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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59화 (15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59화

55. 빛이 있으라 (2)

“완전히 주먹구구로군.”

나는 장부를 덮었다.

원하던 정보는 얻었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경성부의 염소(鹽所, 소금 생산지)는 한 곳. 몇 개의 염분(鹽盆, 소금가마)가 있었지만 정작 염간(鹽干, 소금 생산자)가 없었다.

즉, 전문적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사람 없이 시설만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염소(鹽所)는 수군진과 같은 곳에 있었다. 분명 수영의 수군들에게 소금 생산이 전가되고 있겠지.

신분은 양인이지만 하는 일은 천민과 다름없다며 멸시당하는 수군이라, 그들이 소금을 만들건 물고기를 잡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바 아니었다.

명나라 다음가는 문명대국을 자처하는 조선의 현실이었다.

‘수군절도사의 직함을 달고도 정작 수영은 부임 직후 쓱 훑어본 것이 전부였으니. 이제는 이쪽도 관리해야겠군.’

내가 직접 동헌에 거주하면서 중요 업무들은 직접 처리하는 경성부나, 감영에서 멀지 않고 제대로 본보기를 만들어놓은 병영과는 달리 수군진은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관심을 먼저 주지 않은 것은 나의 실책이지만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다.

말이야 수군절도사도 있고 수군진도 있지만 함경북도에 수군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게다가 실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함경도 수군에는 지휘관인 수군절도사마저 셋이었다.

한 줌 수군을 셋으로 갈라놓고 누군가 책임져주기를 바란다면 실로 태만한 발상이었다.

‘여하튼, 이 나라는.’

나사 빠진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나도 적당주의로 살아갈 수만은 없는 법이다.

더욱이 대과의 답안 중 하나로 수군의 처우 개선을 설파했던 내가 아니냐? 더더욱 나서줘야 마땅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소금의 일은 오히려 곁가지였다.

집무실을 나와 말을 챙기자 병마평사 이원익이 어찌 알았는지 찾아와 물었다.

“어디로 출타하십니까?”

“조산보(造山堡)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갑자기 조산보는 어찌하여…….”

“수군 관리입니다.”

조산보(造山堡)!

이순신의 행정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흔히 들어본 이름일 터였다. 한때 이순신이 조산보 만호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순신이 이곳에서 수군 지휘관의 적성을 길렀는지도 모르지.

냉정하게 말하자면 상주하는 수군은 백 명도 되지 않고, 군선도 고작 한 척뿐이지만.

“음, 소관은 대동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잠깐 현장을 둘러볼 생각이니 굳이 동행하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만.”

“음, 그렇다면 갑사들만이라도 대동하시지요. 영내라지만 국경이라 언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거리로 나와 말에 올라타자 이원익은 꾸벅 허리 숙여 전별했다.

나는 곧장 병영을 찾아 몇 명의 갑사들을 이끌고 조산보로 향했다. 조산보는 동북면 국경 끝에 있어 하루이틀 거리로는 도달하기 힘들었다.

여러 고을의 관아를 경유하며 겸사겸사 군정을 살피며 나아가니, 오래지 않아 조산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만 성이로군.”

문서상 조산보에도 성은 있었다.

둘레 10척(尺), 둘레 3천 5백 22척(尺).

높이만 따지자면 적어도 사람 키의 두 배는 되어야 했으나, 가장 높은 곳을 기록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거짓을 기록했거나.

바위를 사람 가슴 높이로 얼기설기 쌓아놓아 마치 구획을 나눈 것처럼 보이는 조산보의 성은, 방호력을 거의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딱 없는 것보다야 나은 수준.

입구마저 제대로 성문과 누각을 갖추지 못하고 대신 목책만을 세워두었다. 최전방의 주둔지건만 경계도 허술해 지키고 입구를 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

처참한 광경에 갑사들조차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의 상관인 병마우후 정승복이 떡이 된 사건의 충격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여파가 여기까지 미치지는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문을 열게 하세요.”

“예.”

갑사 중 하나가 가볍게 박차를 가해 성 입구로 나아갔다.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가 울렸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갑사가 입구 너머를 향해 외쳤다.

“이리오너라!”

…….

반응은 없었다. 갑사는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리오라 하지 않았느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쩌렁쩌렁 외친 후에야, 목책 너머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탁한 피부에 볼은 움푹 들어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복장은 전형적인 조선군 말단 병졸의 것이었다. 외침을 처음으로 받아내야 하는 최전방 병사의 몰골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기운 없이 물었다.

“무슨 일들이십니까?”

입구에 선 갑사가 다시 외쳤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겸 수군절도사 금천부원군 이(李) 대감께서 방문하셨다! 속히 문을 열어 맞이하라!”

“……예에.”

수군이 비틀거리며 사라지고, 목책의 입구가 좌우로 젖혔다. 내부의 풍광이 드러났다.

탁한 색상의 대지 위로 몇 채의 나무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보이는 병사라곤 입구 안쪽 근처에 있는 자들이 전부.

아무리 규모가 작은 주둔지라지만 사람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기운 없이 선 병사들에게 나아가 물었다.

“다른 자들은 보이지 않는군요.”

“저희들이 전부입니다.”

대충 훑어보아도 열 명이 채 안 됐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전부라니 참으로 속 편하고 당당한 대답이었다.

서류상 조산보에는 아흔 명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 지금 눈앞에서 태평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보통 심상찮은 게 아니었다.

“만호는 어디 있습니까?”

“소인들은 잘…….”

조산보를 지켜야 할 만호도 없고, 수병들 중에서 부대의 지휘관으로 느껴지는 자도 없었다.

단지 갈 곳 없어 조산보로 피신한 떠돌이 같은 자들만 몇 명 있을 뿐.

비록 조산보가 하삼도의 수영처럼 제대로 된 수군 주둔지는 아니지만 명목상이라도 수군절도사인 내 휘하에 있는 주둔지다.

사실상의 파탄 상태로 방치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멍청히 서 있기만 한 수병들을 해산시키고 갑사에게 명을 내렸다.

“녹둔도(鹿屯島)에도 사람을 보내 확인하도록 하세요.”

“예.”

조산보 바로 맞은편에는 올적합(兀狄哈)이라 불리는 여진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올적합은 해서여진-야인여진 계열로, 야만성으로는 일대의 같은 여진족들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거주하다 조금이라도 아쉬운 구석이 생긴다면 거리낌 없이 강을 넘어와 노략질을 한다.

녹둔도는 이러한 올적합의 침략 경로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항상 여진족들에게 노출되어 사는 육진의 백성들이라 조금은 익숙해질 법함에도, 녹둔도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수확이 끝나면 조산보 쪽으로 피신했다.

‘달리 말하면 군사는 녹둔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지.’

조산보 만호를 지냈던 이순신 역시 당시에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했다. 어쩌면 만호는 녹둔도에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라면 심각한 문제이지만.

…….

심각한 문제가 맞았다.

“녹둔도에도 만호는 없었습니다.”

당일 오후.

녹둔도를 다녀온 갑사가 보고했다.

지금 만호의 이름이 유홍서(劉弘緖)던가?

과거 천성보 만호를 지내다 일대 백성들을 수탈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당한 경력이 있는 자였다.

그러고서 시일이 흘러 오지인 조산보의 만호로 다시 부임한 것인데, 반성이 없는 걸 보니 개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녹둔도에도 상주 병력은 있었을 텐데. 수소문은 해보셨습니까?”

둔전관이 있을 정도로 농사 자체는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녹둔도다. 때문에 녹둔도에는 토성도 있고 소수의 상주병력도 있었다.

그들이라면 조금은 다르기를 바랐건만.

“물론입니다. 모든 토병(土兵)들을 불러모아 만호에 대한 소식을 물어보았으나 만호의 행방을 아는 자는 없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상황이 방치되고 있던 건지.”

“……소관은 잘.”

갑사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경성에서 온 자였다.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조산보의 소식을 어찌 알겠는가.

나 역시 대답을 기대하고서 물어본 질문은 아니었다. 참다 못해 나온 한탄일 뿐이지.

이제 행방을 알아볼 곳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만호가 작정하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경흥부(慶興府)에는 있겠지요.”

조산보는 경흥부의 영역에 있었다. 관아가 있는 실질적인 경흥까지는 40리(里), 대략 16km 정도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가까운 경흥을 두고 더 먼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거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도록 하세요. 신변을 확보하는 과정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무력을 동원해도 좋습니다. 만호는 이미 죄인이니 데려올 때는 포박해서 데려오세요.”

“알겠습니다.”

갑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만호가 조산보에 없던 시점에서 이미 심상찮은 상황이 벌어졌으나, 금천부원군의 엄중한 지시를 보아 정말로 심상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종삼품 병마우후마저 떡으로 만들어버린 금천부원군이 아닌가?

종사품 만호가 몸을 건사하기는 어려우리라.

갑사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그렇게 홀로 남자,

“여기에서 묵게 되었군.”

현장만 파악한 다음, 어지간한 일은 경성으로 돌아가 처리할 생각이었다. 행정이나 제도 따위의 문제라면 경성에서 서면으로 처리할 수도 있고 만호를 닦달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만호 자체가 증발했다.

물론, 경성으로 돌아간 뒤 만호를 잡아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시일이 너무 소요되는 방식이었다. 내가 조산보를 방문한 것을 알고서 만호가 멀리 도망이라도 친다면 더 큰 일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피곤하게 되었어. 이 일로 만호에게 약점을 잡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별생각이 없는 놈은 이용하려다 되려 물리는 수가 있었다.

음성적인 일을 맡겼다가 그것을 도리어 나에 대한 약점으로 이용한다든지. 나와의 관계나 은밀한 지시에 대해 생각 없이 지껄이고 다닌다든지.

덜떨어지거나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놈은 완전히 찍어내는 편이 이롭다.

* * *

다음 날, 새벽.

사방은 아직 어두웠다. 기상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밖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대감.”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다, 이마를 쓸어내리고 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조산보 만호 유홍서를 잡아왔습니다.”

“무릎 꿇려두세요. 그리고 형구(刑具)로 쓸 수 있는 물건도 하나 구해두시길 바랍니다. 금방 나갈 터이니.”

“알겠습니다.”

발소리가 문간에서 멀어졌다.

나는 숨을 돌리며 잠기운을 떨쳤다. 경성에서 조산보로 꼬박 며칠이나 이동한 다음 처음으로 가진 잠이었다.

그런데 편히 쉬지도 못하고 중간에 깼으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어차피 만호는 잡아왔는데 편히 한 숨 잘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만호를 잡느라 경흥을 다녀온 갑사는 밤을 샜다. 잠깐이라도 잔 내 처지가 오히려 다행이었다.

“후.”

마지막으로 숨을 돌리고 거처를 나서니, 은하수가 수놓은 밤하늘 아래 죄인이 덩그러니 무릎 꿇려 있었다.

“그대가 조산보 만호 유홍서가 맞습니까?”

“대, 대감!”

유홍서는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기보다는 항변을 먼저 읊었다.

“소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이유는, 경흥부에 잠시 볼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지금처럼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으니 부디…….”

“하아.”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곁의 갑사에게 명했다.

“재갈을 채우고서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두십시오.”

“예.”

갑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동료들과 함께 죄인에게로 나아갔다.

유홍서는 묶인 몸으로도 발악을 하며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곧 입에 재갈이 채위졌고 갑사들은 밤을 샌 스트레스를 마음껏 발산했다.

하늘같은 금천부원군의 명령이니 꺼릴 것도 없었다. 고기 다지는 소리가 한참이나 난 후, 유홍서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자 나는 손을 들었다.

“그만. 충분합니다.”

갑사들은 순순히 물러섰다.

분풀이는 확실했으니.

사람의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다 피를 흘리는 것을 칠공분혈(七孔噴血)이라던가? 유홍서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유홍서 같은 인간의 목숨을 한 보따리 바치더라도, 조산보의 상황이 조정에 보고되었을 때 나에게 가해질 아주 사소한 정치적 타격조차 만회하기는 어렵다.

“이 사람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부하들조차 모를 정도로 한참이나 사라져 있던 놈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매혹적인 선택지였지만 갑사들이 있었다. 딱히 그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다.

역시, 생각해 둔 방법을 그대로 쓰는 수밖에 없나.

“다들 피곤하실 터인데, 서둘러 처치하고 쉬십시다. 이 사람이 준비하라고 일러둔 형구(刑具)는 어디 있습니까?”

조선의 관리인데 멋대로 쓱싹할 수야 있나. 법대로 처리하는 편이 최선이다.

다만 조산보는 소규모 주둔지로서 제대로 형을 집행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갑사에게 임시로나마 형구(刑具)로 쓸 수 있는 것을 마련하라 명했던 것이다.

이제 명을 받았던 갑사가 결과물을 가져왔다.

무려 사람 팔뚝만 한 두께의 나무 기둥이었다. 어디서 대들보라도 빼온 것일까?

반쯤 죽어 있던 유홍서도 형구의 등장에 다시 살아났다.

“……읍읍!”

그동안 조용히 있더니 죽은 척이라도 했나 보군. 하지만 갑사가 가져온 임시 형구를 보아하니, 어쩌면 곧 진짜로 죽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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