식이 없었다면 실패만 거듭했을 맥주와는 달리, 소시지는 직관적인 음식이다.
“내오게.”
대청 밖으로 명령이 전해지자, 공노비들이 소시지를 철판에 내왔다.
아궁이에서 직화로 단숨에 구워낸 소시지는, 표면은 바삭하게 그을려졌고 칼집을 낸 틈새에서는 기름이 흘러내렸다.
“냄새가…….”
“좋지요?”
“예. 벌써 입에 침이 고일 지경입니다.”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맛보시지요.”
“예!”
신립은 기꺼이 응하며 소시지를 맛보았다. 반응은 맥주를 처음 맛보았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반투명한 기름을 입술에 묻혀가며 두꺼운 소시지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순대라고는 할 수 없는 음식으로군요.”
내장에 피와 도축 부산물, 잡곡 등을 넣어 찐 음식은 동북아에서는 익숙하다. 하지만 재료가 고급 부위라고 할 수는 없는 탓으로 인식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순대의 일종이라면 일종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황홀할 정도로 맛있습니다.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는 확실히 이런 쪽으로 조예가 깊으시군요.”
“뭇 사람들은 유학자가 신체의 기쁨을 탐닉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도정 안 한 보리로만 밥을 지어먹지는 않잖습니까? 이 사람을 차라리 솔직하기로 했습니다.”
“역시. 위선자가 되느니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솔직한 것이 좋지요. 또 한 수 배웁니다, 금천부원군 대감.”
신립은 짧게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소시지를 맛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기름진 소시지만을 거듭 먹기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건만 신립은 젓가락을 놓고 맥주가 담긴 대접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조금 맛보다 말았지만 이번에는 단숨에 대접을 비웠다.
“기름진 순대와 무척이나 어울리는 술이군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어찌하여 금천부원군께서 이 술을 준비하셨는지 이제는 알겠습니다.”
신립은 감탄을 흘렸다.
기름기를 맥주로 씻어낸 덕인지, 이번에는 거리낌 없이 새 소시지를 씹어넘기기 시작하는 그였다.
“입맛에 맞지 않으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만. 만족스러운 조합이라니 다행입니다.”
역시 소시지구이와 맥주의 조합은 무적이지. 나 역시 소시지와 맥주가 미지근해지기 전에 즐기기로 했다.
* * *
병마절도사 노릇도 2년차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병마절도사 임기는 통상적으로 2년이기에, 나의 임기도 다해가는 셈이다.
과연 선조가 내가 경관으로 돌아오기를 바랄지 의문이기는 하나…….
나의 귀환을 막을 명분은 없다. 나 역시, 말년병장 때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격언에 따라 최대한 구설수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가만히 전역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
어느 날.
“금천부원군 대감.”
“……이럴 수가.”
나는 감탄했다.
색색의 선전관복을 입은 채 몇 명의 병사들을 대동한 그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자였으며 잊을 수 없는 자이기도 했다.
이순신!
진짜 이순신.
“그대가 경성을 방문할 줄이야.”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이순신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사적으로 친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임에도, 상관을 대하는 절도가 묻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나를 마주할 때는 극진한 태도를 갖췄다. 내가 지극히 높은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한 번 어울리고 나면 빠짐없이 누그러졌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명성이나 압도적인 지위와는 달리, 내가 (겉보기로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순신, 그만은 여전했다. 처음 만날 때보다야 많이 양호해진 편이지만, 바다에서 물 한 컵 덜어낸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는가?
“병자년(丙子年) 무과에서 갑과로 급제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보아하니, 과연 그간 노고의 결실을 얻으셨군요.”
“덕분입니다.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소관을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갑과로 급제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대에게는 재능이 충분하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 사람은 그걸 알아보았기 때문에 불필요할지 몰라도 사소한 도움이나마 드리려 했던 것이고.”
이순신은 황송하다는 듯 다시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잡담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는지, 굳은 어조로 주제를 돌렸다.
“소관이 경성을 방문한 이유는 전하께서 금천부원군께 보내신 교지를 전해드리기 위함입니다. 일단 확인부터 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이순신이 부하를 시켜 금빛 비단을 두른 교지를 꺼내자, 나는 왕명을 받들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내가 후원자를 자처했던 이순신 앞에 무릎을 꿇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리 예법이 이렇다지만.
이순신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그답지 않게 흠흠, 헛기침하고는 서둘러 교지를 펼쳤다.
“금천부원군 이(李)는 들으라. 그대는 조정에 마땅한 자리가 없어 불가피하게 정헌대부(正憲大夫, 정이품 상계)의 품계를 가지고도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조정에 공석이 생기고 그대의 임기 또한 다 되었으므로 마땅히 돌아와 조정의 직을 지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왕이 신하를 믿어 맡기고자 하는 일이 있으니 이번에는 지체없이 입조하여 예를 표하고 명을 받들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도성 방향으로 절을 올렸다. 이순신은 교지를 말아 내게 건넸다.
‘이번에는 지체 없이 입조하라니, 아직도 회령판관 때 부른 걸 씹은 걸로 꽁해 있어?’
도대체 언제적 일이냐.
여튼 선조는 여전히 미친놈이었다. 이놈은 자기가 왜 욕먹고 있는지 모르나 보다.
하기야 이딴 놈이니까 뒈지는 그 순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폐만 끼쳤지. 하여튼 영양가라곤 하등 없는 놈이었다.
“음.”
나는 상념을 밀어내고는 이순신에게 물었다.
“보통 외관(外官)의 임기가 다한다고 선전관까지 보내는 일은 흔치 않을 터인데. 전하께서 교지로 지체 없이 입조하라는 명까지 내리시는 걸 보면, 도성의 분위기가 수상한가 보군요.”
“말단 무관에 불과한 소관으로서는 조정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사실 잘 모릅니다.”
은근히 방어적이야.
왕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서둘러 돌아오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벌어졌건 공공연한 상황일 가능성이 큰데도 말이다.
어쩌면 자신이 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말마따나 그는 무관에 불과하니. 자신의 직임에만 집중하자는 게 FM으로 유명한 이순신다운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내가 입조 자체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중차대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제삼당이 미리 연락했을 거다.
그 정도의 상황만 아니라면 필요한 정보는 도성에 입성한 뒤에 알아내도 무방하겠지.
‘아니면 중간중간 들르는 고을의 수령에게 물어봐도 무방하고.’
그들에게는 인편도 있고 관보(官報, 공식 신문)도 있으니까.
사람 오가기 힘들고 관보도 한두 달 치 한꺼번에 묶어서 보내는 경성보다야 도성의 소식을 많이 알고 있을 거다.
이순신의 성격이 분명하니 그에게 왈가왈부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무례지만 전하께서 이 사람을 급히 부르시니. 그 기대에 부응하려면 서둘러 준비해야겠군요.”
후임 병마절도사를 위한 인수인계용 공문도 작성해야 했고, 감영과 병영의 부하들과 육진 수령들에게도 당분간의 행동지침을 내려야 했다.
음성적으로는 강 너머의 김자강과 율보리 그리고 나를 대신해 동쪽해안, 해삼위를 지키게 된 석탈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을룡이 길러놓은 음지의 수족들도 챙겨야 했다. 위험한 일을 맡은 자들은 데려가야 했고, 비협조적이거나 이용가치가 없는 자들은 적당히 손절 해야지.
선조가 내려오라 한다고 당장 말 타고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럼. 이 공(公)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관사에서 쉬고 계세요. 최대한 빨리 도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겠지만 며칠은 걸릴 겁니다. 이 사람 위치가 중하다보니.”
“……저기.”
“말씀하세요.”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원하시는 소식은 아니시겠지만, 소관이 도성을 떠나기 전만 해도 공의전(恭懿殿)께서 기후가 불편하시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예.”
조용하던 이순신이 그새 무슨 바람이 불어서 공의전이 위독하다는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름 중요한 정보다.
공의전(恭懿殿).
인종비 인성왕후가 되는 사람. 그녀는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품 이상 중신들이 함께 문안하는 일도 몇 번 있었다.
때마침 선조가 나를 부르는 일과도 관련이 있을까?
아마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경도에는 도성에서 구하기 힘든 약재가 여럿 있으니, 공의전을 위해서라도 다소 챙겨가야겠군요.”
“전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