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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56화 (15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56화

54. 오른팔과 왼팔 (3)

며칠 뒤.

여전히 종성.

판관 김일준이 병마우후 정승복과 함께 정예병을 이끌고 떠난 뒤로 지역의 행정은 판관 이주(李澍)가 도맡고 있었다.

마흔 초반의 사내로, 초면의 인상은 무척이나 강직했으나 면식을 트게 되자 그런대로 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진족들에게 그런 쓸모가 있었군요.”

볼하진 습격 당시, 배후를 캐는데 회령 여진족들이 도움이 되었던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나에게는 단지 옛일일 뿐이었으나 당시의 나는 회령의 판관이었다. 처음으로 시작한 관직이었고 판관을 지낸 이래로 나는 끊임없이 영전해왔다.

종성판관 이주에게는 충분한 롤모델이다. 지역은 다르지만 종성은 회령 바로 옆에 있었고, 그 역시 과거의 나와 마찬가지로 판관을 지내고 있으니까.

내가 답했다.

“딱히 여진족들을 이용할 생각으로 그들과 교류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회령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했고, 그러다 면식을 트게 되었지요.”

“흐음. 소관이 열정을 가지기에는 늦은 나이이긴 하나 지금이라도 여진족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관직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이준은 그의 상관인 종성부사 김일준과 고작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비슷한 연배인데 누구는 종오품이고 누구는 종삼품이었다. 과연 자신은 두 해 뒤에 김일준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관직을 지내고 있을까.

호승심이나 출세욕이 있는 사내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실망스러우실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은 이 사람이 지나온 행보가 성공적인 관직 생활과 직결되는 출세의 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

“이 사람은 설령 모두가 천하게 여기는 노비에게도 존대를 합니다. 이 판관께서는 그것이 이 사람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조선은 철저하게 인간의 상하가 나뉘는 신분제 사회다.

그 속에서 귀족인 사대부가 노예나 다름없는 노비에게 존중을 드러낸다면, 가식이라 할지라도 이해받기 힘들었다.

특히 양반들에게는 자신들의 이권이 걸린 신분제 사회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 아닌가.

잘 쳐봐야 별종이었고 자기편도, 능력도 없는 놈이 그러고 나대면 반동분자였다. 사회에서 당장 적출해야 마땅한.

이주가 나처럼 되고 싶다고 나처럼 행동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만일 성공을 원하신다면, 성공률 높은 방도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노골적으로 출세의 비결을 물어보면서도 딴에는 진중했던 이주였다. 그런데 성공률 높은 방도가 있다니 체면도 잊고서 다급히 재촉하고 있었다.

역시 이주는 평범한 사람이다. 때마침 내가 제안하려는 방도 역시 이주와 같은 부류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이었다.

“단순하지요. 대세를 쫓아가는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은 길은 잡초가 무성하고 관목이 지저분하게 자랐지요. 그런 길을 걷는 것보다야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가 잘 다져놓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훨씬 쉽고 빠릅니다.”

이 정도면 천기누설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남의 뒤만 졸졸 쫓아서는 절대로 용의 머리는 될 수 없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용의 꼬리는 될 수 있다.

일설로는 용의 꼬리보다 닭의 머리가 낫다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당장 십이지(十二支)의 순서가 정해진 설화만 해도 그렇다. 쥐가 일등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앞서 달려나가던 소의 뿔에 매달려 있다가 결승점에서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음.”

하지만 이주는 시원스레 긍정하지 못하고 침음만 흘렸다.

“대답이 성의 없이 느껴지셨습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대세에 영합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서 말이에요. 적어도 그 방식이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이주는 사양하면서도 아쉬운 티를 드러냈다.

하지만 나는 이 주제로 잡담을 더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근래에 강 너머에서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까? 아시겠지만, 이 사람이라고 세상 만사의 일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아.”

이주는 때마침 해줄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병마우후와 부사 편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문의 양식을 갖춰 올리겠다고 했습니다만, 승리에 비격진천뢰가 주효했다 합니다.”

“그래요? 이 사람의 노고가 헛되지는 않았군요.”

“대단하십니다.”

“현장의 사람들이 적절하게 이용한 덕이지요. 어떠한 발명이라도 적재적소에서 쓰이지 않는다면 효용을 다할 수 없는 법입니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조총과 비격진천뢰는 대단한 무기가 맞았다.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였으니까.

조총은 칼과 창이 부딪혔던 냉병기의 시대를 종결시켰고 비격진천뢰는 무식한 쇳덩어리 포탄의 시대를 종결시켰다.

이만한 무기로 무장했는데 어떻게 패배할 수 있겠는가?

판옥선과 거북선으로 무장한 불패의 조선 수군을 단 한 번의 전투로 괴멸시킨, 도를 넘을 정도의 쓰레기가 아니고서야 말이다.

“공문이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군요. 두 사람에게는 전투가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사사로운 것들은 김자강에게 맡기고 늦지 않게 귀환하라고 전해주세요.”

군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지만 조선에서는 민감한 일이었다.

자칫 군대가 반란군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조선부터가 지휘관의 반란으로 건국된 영향이 컸다.

그리고 사다리를 걷어차려는 건 위정자의 소양이었다.

자신들은 군사 쿠데타로 건국되었지만 그 쿠데타를 자신들이 당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율호의 습격으로 나는 한 차례 능동적으로 공격을 ‘방어’한 적이 있었다. 적지나 다름없는 강 너머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맞서 싸웠다.

그러고서 오래지 않아, 일부나마 병력이 다시 강을 넘어갔다.

조정에서는 나를 호전광이거나 공을 달성하고자 무리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딱 좋았다.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부스럼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속히 귀환하라는 대감의 명을 전달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대 역시, 군을 맡느라 자리를 비운 부사를 대신해 목민관의 업무를 전담하고 있으니 그 노고를 내가 조정으로 보내는 장계에 반드시 기록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화색을 띠는 이주였다.

종성부사 김일손과 병마우후 정승복이 귀환한 건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제대로 씻고 먹지도 못하고서 몸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떠나고서 고작 보름도 지나지 않았거늘 안색이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반대로 밝았다.

승리를 거두어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대승을 감축드립니다, 금천부원군 대감.”

“대감.”

뜰에 자리한 두 사람이 예를 표하자, 대청에 앉아있던 나는 손을 내저어 사양했다.

“대승이랄 것까지야. 단지 명령에 불응한 적호들을 엄단하였을 뿐이니 통상적인 전투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

나의 사양에 아쉬움을 얼핏 드러내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로서는 이번 전투와 승리가 크게 포장될수록 더 주목받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금천부원군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순신은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두 사람을 기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김 부사와 정 우후께서 아조와 전하의 지엄함을 증명한 일이 작다고는 못하겠지요. 더욱이 그대들은 이 사람에게 대승을 축하한다 했지만, 이 사람은 딱히 한 일이 없으니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번 전투의 승리는 전적으로 두 사람이 이뤄낸 것입니다.”

나는 이번 전투로 조명받을 생각이 없었다.

선조의 최근 행보를 보면, 내가 관심을 받는 것은 독이다.

그는 자신을 능가한 나의 존재감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래서 애먼 여진족 족장들을 불러다가 같잖은 쇼도 벌이도록 명하지 않았던가.

내가 더 주목을 받아봐야 마찬가지의 귀찮은 일만 생길 터였다.

차라리 이번 전투의 공은 전적으로 부사와 우후에게 넘기는 편이 이로웠다. 설령 그러더라도 상관인 내가 언급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두 분께서 괜찮으시다면 이 사람은 공문에서 그대들의 공을 집중적으로 밝히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과장을 할 수는 있어요. 너무 솔직하게 쓴다면 의도와는 달리 이 사람의 이름이 더 강조될 수도 있으니까.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군요.”

“아, 아닙니다!”

“소관들은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정승복과 김일손은 사양하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최고 지휘관인 금천부원군이 자신의 공로마저 양보해주겠다는데, 약간의 각색이야 누구 말마따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간의 평가가 옳았다.

금천부원군 이순신은 아랫사람들에게 실로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뭇 사람들은 그의 천성이 오만하여 양보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어찌 그게 오만한 자가 보일 행동이란 말인가?

공공연히 군자(君子)라고 평가하기에는 조금 민망할지 몰라도, 그가 대인(大人)의 풍모를 가지고 있음은 확실했다……,

가 정승복과 김일손이 내심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럼 그렇게 된 줄로 알고 장계를 작성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건 간에 자신의 원하는 것만 딱 취하고 뺄 것은 빼는 이순신이었다.

해란강과 율보리를 확보한 시점에서 이순신의 대 여진족 영향력은 사실상 곱절 이상으로 늘어났다.

조만간 그 영향력의 범위도 더 넓어지겠지.

모두가 만족하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 * *

당일 밤.

종성에서 나의 역할은 끝났다. 공식적인 업무에 한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양지의 업무만이 나의 업무는 아니다. 나는 여러모로 바쁜 사람이었고 경성으로 귀환하기 전에 종성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여기입니다.”

을룡이 안내했다.

이곳은 종성 관아 뒤편. 국경의 혼란도 수습되어 긴장의 끈이 풀어질 법은 하지만,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나보다 을룡이 먼저 방문했으니 미리 손을 써두었는지도 모른다.

감옥으로 통하는 문은 나무 창살로 되어 있었다. 혹한의 북방임을 감안하면 배려심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죄인들에게는 그게 합당한 처우일지도 모르겠지만.

-끼익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니 코끝으로 습기 묵은 나무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느껴졌다. 내부는 약간의 달빛만이 닿아 맨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특정 감악이 차단되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던가.

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멀지 않은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인기척이다. 나의 인기척에 반응한.

오늘의 주인공이다.

-저벅, 저벅

폐쇄적이고 좁은 감옥에서는 발소리마저 크게 울렸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의 앞에 이르렀다.

율보리.

“……어르신.”

그는 무척이나 초췌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회령강과 부유한 초원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대부족의 족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조선의 입장에서 그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천호(千戶)가 아니라 만호(萬戶)일지라도 감옥에 수감된 이상 언제 목숨이 떨어질지 모르는 야만인 추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을 율보리도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거나, 살거나.

당연하지만 둘 중에 하나 아니겠는가.

하지만 고작 목이나 칠 생각이었다면 내가 야밤에 율보리를 찾아올 리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는, 물론 전적으로 율보리의 협조성에 달려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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