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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54화 (15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54화

54. 오른팔과 왼팔 (1)

율보리는 이 자리의 결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는 않겠지.

하지만 빠질 수는 없었다. 병마절도사가 사실상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김자강과 조선이 힘을 합치는 경우는 최대한 막아야 했다.

이번 중재로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보단 낫겠지.

하지만······.

‘내가 손해를 보면 다른 놈들이 가만히 있을까?’

율보리는 오랜 세월 주변 세력들과 다퉈왔다.

놈들은 호시탐탐 해란강과 강 주변의 방대한 평야를 노렸고 율보리는 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줄을 타는 기분이었다.

이때 김자강의 준동은 일대 여진족들의 이목을 돌리기에는 실로 적절한 소식이었다.

율보리는 김자강과 그를 따르는 회령 여진족들과 맞서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그동안 자신과 경쟁했던 군소 부족장들과 힘을 합쳤다.

덕분에 한동안은 즐거웠다. 회령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을 탈취하면 경쟁도 당분간은 줄어들겠지. 전우로서 함께 싸웠던 일대 부족들 역시 이전과는 다른 관계를 성립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에서 이겼을 때만 유효한 예측이다.

연합이 어떠한 성과도 이뤄내지 못한 지금, 중재로 전쟁이 중단된다면 어떠한 성과도 이뤄내지 못한 율보리는 다시 모두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으음!’

율보리는 속으로 쓰게 침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중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전쟁을 속행한다면 조선이 개입할 테니까. 그렇다면 명백하게 파멸을 맞이할 터였다.

“······감히 조선국과 전하, 그리고 어르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특정 세력이 준동하여 일대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김자강이 개입했다.

“평화를 어지럽힌다니? 일대의 여진족들은 말로만 번호(藩胡)를 자처하고 진심으로 충성하지 않으므로 나서서 간적을 처단했을 뿐이니, 약간의 소란은 발생했을지언정 그게 평화나 조선을 위한 일임은 명백하지 않나?”

김자강의 전쟁 명분은 조선에 입조하여 충성을 증명하라는 것을 주위 여진족 족장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억지나 다름없는 요구에 누가 응하겠는가? 그냥 한 판 붙자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건 김자강도 알고 있었고 율보리도 알고 있었고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순 억지나 다름없는 입조 요구라도 조선의 영내에서는 다르다. 조선에서는 ‘그럼 입조하면 그만이지, 왜 안 하겠다고 버티다가 맞아? 내가 생각해도 괘씸하네’ 하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율보리는 입술 안쪽을 깨물고는 어렵사리 답했다.

“그대만 번호(藩胡)인 것도 아니고, 조선에 충성하는 것만은 아닐진대 각자의 사정을 무시하고 무작정 입조를 요구하고 그것에 응하지 않았다고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오만한 행위요!”

“충성은 자신의 사정을 가려가며 해야 하는 것인가? 나와 나의 동료 족장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조하여 충성을 다시금 맹세하였는데, 어찌 그대들이라고 못한단 말인가?”

“그대의 경우는 다르지!”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조선과 국경이 닿아 있으니 적어도 배후는 안전할 테고, 여차할 경우 도움을 받기도 쉽지만 해령강은 먼 데다 주변에 적호(賊胡)들이 많아서 자칫 부족이 사라질 수도 있단 말이오!”

“단지 조선을 믿을 수 없다는 소리를 길게도 하시는구려.”

“······당연히 조선을 믿고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적들이 주변에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오. 조선에 충성하는 우리들이 사라지게 된다면 빈자리는 적호(賊胡)들이 차지하게 될 터인데, 그것을 감내하는 것이 조선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김자강과 율보리는 앞다투어 조선에 대한 충성을 경쟁했다.

물론 어느 쪽이건 진심으로 조선에 충성한 적은 없다. 전쟁을 일으킨 것도, 그에 항거해 적절히 연합을 일으킨 것도 각자를 위한 일이었다.

단지 조선의 고관 앞이기에 그간의 행보들은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고 포장할 뿐.

나는 조선의 충신이 아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자, 자.”

나는 격화되는 논의를 저지하고는 입을 열었다.

“두 분 모두 진심으로 조선에 대해 충성한다는 것을 알겠소이다. 하지만 진실로 조선에 충성한다면 오늘날 아조에서 큰 골칫거리가 된 변방의 소란을 멈추는 데 전적으로 협력해주셔야 할 것이오.”

“······.”

“당장 전투를 중단하고 군대를 해산시키시오. 그리고 당분간 혼란을 수습하고 위험한 행동을 몰래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 감찰을 파견할 터이니, 그들이 공무를 이행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각별히 지원해주어야 할 것이오.”

고지나 다름없는 중재였다.

더군다나 전투의 중단은 몰라도 감찰의 파견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마치 이때다 싶었다는 듯 변경에서 힘을 쓰는 부족들을 조선이 멋대로 통제하겠다는 게 아닌가.

이러한 강요에 반발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이 자리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아는 김자강도 순간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으니.

율보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전투를 중단하게 된다면, 이미 저들의 공격을 받아 복속된 부족들의 처우는 어떻게 하시라는 말씀이십니까? 게다가 감찰이라니요?”

“영구적으로 감찰을 배치하겠다는 게 아니라 당분간 두고서 그대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두고 보려는 것뿐이오.”

“그렇다면 언제 돌아간다는 겁니까?”

“일대가 안정되고 그대들이 싸우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감찰이 언제 돌아간다는 확약조차도 없이 무작정 파견하시겠다는 건, 두고두고 감시하겠다는 말씀과 다르지 않잖습니까?”

“흐음.”

나는 짐짓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을 내비쳤다.

“나는 그대들이 앞다투어 충성을 경쟁하기에 이 정도의 중재에는 기꺼이 응할 줄 알았네만. 적어도 그대는 중재에 응할 생각이 없는 듯하군.”

“······.”

율보리는 안쪽 입술을 씹었다. 실로 터무니없는 폭거였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싸우겠다는데 조선이 개입한다는 것부터가 율보리에게는 지극히 불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감시까지 파견하겠단다.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너는 이런 대우에 불만이 없냐는 의도로, 율보리는 김자강을 노려보았다. 김자강 역시 당혹감을 드러내고는 있었으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정녕 진심으로 조선의 주구라도 되고 싶은 것인가.

아니.

놈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탓일지도 몰랐다. 이미 조선의 도움을 여러 번 입었고 전쟁도 조선의 이름을 팔아서 벌였기 때문이다.

‘한심한 놈, 그러고도 여진족이냐!’

사실 김자강을 비롯한 회령 여진족들은 순수하게 여진족이라기에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다.

한때 야만적이었던 그들의 조상은 수시로 조선의 국경을 침탈하여 주민들을 납치했다. 지금의 회령 여진족들에게는 납치당한 조선 백성들의 피가 짙게 남아 있었다.

문화적인 영향도 크게 받았다. 머리 역시 여진족 특유의 변발을 하지 않고 덥수룩하게 길러놓았다. 머지않아 조선식으로 상투도 틀 게 분명했다.

자존심이라곤 추호도 없는 모습.

그렇기에 위험했다.

놈들이 이대로 조선에 붙을 생각이고 어떠한 손해도 감수할 생각이라면, 율보리 역시 똑같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방적인 조처를 받아들였다간 연합을 구성한 다른 여진족들에게 명백한 적이 될 터였다. 자신들을 조선에게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말이다.

‘차라리 전쟁을······.’

어떤 선택을 하건 자신은 파멸을 면치 못한다. 조선에게 굴복하고 일대 여진족들에게 적이 되어 두고두고 당하느니, 차라리 화끈하게 맞부딪치는 편이 마음은 편하리라.

물론,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반감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두 발로 걸어서 들어왔던 문을 누워서 나가는 수가 있으니까.

일단은 당해주는 척을 하고서 해란강으로 돌아간 뒤 후일을 도모하면 되리라.

마음을 굳힌 율보리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의 중재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

이순신은 확인하듯 되물었다.

율보리의 고민은 길었고 대답은 늦었다. 굴복하듯 아래로 깔린 목소리 너머에는 긴장감과 적대감이 짙게 묻어났다.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이순신이 아니었다.

통상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을 기만하고자 거짓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거나 약속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의도한 바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건 의도된 대답이었다.

“좋소이다. 율보리 그대가 강대한 번호(藩胡)의 주인으로 대조선을 향한 충심을 증명하였으니, 일대는 평화로워질 테고 조션 역시 그대의 올바른 판단에 감사를 표할 거요.”

“당연한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율보리 편으로 감찰이라는 딱지를 붙인 희생양들을 보내면, 율보리는 그들을 처단하겠지. 파견된 관리의 죽음만큼 전쟁을 일으키기 좋은 명분은 없다.

희생될 사람들이 불쌍하지만, 뭐.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나라고 이 계획의 잔혹성을 모르지는 않는다. 같은 값이라면 다홍치마라고, 어차피 죽을 놈이라면 죽어주는 편이 이로운 자들이 합당하다.

최근 갑사 중에서 귀화한 여진족 여인을 겁탈한 자와, 군량미를 알음알음 횡령하다가 죄상이 발각된 자가 있었다.

계획을 수립하던 중이었으므로 나는 군법의 이행을 잠시 미뤄두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입었음에도 적의 칼에 죽게 하여 애국자로 만들어주니, 나는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좋고 희생자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자. 중재가 적절한 합의에 도달했으니 제공들께서는 돌아가셔도 좋소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사람이 미리 선발해둔 감찰들을······.”

말을 이어가던 찰나.

토병(土兵) 몇 명이 여진족 하나를 대동한 채 다급히 관아로 들어섰다.

다들 무척이나 다급한 인상이었다.

토병 중 하나가 여진족에게 고개를 까딱이자, 여진족이 짧게 감사를 표하고는 나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어르신!”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고.”

여진족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격을 당했습니다! 일단은 패퇴하기는 하였으나, 수십 인의 전사가 죽었습니다.”

이에 김자강이 외쳤다.

“뭐라?!”

여진족은 김자강 쪽 사람이었나. 그는 무장이 해제되었음을 잊었는지, 허리춤을 더듬다 미간을 찌푸리곤 율보리에게 나아갔다.

“중재가 진행될 동안 적대행위는 중단해야 한다는 어르신의 당부는 잊었나?”

“그, 그게.”

율보리는 당황한 투였다.

이번 습격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연합체 족장 중 일부가 돌발 행동을 벌인 거겠지.

과거 서로 치고 박았던 사이였고 필요에 의해 잠시 맺어진 연합이었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좋은 미래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유의미한 결과도 내지 못한 채 맹주를 자처한 율보리가 조선의 호출을 이유로 자리를 비웠으니 구성원들이 얌전히 있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있었다.

“이 자식!”

김자강은 율보리를 한 대 치겠다는 듯 주먹을 치켜들고는 성큼 나아갔다.

그 순간.

“거기까지.”

이건 아주 좋은 호재였다.

순간, 일이 이렇게 되나? 싶을 정도로.

만일 내가 회령 여진족 외에도 사사로이 부려먹을 수 있는 여진족 세력이 있었으면 이런 상황을 그렸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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