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55화
54. 오른팔과 왼팔 (2)
해란강 연합의 구성원이 수장인 율보리의 명령 없이 돌발적으로 적대행위를 했다.
다행인 점은 율보리가 조선의 영내인 종성을 방문한 상태라는 거다.
사실상 배반자는 율보리가 죽기를 바라면서 돌발행동을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차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연합.
회령 여진족들은 그다지 강성한 세력이 아니니 남은 자들이 적당히 저지하고, 죽은 율보리의 영역을 갈라먹자는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연합을 통해 안정을 얻으려던 율보리였으나 정 반대의 결과물만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이건 명백한 내란이었고 율보리에 대한 적대행위였으니까.
“율보리, 나는 김자강의 말대로 분명 그대들에게 중재가 이루어질 동안 일체의 적대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엄중하게 경고를 했소만.”
중재가 끝난 시점에서 나는 다시 공대를 취했으나, 보아하니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조에는 일말이나마 배려심이 있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율보리를 배려할 생각이 있어서가 아님을, 나도 율보리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대는 이 사람의 말이 말 같지 않나보군.”
“아, 아닙니다!”
율보리는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채, 과장된 손짓으로 부정을 표현했다.
“분명 놈들에게는 중재가 이어질 동안 트집을 잡힐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일체 금지한다고 명령을 해두었는데…….”
행동 만큼이나 적잖이 당혹했는지 말을 막 내뱉는 율보리였다.
트집이 잡힌다니, 마치 조선이 트집을 잡고서 이용할 것을 우려라도 했다는 말인가. 평소라면 이따위 말실수는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어쩌겠나.
이 자리에서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데.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만, 지금 머리가 이미 호랑이 입에 들어와 있는데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법이다.
“지금 나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네. 이 사람의 경고를 무시한 그대와 그대 일파를 적호로 판단하고 적절한 처벌을 내리는 것.”
당연하지만 당장 율보리를 처형하고, 군사를 일으켜 해란강 연합을 박살내는 것이 ‘적절한 처벌’이 될 터였다.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율보리에게는 최악의 일이겠지.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겠지만 주변에는 무장한 갑사들이 드글드글했다. 분위기도 읽었는지 다들 환도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여차할 경우 당장 율보리를 베어버리겠다는 듯.
율보리로서는 함부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부, 부디 그것만은…….”
그저 애원하며 자비만 구걸할 뿐.
다행스럽게도 나 역시 율보리가 당장 죽거나, 번잡하게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원치 않는다. 용건은 두 번째 선택지에 있었으니.
“다른 하나는 그대가 이번 행위로 입은 죄과를 직접 씻어내는 거요.”
살아날 일말의 가능성이 생겨서인가. 율보리는 누가 보채지도 않았거늘 다급히 답했다.
“기회만 주신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의 죄과를 씻어내겠습니다.”
아주 협조적인 태도였고,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서찰 한 통 쓰게 해드리지요.”
율보리에게도 그를 보필하는 자식이나 형제들, 혹은 부하들이 있을 터였다.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부족들이 돌발 행위로 족장을 죽기 일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겠지.
나는 동행한 병마평사 이원익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나자, 율보리는 힘없이 답했다.
“……예.”
흠.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잘 풀리는 바람에, 마련해둔 희생양들은 쓸모가 없어졌다.
기왕 죽을 거라면 애국자로서 죽는 편이 그들에게도 좋았을 텐데.
하늘이 나의 편일지라도 그 친구들 편은 아닌 것 같군.
나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은 채 율보리를 감시하고 있는, 병마우후 정승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내려달라는 듯.
나는 기꺼이 명을 내려주었다.
“일전에 큰 죄를 지어서 신병을 확보해둔 두 죄인이 있을 텐데. 군법대로 처리하세요.”
이어 나는 검지로 목을 그었다.
군법 자체가 다른 법에 비해 엄격한 편이긴 하지만, 아직 전시는 아니었고 간부 앞에서는 유순해지기 마련이었다.
갑사 나부랭이라도 일단 관품은 있는 족속들이니.
하지만 나는 군인 신분으로 주둔지 주민을 강간하거나, 보급 물자를 횡령하는 등의 팔자 좋은 짓거리를 봐줄 생각은 없었다.
쓸모도 없어졌다면 더더욱.
“알겠습니다.”
나의 신호를 이해했는지 다시 고개를 꾸벅이는 정승복이었다.
* * *
여전히 종성.
율보리는 서찰을 보낸 뒤, 즉시 억류되었다.
그리고 나와 김자강은 보다 편해진 분위기로 다시 자리를 가졌다.
먼저 입을 연 쪽은 김자강이었다. 그 역시 이 흐름이 싫지만은 않았는지 만족감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였다.
“놈들이 이런 실수를 해주다니요? 실로 멍청하고 아둔한 놈들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해란강 여진족들이 자중지란을 일으키다니.”
“음.”
김자강은 가볍게 운을 떼고는 말했다.
“방금 자리에서 말씀하셨던…….”
“편하게 말씀하세요.”
“중재가 파토가 났는데, 감찰의 파견도 무산된 겁니까?”
감찰의 파견은 김자강도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전해 들은 바가 없었으니까.
당연히 율보리가 중재안을 거부하게 만들기 위함임은 알았지만 혹시라도 그가 고개를 숙일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이때다 싶어 회령과 해란강 모두 감찰이 파견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건 조선만 좋은 일이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나의 사람을 꽂아 넣는다면 몰라도, 적어도 당장은 내 세력권인 회령 여진족들과 곧 나의 세력권이 될 해란강에 조선의 감찰을 왜 넣겠나?
김자강의 걱정은 실로 기우였다.
“그렇게 됐군요.”
“다, 다행입니다.”
순진하게도 안도하는 김자강이었다.
급한 불은 꺼서일까.
이제는 호기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율보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앞으로의 행보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죽이시지요. 중재안을 받아들일 때의 태도를 보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자입니다.”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은 그가 협조를 해주고 있으니까요. 기회를 주기로 했는데 이를 어기고 정당한 명분 없이 죽일 수는 없습니다.”
김자강은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어찌됐건 율보리는 자신과 맞서 싸운 자. 사소한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여진족 사회에서 관용은 사치였다.
물론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은 있다. 아무리 적이라도 손님으로 초대한 사람에게 위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던가 하는.
있지만 일면으로 김자강은 이미 선을 넘어섰다.
조선을 등에 업고 다른 여진족들을 정복하고 있었으니까. 민족주의를 운운하기에는 이른 시대였지만 적어도 김자강이 최근 보인 행보는 다른 여진족이 곱게 용납하기에는 어려운 부류에 속했다.
기왕 고개를 숙였다면 최대한 이익을 취해야지 않겠는가? 거기에는 조선의 손을 빌려 적을 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내가 협조하지 않을 뿐.
“알겠습니다. 그럼…….”
김자강이 조심스럽게 청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적들이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지금, 그들과 맞서야 하는 김자강에게 적기는 없다.
하지만 이 흐름은 오직 김자강만 재미를 보는 흐름이었다. 덕분에 차질 없이 해란강을 장악할 수는 있겠지.
나아가 동해안이 있는 영역까지 세를 뻗을 것이다. 물론 그 땅은 나의 것이 되겠지만, 조선이고 김자강이고 완충지대는 될 수 있을지언정 마음 놓고 믿을 수는 없었다.
때마침 나는 수하로 둘 또 다른 여진족 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할 때 알아서 잃을 게 많아진 율보리는 실로 적절한 포섭 대상이었다.
물론 그가 진심으로 나에게 충성하리라 믿지는 않는다.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고 그런 가능성 낮은 일이 막연히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건 멍청한 발상이었다.
다만 율보리가 언제까지고 나에게 아쉬운 구석이 있는 한.
그는 나에게 충성할 터였다.
방금 전 절박하게 목숨을 구걸하였듯이.
“자리도 파토났겠다, 아쉽지만 슬슬 보내 드려야겠지요. 하지만 율보리가 아조의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이 사람으로서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종성부사 김일준과 병마우후 정승복을 불렀다. 두 사람은 나의 호출을 받들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김일준이 담담한 어조로 예를 표하자 내가 물었다.
“김 부사께서는 공을 세우고 싶으십니까?”
“공이라니요……? 물론 나라를 위한 공훈이라면 이 한 몸 바쳐서 언제든지 세우고 싶을 뿐입니다.”
“이 사람이 개인적인 편의를 봐 드리려고 드린 말씀은 아니고.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율보리의 수하 중에서 하나가 이 사람의 경고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회령 여진족들을 공격했다는군요.”
“괘씸한 자들입니다.”
“맞아요. 쓴 맛을 보여주어야지 않겠습니까?”
대답이 정해진 뻔한 질문에, 김일준은 과연 정해진 뻔한 대답을 내놓았다.
“맞습니다! 아조와 전하, 그리고 금천부원군 대감의 면을 위해서라도 율보리를 비롯한 적호(賊胡)들을 엄중히 치죄할 필요가 있습니다.”
“병마우후가 지난 방어전에서는 공을 세우지 못해 매우 한스러워 하던 참입니다. 마침 김 부사께서도 마음이 있으신 듯하니. 두 분에게 기회를 드리도록 하지요.”
“명을 내려주신다면 따를 뿐입니다!”
김일준의 황송하다는 대답 옆에서 병마우후 정승복 역시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그가 감영까지 찾아와 공을 세우지 못한 것을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내가 주도한 퍼포먼스에서 매를 맞는 본보기가 되어 요양하던 탓이었으므로 나도 보답을 해주고 싶던 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군을 전부 보내 처단에 힘쓰고 싶지만, 조정과 논의를 거치게 된다면 일이 차일피일 늦어질 터이므로 정예병들만 맡기겠습니다. 김자강의 도움을 받아 적호들을 격멸하세요.”
“예!”
“명을 받드옵니다!”
“율보리에 대한 처벌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데다,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다니 그들이 선제공격하지 않는다면 그의 부족까지 격멸할 필요는 없습니다. 처우는 나중에 정해도 좋으니 일단은 수족을 모두 꺾어두는 정도로 충분하겠지요.”
두 사람이 이해했다는 듯 예를 표하자, 나는 볼일들 보라는 듯 턱짓했다.
때마침 이번 전투에서는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비격진천뢰까지 대동한 채였다. 두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부족하지 않게 이행한다면 조총에 이어 비격진천뢰까지 검증을 받게 되겠지.
해란강 연합에서 율보리를 제외한다면, 속 빈 강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김자강의 주력이 함께한다면 어려운 표적은 아니다.
나 때문에 고생하고서 징징대는 부하도 챙기고. 옛날에 내가 직접 발명했던 무기도 조명하고.
김자강을 내버려두면 율보리의 부족까지 조져버릴 테니 겸사겸사 감시도 붙였다. 율보리를 살려둬야 김자강을 견제할 수 있으니까.
이거야말로 일거삼득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