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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57화 (157/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57화

54. 오른팔과 왼팔 (4)

“어르신…….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율보리가 물었다.

떨리는 시선과 목소리는 추위 때문만은 아니리라.

조선은 여진족 대부분에게 적대적인 진영이었다. 그리고 적의 손에 잡힌 사람은, 설령 황제라 할지라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법이다.

율보리라고 모르지는 않으리라. 그는 무척이나 겁에 질린 채였다.

금천부원군이 되물었다.

“글쎄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율보리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는 냉혹한 여진족 사회에서 상당한 규모의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단순히 완력만 좋아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금천부원군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뜻이다.

적의 손에 잡힌 사람이 살고자 하다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했다.

율보리의 가치는 해란강 연합과 그의 부족에 있었다. 그러나 연합은 자중지란을 일으켜 격파되었고 한때는 위협적이었을 그의 부족은 수장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천부원군이 자신에게 아쉬운 것이 있겠는가?

남은 일은 이제 율보리의 목을 치고 머리 잃은 부족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육진 서쪽의 지역은 한동안 안전해지겠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원하는 일이 그것 말고 더 있겠는가?

짐작컨대 율보리 그의 앞날은 지극히 어두웠다.

“어르신께서 원하시는 바는 압니다……. 한평생 죽은 듯 조용히 살 터이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대가 장차 화근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부족마저 잃은 다음에는 무엇이 남겠습니까. 다른 늙은이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화근이 되고자 하더라도 불가능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율보리는 꾸벅 허리를 숙이며 몸을 웅크렸다. 지극히 굴욕적인 자세였으나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이다.

정말로 쥐 죽은 듯 살 생각이건, 힘을 모아 복수할 생각이건 일단 목숨은 보전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사람이 무서우십니까.”

금천부원군이 물었다.

율보리에게는 대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데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허장성세를 부리더라도 적절한 상황이 있는 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은 자살시도와 같다.

“……예.”

율보리가 당연한 대답을 내놓자, 금천부원군이 말을 이었다.

“사람의 감정은 연기와도 같지요. 지극한 은혜를 입어도 배가 부르면 감사함을 잃는 법이며, 들불 같던 증오심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에는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공포라도 다르지는 않겠지요.”

조금은 뜬구름 같은 소리. 하지만 율보리는 이해했다.

“만일 목숨을 보전하게 된다면 죽는 날까지 어르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감정의 휘발도 목숨이 붙어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금천부원군이 돌려서 말하기는 했으나, 율보리에게 살아날 길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율보리는 평소 이상의 통찰력을 발휘하는 타입이었다.

그가 금천부원군에게 한 대답은 실로 적절한 대답이었다.

그래서일까.

“만일 그대가 목숨을 보전하게 된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언제까지고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금천부원군은 보다 확실하게 자비의 의사를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목숨을 잃을 줄 알았던 율보리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는 기쁨으로 자신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는지도 모른 채, 서둘러 답했다.

“물론입니다!”

“……좋아요. 하지만 말처럼 공허한 것도 없지요. 한 때의 감정처럼 말입니다. 그대는 오늘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 사람에 베푼 자비심을 무위로 돌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가벼운 일 하나를 맡기겠습니다.”

율보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금천부원군이 자신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협조하지 않는다면 죽음 외의 결말은 없었다.

“말씀만 하십시오!”

금천부원군은 율보리의 적극성이 마음에 든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김자강이 동쪽으로 진출할 겁니다. 적절한 수준에서 협조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적절한 수준이라면?”

전력으로 협조하라거나, 최대한 협조하라는 것도 아니다. 적절한 수준으로 협조하란다.

율보리에게는 의아한 표현이었다. 어느 수준까지가 적절하단 말인가.

하지만 금천부원군은 친절한 편이 아니었다.

“천천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정도는 그대에게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이 있을 것 아닙니까?”

“…….”

율보리는 넓게 펼쳐졌던 생로(生路)가 다시 좁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항거할 수는 없었다. 율보리는 고민에 빠졌다.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어째서 김자강의 진출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확언하는 것일까? 마치 당연한 사실을 고지하듯, 평이한 목소리에는 그와 김자강 사이가 일반적인 관계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라는 직책은 국경 너머 여진족들을 다루기에는 불편한 위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자강에게 ‘적당히’ 협조하라는 것은……, 율보리 자신을 견제용으로 쓰겠다는 것!

이해를 마친 율보리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무슨 뜻이신지 알아들었습니다.”

“다행이로군요. 직접 말씀드리거나, 일일이 지시하기에는 번거로운 것이라.”

율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가치는 김자강의 견제에 있었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밝히거나, 혹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일일이 행동방침을 지시하는 것은 지극히 번거로운 일이다.

“처신에는 알아서 유의하실 걸로 알겠습니다.”

“예.”

“그대의 행보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그대의 가치가 달라질 겁니다. 명심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사람은 같은 자비를 두 번 이상 베풀지는 않아요.”

“……명심하겠습니다.”

율보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만일 금천부원군이 다른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와 다를 바가 없었더라면, 대부분의 경고는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일대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대한 연합체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원한다면 자신을 토벌하는 것은 조선의 관리라는 직함을 이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독립적인 세력을 이끌어온 율보리에게, 누군가에게 목줄이 채워지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과 자신의 부족은 금천부원군의 지배 아래에서 더욱 번영할지도 몰랐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다. 김자강이라는 훌륭한 증거가 있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 *

달포가 꼬박 흘렀다.

별다른 일 없이 보고만 받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평소에도 지겹게 보던 공무는 이렇다 할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여진족들이 찾아왔습니다.”

병마평사 이원익이 알렸다.

집무실을 나서니 과연 몇 명의 여진족들이 뜰에 자리해 있었다. 개중에서 유난히 익숙한 얼굴이 둘 있었다.

“어르신…….”

김자강과 율보리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예를 올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편할 수가 없는 사이였다.

김자강은 율보리가 장악한 해란강과 일대의 평야를 차지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그 결과로 다른 해란강 연합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나름의 소득을 거두었으나, 정작 젖과 꿀이 흐르는 해란강과 일대 평야는 차지하지 못했다.

율보리의 부족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김자강 입장에서는 율보리가 싫을 수밖에 없다. 또 율보리 역시, 자신의 영역을 수시로 아쉬워하는 김자강이 싫을 수밖에 없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부하들이 힘을 합치는 것보다야, 서로 은근히 다툼을 해줘야 관리가 쉬운 법이니.

“무슨 일들로 찾아오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김자강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공공연히 할 말은 아니기 때문이겠지.

나는 이해했다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중요한 일인가 보군요. 하지만 먼 곳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을 터인데, 일단 짧게라도 쉰 다음에 본론을 나누도록 합시다.”

말을 마치고 동헌으로 발을 옮기니 김자강과 율보리는 감사를 표하고는 쫓아왔다.

보는 눈이 적어지자 나는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각자의 수행원들은 동헌 주변에 경계부터 세우세요. 밖에 말이 나돌아 다니면 위험하니. 그렇다고 대놓고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말고.”

“예.”

그동안 동헌 대청에는 주안상을 마련했다. 준비가 끝마치자 나는 두 사람을 좌우 옆에 앉혀두고 안쪽 상석에 자리했다.

먼저 한 잔씩 했다. 기껏 마련해둔 주안상이 식어가도록 방치만 할 수는 없으니.

하지만 중요한 논의가 있는데 먹고 마실 수만은 없는 법이다. 간단히 입술만 적시고는 입을 열었다. 민감한 이야기였으므로 여진어를 이용했다.

“본론부터 나누지. 무슨 일들로 찾아온 건가?”

김자강이 나섰다.

“어르신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했습니다. 해란강에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 해안이 닿을 때까지 확장하며 여러 부족과 땅을 정복했지요.”

“좋은 소식이로군요.”

“다만…….”

“다만?”

“저쪽의 율보리가 자신도 공헌한 것이 있으니 노예와 땅 일부를 요구하지 않겠습니까?”

김자강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 쳤다. 그에게 율보리는 굴복한 자였고 필요에 의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자였다.

협조했다고는 하나 그것이 자의는 아닐 터.

그럼에도 지분을 요구하다니 괘씸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반대로, 율보리는 한쪽 입술만 올린 채 건방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자강과 그의 편인 회령 여진족들을 홀로 맞설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행동에는 정당성이 있었다. 바로 그들이 충성하는 금천부원군이 자신에게 견제역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동쪽 땅의 지분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율보리에게도 욕심은 있었고 때마침 좋은 명분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김자강만 재미를 보는 것도 싫었다.

‘두 사람의 생각이 참으로 뻔하군.’

나는 잔을 기울였다. 일면으로는 단순한 사람들이다.

물론 내가 김자강에게 동쪽 해안까지 정복하라고 했고 율보리에게도 적당히 협조하라고 명을 내려두었다.

김자강이나 율보리의 세력의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김자강이 믿을 것은 나뿐이었고, 나 역시 강 너머에서는 믿을 게 김자강뿐이었다. 전자는 이롭지만 후자는 불안했고 용납할 수도 없었다.

적절한 시점에서 나는 다른 끈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독립적인 나의 세력권이었다. 조선 안에서 갖출 수는 없으니 강 너머에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나의 권위를 믿고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쌍방 모두가 납득할 수밖에 없는 판결을 얻고자 나를 찾아온 모양인데.

이 솔로몬에게 아기를 갈라 반으로 나누라는 판결로 진짜 엄마를 찾으려는 명안 따위는 없다.

한참 전부터 아기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생각만 잔뜩 하고 있었지.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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