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60화
55. 빛이 있으라 (3)
갑사가 형구(刑具)랍시고 가져온 것은 사람 팔뚝만 한 기둥이었다.
두어 대만 때린다면 사람도 잡겠군. 조산보를 망쳐 나를 곤란하게 하고, 또 귀찮게 만들었으니 나무 기둥으로 때려 죽여도 무방하다.
하지만 형을 집행하던 도중 사람이 죽는다면 그것대로 곤란하다.
나는 손을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정도의 형구(刑具)로 형을 집행해야 적절한 처벌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때려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유홍서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어서인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기운이 넘치는 것을 보면 덜 맞은 모양이었다.
갑사는 나의 반려에 아쉬운 표정을 짓고는 기둥을 도로 가져갔다.
나도 아쉽기는 매한가지였다.
보는 눈만 없었어도, 이걸 콱…….
“조산보 만호 유홍서는 듣게. 그대는 군사를 조련하지 않고 마음대로 놓아 군역을 비게 하였으며, 사사로이 경계를 나서 오래 자리를 비웠다. 그대가 맡고 있는 조산보는 특히나 군정이 엄해야 함에도 만호로서 기능하지 않고 법을 위배하였으니, 사태의 위중함을 감안해서라도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
“읍읍!”
“대명률에 의거하여 장 일백을 집행할 터이니 그리 알고 각오하라. 다만 오늘은 날이 늦고 형구를 구하지 못했으니 집행을…… 내일 새벽으로 미루겠다. 갑사들은 죄인을 보다 단단히 포박하여 가둬두라.”
갑사들은 예, 하고 절도 있는 대답과 함께 유홍서에게로 다가갔다.
유홍서는 반항하였으나 여전히 의미는 없었다. 그는 밧줄로 꽁꽁 매인 채 갑사들의 손에 의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흠.”
나는 짧게 콧바람을 내쉬고는 발을 돌렸다.
사실 유홍서가 꼭 죽여야 하는 놈이라면, 놈이 오늘밤 격리되어 있을 동안 찾아가서 적당히 의문사를 꾸미는 방법도 있었다.
다만 그보다도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놈의 처분에 대해서는 아니고, 조산보의 만호인 그가 기능하지 않은 채 수감되어 있다면 현장에 주재중인 상관인 내가 실질적인 만호로서 기능하지 않겠나?
때마침 소금의 생산 현황과 방식에 대해 알아보고자 방문한 참이었다.
조산보는 나에게 활짝 열린 상태였다.
놈에 대한 처분은 천천히 해도 무방하겠지.
* * *
다음 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거처를 나섰더니, 바깥은 이미 완연히 낮이었다. 최북단인 만큼 햇빛이 쨍쨍하게 비친다는 극적인 효과는 없었고.
그냥 우중충한 날씨다.
단지 태양이 중천에 걸려 있으니 시간이 많이 늦었구나, 하고 알 뿐이지.
갑사들은 성실한 사람들이어서인지 아니면 하늘 같은 병마절도사와 함께 있어서인지 먼저 일어나 있었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갑사 중 하나가 예를 올렸다.
“기침하셨습니까, 금천부원군 대감.”
“예. 어젯밤은 어떠셨습니까?”
“덕분에 충분히 쉬었습니다.”
“설마요. 다들 여전히 피로감이 있을 터인데 번을 돌아가며 수면을 더 취해도 무방합니다.”
“……감사합니다.”
갑사도 휴식이 절실했는지,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감사를 표했다.
“그보다, 죄인은 어떻습니까? 밤새 탈출했다거나, 얼어서 죽었다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예, 하하. 만일을 대비해 돌아가며 상태를 확인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탈출하거나 얼어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유 만호는 그동안 팔자가 좋아도 너무 좋았지요. 장형을 집행하는 것만으로는 죄과를 전부 청산할 수는 없습니다. 계속 고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내가 사라진 다음에는 동료들에게 쉬어도 된다는 희소식을 전하겠지.
그것을 위해서라도 빨리 볼일을 보기로 했다.
조산보의 병사들은 낙후되었으나 대신 정원의 반의반도 채워지지 않은 덕으로 막사 하나를 몇 명이서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구역에사 마치 사랑방을 꾸미듯 손수 제작한 가구까지 배치한 채였다.
얼핏 본다면 팔자가 좋은 모습이었지만 달리 보자면 만호 유홍서가 상당히 오랫동안 조산보를 방치해 병사들이 스스로 살아남고자 애쓴 결과였다.
나는 그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만사가 귀찮을 텐데 불청객이 우르르 찾아와서 눈치가 많이 보이겠군요.”
“……아, 아닙니다요.”
늦은 대답이었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사실 이런 생활이 평범한 군 생활보다 익숙할 거다. 원래대로 되돌아간다고 한다면 오히려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그 점을 배려할 수는 없다.
“새삼스러운 말임을 알지만 조산보는 국경 최일선에 자리해 있고, 혁싱상에 불과하다지만 수군절도사를 겸하는 이 사람 아래에 있는 주둔지입니다.”
“…….”
“원상복구가 불가피하다는 뜻입니다. 다들 지금에라도 각오하는 편이 좋겠지요. 그 점을 지금부터라도 인지하셨으면 합니다.”
“……예.”
병사들이 기운 없이 답했다.
“일단 현황부터 점검하겠습니다. 그대들 중에서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면대로 확인하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나는 잠깐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동안 내려오는 예산은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었다. 군 예산은, 사실 인건비는 거의 들지 않는다. 하지만 군용 물자와 이를 현장까지 옮기는 운송비의 비율이 상당했다.
운송비는 차치하더라도 이곳 조산보의 상주 병력은 아흔. 이에 맞춰 물자가 전해졌다면 열 명이 채 안 되는 진짜 병력은 농담 조금 보태서 황제처럼 살 수 있었다.
식료로 끼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잉여 물자 중에서도 민간에서 통용되는 것은 처분해서 빼돌릴 수도 있으니까.
“그것이.”
병사 중 하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공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는 없겠지.
“이해합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전적으로 만호의 잘못이라 그대들이 책임을 물을 일은 없으니.”
나의 당부에 병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사실 소인들은 무언가가 조산보로 전해지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족히 몇 년 전부터…….”
“물자가 하나도 조산보에 당도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예.”
유난히 대답이 빨랐다.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허.”
함경도의 예산은 관찰사가 전담하지만, 편의를 위해 최전방인 육진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영 휘하에 있는 둔전들은 병마절도사가 직접 취합하여 배분하고 있었다.
그건 유명무실한 수군절도사 휘하의 조산보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산보는 국경 동북면 최북단에 위치해 있고, 가까운 곳에 녹둔도 둔전이 있어서 필요한 예산은 녹둔도 둔전으로 확보했다.
식량 이외의 물자는 가까운 경흥부의 협조로 확보, 이때에 들어가는 비용은 병마절도사영에서 처리했다.
만호가 손을 대자면 너무나도 취약한 구조다. 알고는 있지만 전근대의 현물 운송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불가피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예산을 싹 다 삥땅쳐?’
족히 몇 년은 됐다니 이번 사태는 유홍서 이전의 만호들도 가담한 것 같았다.
첫 만호가 이런 상태로 전락시킨 이래로, 후임으로 부임한 만호들은 극단적인 조산보의 상태에 절망하고서 아예 손도 대지 않은 거겠지.
유홍서도 그런 흐름에 편승했을 테고.
임기를 다해 조정으로 돌아간 전임은 대체로 보다 높은 품계와 관직에 임명되므로, 후임은 전임이 친 사고를 들춰내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유홍서 외에도 전임 만호들까지 줄줄이 들어낸다면, 당시 만호들의 상관이었던 병마절도사 겸 수군절도사들과도 척을 지게 된다.
‘쩝.’
한두 놈이면 몰라도 전직 종이품을 지낸 관직자 떼거지다. 몇 년 전 일이니 지금은 대감 소리를 듣는 놈들도 있겠지.
놈들에게는 까마득한 일일 조산보를 꺼내어 뒤늦게 논란거리를 만든다면 반성할 가능성은 추호도 없고 나를 원망이나 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 중 일부는 조산보의 상황에 관심을 주고 사태를 파악했음에도, 전임 병마절도사 겸 수군절도사와의 관계를 의식해 그러려니 넘어간 자들이 있을 테지.
이런 케이스라면 더더욱 억울하게 여기고 나를 원망할 터였다. 저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야.’
이래서 사람들이 지금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관직과 권력을 탐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영의정을 능가할 정도로 강함에도 전임을 의식하고 있으니.
뭐, 대부분은 단순한 권력욕으로 보다 높은 위치를 갈망하는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조산보의 일은 유홍서만의 일로 최대한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타협을 떠나서, 내가 병마우후로 본보기를 만들었는데도 이실직고 안 하고 끝까지 재미 본 죄는 어쨌거나 뒤지게 맞아도 마땅했다.
그보다도,
“내려오는 물자가 없다면 그대들은 독자적으로 생활을 영위했다는 뜻인데. 조산보에는 둔전이 없고, 설령 있더라도 개간할 정도로 인력이 충분해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생활을 유지해오셨습니까?”
병사가 답했다.
“물고기를 잡아서 팔았습니다. 소금도 공납하고 남은 것들은……, 약간의 삯을 받고 나눠주었습니다.”
삯을 받고 나눠준 것이나, 판 것이나 그게 그거지.
어쨌거나 원점으로 돌아왔다.
소금으로.
“물고기는 병선을 이용해서 잡으셨겠고.”
딴에는 수군 주둔지랍시고 본질이 화물선이나 다름없는 병선이 하나 있었다. 맹선(猛船)이라고, 남부 지방의 수영에서는 대부분 퇴역시킨 전 세대 병선이다.
본질은 화물선이라는 말 그대로, 소형 조운선을 단지 군용으로 전용하면서 사나운(猛) 배(船)……, 라는 과분한 이름을 붙인 게 다다.
미래로 치자면 예비군 카빈총 같은 물건이지만 조산보 수군들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전방에서 쓰는 판옥선은 체고가 높아 물고기를 잡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으니까.
“소금은 가까운 곳에 있는 염소(鹽所)에서 만들었겠군요.”
“예……. 어차피 염간(鹽干)들도 없어서 써도 무방하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저었다.
“굳이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람이 물어보는 이유는 그대들을 벌 주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현황을 조사하기 위함일 뿐이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소금은 누가 만들고 있습니까?”
“모두가 번갈아가며 만들고 있었습니다. 물고기를 적게 잡는 사람이 담당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자리한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모두 소금을 만들 줄 안다는 뜻이었다.
원래의 병사 생활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조산보에서 살아온 자들. 다시 군역으로 복귀시키기에는 불합리한 면이 있지 않을까?
“혹시, 그대들은 가정이 있습니까?”
“부모님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신 듯 하니……. 여기 중에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요. 다들 대립질이나 하는 사람들이라.”
수군은 칠반천역이라 하여 양인의 신분이나 사람들은 천인들이나 할 짓이라며 멀시하고 기피했다.
그중에서도 아흔 명 중 여든 명은 회피한 군역을 꾸역꾸역, 형식은 어긋낫지만 어떻게든 이어가고 있는 자들이었기에 가정을 이룩하기는 힘들었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라지만 수군 대립질이나 하는 사람에게 장가들 여자는 없으니.
달리 말하자면, 이들이 사라지더라도 신경 쓸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정확히 내가 바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