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62화
56. 고향의 시험 (1)
선전관이 물었다.
“조산보를 확인해 보았더니, 과연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더군요. 국경 최전방에 위치한 주둔지가 이토록 방치될 줄이야…….”
사람을 빼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만호 유홍서가, 자신의 관할인 조산보에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법 나를 귀찮게 만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래서 세상에 존재의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나 보다.
“이 사람이 진즉 현장을 파악해야 했는데, 맡은 직임이 많다 보니 확인이 늦었지요. 책임을 깊게 통감하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조산보가 그렇게 된 것이 대감만의 책임일 수도 없고, 또 조용히 묻어둘 수도 있으셨는데도 보고하여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조정에서도 대체로 호의적인 입장입니다.”
“그건 다행이로군요.”
제삼당의 입김은 차치하더라도, 이 일이 대대적으로 파헤쳐진다면 피 볼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전직 조산보 만호나 전직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의 수는 많지 않겠지만, 그들과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나서서 이들까지 털어버리고 싶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있고 지금은 나에게 도움 되고 있으니.
이 일은 여기서 끝내는 것이 좋겠지.
“부담스러운 일을 맡기는 것일지도 모르고, 또 이 사람이 오만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선전관이 부드럽게 권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전하께서 이 사람을 믿고 친히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로서 임명해 주셨는데 책임을 다하지 못해 너무 죄스럽군요. 부디 전하께 이 사람이 지극히 송구하며, 직임에 더욱 충실하겠다는 각오를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마침 전하께서도 금천부원군 대감께 관심이 있으신 듯하니.”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어쩌면 선전관이 경성으로 오기 전에 선조가 불러서 몇 마디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깊게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을 테니, 나에 대한 관심을 에둘러 표현했겠지.
예상하고 있던 바였으나 선전관이 그의 입으로 증명할 줄은 몰랐다. 순진한 친구로군.
“전하께서 이 사람에게 관심을 주신다니 과분하군요.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이 사람의 죄가 큽니다, 하하.”
선조에게 보낼 복종의 시그널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진심은 그렇지 않지만, 선조가 관심법을 하겠나, 통견원문의 술법을 쓰겠나? 왕궁 밖으로는 나가기도 힘든 사람으로서는 선전관이 전하는 말만 듣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선조에게 협조적인 스탠스를 취한다고 그가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다. 워낙 미친놈이니까. 도리어 화를 낼 수도 있겠지.
여러 번 당해본 일이다.
‘예전에는 적잖이도 당황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선조가 나의 가식적인 태도 앞에서 유난히 지랄발광이 심한 이유는, 내가 트집 잡힐 구석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도 삐져나온 부분이 있어야 빼내기 쉬운 법이다.
나는 그럴 단초를 주지 않으니까 지랄하는 것이지.
오히려 놈이 하루아침에 양반이라도 된다면 그게 문제였다.
뒤로 어떻게 칼을 갈고 있을지 모르니까.
나는 주제를 바꿨다.
“이제 조산보 만호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유홍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유배에 처해질 예정입니다.”
“설마 장을 두 번 맞지는 않겠지요.”
장형 이상의 형벌인 도형(徒刑, 노역형)과 유형(流刑, 유배)는 무조건 백 대의 장형을 동반한다.
내가 군사조직의 지휘권자로서 유홍서에게 이미 장 일백을 집행했으나, 조정은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파직도 했고.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장 일백을 이미 집행하셨는데, 또 때릴 필요야 있겠습니까. 그랬다간 죄인이 배소로 가기도 전에 죽을 겁니다.”
“그건 그래요.”
이미 떡이 되었으니. 거기에서 더 때리겠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뜻 이외는 되지 않는다.
선전관이 말을 이었다.
“후임에 관해 물어보신 것이라면, 당연히 만호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이 임명될 겁니다. 전임 만호가 쳐놓은 사고가 심각한데, 뒷수습을 잘할지 의문이로군요.”
“이 사람이 최대한 도울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는 책임감이 깊으신 분이니 물론 많은 도움이 되어주시겠지요. 하지만 마음이 맞아야 돕는 것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맞는 말씀이십니다만 만호를 제수하는 일은 이 사람의 소관은 아니라서요.”
군과 관련된 일이라면 대부분 나의 소관이었고 나에게도 권한이 있지만, 인사만은 예외였다.
무관에 대한 인사는 병조의 속사인 무선사(武選司)에서 전담한다.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자면 원하는 사람을 만호로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나에게는 굳이 부스럼을 만들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선전관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병조판서 대감께서는 금천부원군 대감의 의향을 궁금해하셨습니다.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달라는 말씀을 전해달라 하시더군요.”
“혹시, 병조판서 대감의 존함이…….”
“정(鄭) 대감이십니다. 호는 항재(恒齋)를 쓰시지요.”
정종영(鄭宗榮)인가.
나와는 접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혹 제삼당 소속의 관리가 병조판서가 되어, 당을 강화할 명분이라도 주는 줄 알았더니. 딱히 그런 것은 아니었군.
명종 시절 윤원형과 싸웠던 사람이라 노수신이나 윤원형 같은 을사사화 희생자가 포섭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무관들이라면, 병마절도사로서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직책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굳이 그들을 빼내어 다른 자리로 옮기기에는 신용이나 능력이 탁월하지는 않다.
그나마 외부인이라면 도성에서 연을 쌓은 신립과 이순신 정도가 있을까.
‘때마침 이순신도 병자년 무과에서 갑과로 급제했지. 하지만 이제 급제한 사람이 추천을 받는다고 갑자기 종사품 만호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실상 선택지는 신립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벽지에 오기를 원할지 의문이었다. 한때는 나를 스승이나 공자님으로 부르며 깊은 호감을 드러냈지만 최근에는 접점도 없었고.
의향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겠지.
“생각해둔 사람은 있습니다만, 그가 동북면 최북단의 가장 위험한 주둔지를 맡고 싶어 할지 의문이로군요.”
“달리 적임자가 없다면 쓸 수밖에 없지요.”
“맞는 말씀이시지만, 원망을 사고 싶지는 않아서요. 병조판서 대감께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의향을 물어보고 그것을 존중하겠다, 약조해 주신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원망을 사고 싶지 않은 건 소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금천부원군 대감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믿고 알려드리겠습니다. 평산 신가의 입지(立之, 신립의 자)라고. 지금은 오위의 관직을 지내고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볼일은 다 보았는지, 선전관은 더 이상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 딱히 볼일은 없었으므로 자리는 이만 파하기로 했다.
“도성에서 경성까지 오시느라 노고 많으셨는데, 쉬시지도 않으시고 조산보까지 다녀오셨지요?”
“공무 아닙니까.”
“공무라도 쉴 때는 쉬셔야지요. 신하 된 사람의 역할은 비단 공무만 이행하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 몸을 잘 관리하여, 오랫동안 전하를 보필하는 것 역시 신하의 역할입니다.”
나는 작게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객사에서 쉬고 계십시오. 충분히 휴식하신 뒤에, 이 사람이 자리를 마련할 터이니 조금이라도 그간의 노고를 풉시다.”
“예. 알겠습니다. 금천부원군 대감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잡담은 이만하면 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니 선전관 역시 일어났다.
나와 선전관은 서로에게 예를 표하고는 흩어졌다. 나는 공노비를 불러, 북방의 기후에 익숙하지 않을 선전관을 위해 객사에 불을 때도록 했다.
뜨끈한 구들장에 등판을 지지는 것이야말로 반도 사람의 제대로 된 휴식 방법 아닌가.
며칠 뒤.
선전관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일행과 함께 유홍서를 데리고 떠났다.
조산보에서 확보한 염전 노예…… 가 아니라 염간들도 지금쯤이면 석탈리가 관리하는 해삼위(海參崴)에 자리를 잡았겠지.
해삼위(海參崴)란 내가 김자강과 율보리를 통해 확보한 해안지대에 붙인 이름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옛 지명이 해삼위라, 작명 센스가 없는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밖으로 시선을 돌릴 일도 당분간은 없겠지. 막연한 바람이겠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느긋하게 지내기로 했다.
겸사겸사 취미 활동도 하고.
* * *
“설마 그대가 경성을 방문할 줄이야!”
나는 감탄했다.
뜰에는, 익숙한 인연이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이 자리해 있었다.
오래전 조산보의 일을 확인하고자 파견된 선전관은 나에게 후임 만호를 추천해 달라고 했고, 나는 의향을 먼저 물어볼 것을 약속받고서 신립을 알려주었다.
지금 그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신립이 밝은 낯으로 물었다.
“강녕히 지내셨습니까.”
“덕분에요. 하지만 공(公)께서는 원치 않으셨는데 이 사람 때문에 동북면까지 오신 게 아닌지 걱정됩니다.”
“대감의 밑에서 일할 수 있다면 동북면만이 아니라 어디라도 따라갈 자신이 있습니다! 소관이 원해서 온 것이니, 대감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하등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경성까지 찾아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을 터인데,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예!”
나는 신립을 데리고 대청으로 들어섰다.
“편히 앉으셔도 됩니다.”
무릎을 꿇은 신립에게 권했다. 오래 면식을 나누지 못했지만 고작 나를 보겠다고 국경 최북단이라는 험지와 오지에 자원한 사람이다.
이런 사이에서 예의란 부차적인 것이겠지. 서로에 대한 호감과 존중을 잊지 않는 한.
신립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자세를 고쳤다.
“마침 시기를 맞추어 잘 오셨습니다. 이 사람이 신 공에게 소개할 것이 있거든요.”
“무엇입니까?”
“음, 마음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나는 밑밥부터 깐 다음 공노비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는 이해했다는 듯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른 공노비들과 함께 각자 머리통만 한 항아리를 하나씩 가져와 내려놓았다.
옻칠을 해 새카만 항아리는 주둥이와 뚜껑 사이에 끼워놓은 백색의 면이 삐져나와 있었다. 무엇이 담겨있건 보통 공들인 티가 아니었다.
과연 신립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술입니다.”
“호오……. 어떤 술이기에 이런 항아리에 담아놓으셨는지.”
“격식에 맞지 않음을 알지만, 이 사람과 공이 격식만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기에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을 한 번 마련해보았습니다.”
“탁주(濁酒)입니까?”
신립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물었다.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술이라면 탁주가 제격이다. 다른 술들에 비해 품이 적게 들어가 쉽게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쉽게 마실 수 있다.
대다수의 양반들은 청주나 소주를 선호하지만 탁주를 즐기는 자들도 있었다. 신립은 딱히 후자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탁주를 마다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닙니다.”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내가 마련한 술은 탁주가 아니다.
“그렇다면…….”
“청주나 소주도 아니에요. 그런 술을 항아리 몇 개에 담아서 내온다면, 먹고 죽자는 소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하하.”
“흐음.”
신립은 거칠게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탁주도 아니고 청주, 소주도 아니라니.
“함경도에서만 마시는 술입니까? 여진족들은 말의 젖으로 술을 담근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여진족들이 많이 사는 함경도라면.”
“아이락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의외의 추리력을 발휘해주셨습니다만, 아닙니다.”
“음.”
신립은 잠시 턱을 쓰다듬었으나, 곧 허탈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술이란 말입니까”
“하하.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이 사람이 마련한 술은 기존의 것들과는 다르니. 그래서 걱정이 많습니다만, 말만 해서는 의미가 없겠지요.”
항아리 하나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구수한 향기 속에서 은은한 술의 향기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