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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53화 (15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53화

53. 빛과 소금 (3)

제기랄.

기대와는 달리 불안으로 가슴이 떨렸다. 함에 담긴 것이 순도 높은 진짜 은이건, 은으로 위장한 쇳덩어리건 까봐야 알 수 있었다.

꿀꺽.

입에 한가득 고인 침을 삼키고 뚜껑을 열었다.

-달그락

한없이 가벼운 뚜껑의 마찰음이 있고 나서.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자태라고 해야겠지.

“……!”

심장이 다시 한번 철렁인다. 금속성 광택이 빛나는 은이 함에 한가득 담겨있었다. 이성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소금 마흔 섬의 가치는 절대로 함을 은으로 가득 채울 정도가 아니다.

대체로 작은 크기의 불규칙한 알갱이로 가득 채워진 함은, 그 자체가 은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만일 이게 진짜 은이라면…….

‘만져봐야 안다. 게다가 아래에 깔린 것들은 가짜일 수도 있으니, 철저하게 확인해야지!’

나는 함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금속 알갱이들이 손을 에워싸는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깊숙한 곳에서 쇄은을 몇 조각 꺼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은근한 가벼움. 좋은 광택과는 달리 상당량의 철이 들어가 있었다. 철은 같은 부피의 은과 비교해 25% 가볍다.

품질은 낮지만 은으로 가장한 쓰레기는 아니다. 광택, 질감, 무게가 최소한 쇄은으로서의 가치는 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낮은 품질을 양이 보완하고 있었다. 고순도로 정제하면 백 냥 정도의 은은 나올 거다. 한 손에 꽉 들어오는 양이다.

‘미치겠군. 고작 사십 섬 소금으로 백 냥 은을 줘?’

현물경제고 소금은 생산 시기가 한정되어 있으며, 또 북방까지 운송비용을 생각하면 분명 가치가 낮지는 않다.

하지만 도성에서 소금의 가치는, 통상적으로 쌀 한 섬에 소금 두 섬 반이다.

이 은을 그대로 한성으로 가져가면 사십 섬이 아니라 오백 섬을 살 수 있다. 북방에서의 가격 상승을 고려하더라도 이건 고작 사십 섬 소금의 대금이라고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대답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김자강이 경성에 방문했을 때 내가 해준 말이 있었다.

‘공급을 늘일 수는 있어요. 그대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김자강이 대답했다.

‘얼마나 마련해 주시건, 대금을 확보하는 대로 차근차근 정산하겠습니다.’

함을 가득 채은 쇄은은 그때의 말을 보장한다는 증거로서 보내진 것이겠지. 군소 부족의 연합체에 불과한 그들이 이만한 은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 실생활에서는 쓰지도 못할 은, 여진족 사회에서는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인 소금으로 교환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여진족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상당한 양의 은을 아무런 보장이나 대가, 담보도 없이 무턱대고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배짱이 좋은 짓이다.

꼭 저들에게는 쓸모가 없더라도 은의 가치는 명나라와 조선이 보장하기 때문이다.

나를 의식한 걸까?

자신들의 세가 해란강까지 닿아 지금보다 훨씬 강성해지더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이렇게나 자신들은 나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여진족이라고 돌대가리들만 있는 건 아니구만.’

김자강과 회령 여진족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나에게 충성을 증명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밑져가며 과잉 충성을 한다면 당장 숙청의 대상은 되지 않을 테니.

설령 뒤통수를 칠 생각이 있더라도 강자 앞에서는 최대한 엎드리는 것이 현재의 안전을 보장한다. 기회는 그렇게 마련하는 것이다.

‘앞으로 받을 소금의 대금을 미리 내어준 것이든, 눈에 나지 않고자 요란을 떤 것이든, 그동안 다하지 못한 충성을 이제야 증명한 것이든……. 나를 이렇게까지 놀라게 만들다니.’

흥미로움으로 입에 미소가 걸렸다.

은화 백 냥의 가치는 분명 작지 않지만, 부의 가치보다는 김자강의 판단과 그것에 협조한 다른 여진족 족장들의 발상이 더 놀라웠다.

“마음에 드십니까?”

을룡이 물었다.

나는 답했다.

“그래…… 재미있구나.”

“재미있다니요? 혹시 대금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 질은 낮지만 은은 맞다.”

“다행입니다. 재미있으시다기에 여진족들이 장난이라도 친 줄 알았습니다.”

“확장하기 바쁜 시기에 뒤통수 맞고 싶지 않으면 나를 상대로 나쁜 장난을 치면 안 되지.”

나는 함경북도의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병마절도사다. 설령 나와 관계가 나쁜 족장이라도 대금에 나쁜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는 걸 알 거다.

물론 이것도 장난이라면 장난이겠지만.

문제가 되는 부류의 장난은 아니다.

마음에 들었다.

“다만 순도가 낮아 가치에 비해 쓸데없이 크고 무거우니 그건 문제구나.”

“적당한 야장을 확보해 고순도로 정제해 두겠습니다.”

“부탁하지.”

을룡은 명을 받들었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함을 챙기고 물러났다.

홀로 남은 나는 여전히 입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앞으로의 향방을 생각했다. 김자강이 바라는 일은 단순하다.

지속적인 소금의 공급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김자강은 그보다도 더욱 위급한 일을 맞이할 테고, 나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될 거다. 그걸 김자강도 슬슬 느끼고 있겠지.

공격적인 확장은 언제나 주위 세력들의 긴장과 위화감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확장자를 견제하기 위한 일대 세력이 연합하게 되어 있다.

* * *

예상대로였다.

김자강을 필두로 회령 여진족들의 기세가 수그러들 기세가 보이지 않자, 해란강을 장악한 율보리를 중심으로 연합이 탄생했다.

율보리는 강대한 세력이다. 단독으로 회령 여진족들을 능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도적으로 연합을 만들고 수장을 자처했다.

‘놈도 주변에 경쟁자들이 많았으니.’

율보리가 가진 힘의 원천은 해란강이라는 수원과 그 주변에 넓게 펼쳐진 평지다.

소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당연하지만 율보리 주변의 군소 세력들은 호시탐탐 율보리의 영역을 노렸을 테지.

힘은 강하니 경쟁 세력을 몇 격파하는 건 율보리에는 일도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사방이 온통 적이니 군대를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겠지.

특정 세력을 격파하고자 병력을 움직이는 순간 다른 세력들이 빈집을 털어먹으려 했을 테니까.

그러던 와중에 회령 여진족들이 일대의 관심거리로 부상했다.

율보리는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했겠지. 연합의 맹주가 되어, 그동안 알력다툼을 해온 주변 세력들과 화친을 맺고 힘을 규합해 외부로 팽창할 기회가 생겼으니까.

‘하지만 미안하게 됐구나. 뛰는 놈 위에는 항상 나는 놈이 있기 마련이지.’

미소가 지어졌다.

종성부사 김일준(金逸駿)이 찾아왔다. 그는 사십 대 중반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자였으며, 생긴 것과는 달리 식년시에서 갑과 삼등을 할 정도로 두뇌는 명석한 자였다.

부임 이후 인사를 받은 것 외에는 접촉이 많지 않았으나, 최근 내가 일군(一軍)을 대동하고 종성에 주둔한 이래로 자주 보고 있었다.

“대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자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바로 나가도록 하지요.”

나는 바닥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새 자리가 마련되었나.

최전선인 육진의 수령들은 회령 여진족들과 해란강 여진족들이 세를 규합하여 분란을 일으키자, 바짝 긴장하고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 종성을 방문했다. 그리고 김자강과 율보리에게 최근 분란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중재에 참석하라 명령했다.

불응은 적대 의사로 감안하고 앞으로의 대응을 결정하겠다는 엄중한 경고와 함께.

김자강의 참석은 당연했고, 율보리는 참석하지 않을 가능성을 나름 점치고 있었으나 김자강이 조선의 비호를 등에 업을 것을 의식했는지 용케 제 발로 찾아왔다.

그렇게 자리가 마련됐다.

율보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적지나 다름없는 조선의 땅을 과감하게 방문했다고 해서, 내가 그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이런 자리가 마련하는 것 역시 나의 계획이었으니.

“오셨습니까.”

회담의 자리는 종성의 관아였다. 뜰에 들어서니 대청에 앉아 있던 김자강이 나를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를 올렸다.

이에 질세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자, 아마도 율보리도 일어나 나에게 예를 표했다.

“어르신.”

어눌했으나 분명히 조선말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진어로 답했다.

“앉으시지요.”

두 사람이 앉을 동안, 나 역시 대청으로 올라가 안쪽에 마련된 곳에 자리했다.

내가 오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알력다툼이라도 있었던 걸까. 주변의 공기가 무거웠다.

사실 조선의 영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서로를 향해 칼부터 휘둘렀을 두 사람이니.

나는 손을 들어 이목을 환기하고는 입을 열었다.

“각자 공무와 일정으로 바쁠 두 사람을 불러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이 사람 역시 국경 일대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목민관들의 항의가 많아서 말입니다. 염치불고하고 두 사람을 불러서 중재를 시도할 수밖에 없어요.”

양해를 빙자한 추궁이었으나 김자강은 밝은 낯으로 답했다.

“아닙니다. 본래 국경에 거주하는 번호(藩胡)들은 모두 조선의 충성하는 몸으로, 항상 상국과 상국의 주인에게 결례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하는데 사소한 다툼으로 폐를 끼쳤습니다. 최대한 협조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김자강은 이 자리가 편하고 즐겁고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나와 그 사이의 인연은 무척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음지를 통한 거래도 있었으며 막대한 대금을 선납함으로써 신뢰와 충성을 증명했다.

자신감이 없을 수가 없지.

기대하는 바가 있을 테고, 나 역시 어지간하면 김자강의 기대에 부응해줄 생각이었다. 그러고자 마련한 자리였으니까.

율보리가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짧은 사과. 조선어가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이 자리의 본질에 대한 불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권했다.

“조선어가 어려우시면 여진어로 말씀하셔도 됩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율보리의 물음에 내가 먼저 여진어로 답했다.

“물론이네. 여진인처럼 능숙하게 말하고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대가 조선어를 어려워한다면 그걸 배려할 정도의 실력은 될 테니까.”

“……!”

율보리는 나의 능숙한 여진어에 놀랐는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비록 국경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 조선과 접촉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으나 매번 조선의 관리들은 선민의식으로 오만에 쩔어 있었다.

그들이 오랑캐의 습속인 여진어를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그것도 상당한 실력으로 여진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럼……. 송구하지만 여진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시게.”

다시금 허락이 떨어지자 율보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약간 의외의 일이 벌어졌으나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 역시 김자강이 평소 병마절도사와 접촉이 잦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적장이 조선이라는 강대한 세력의 유력자와 선이 닿아 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때문에 이 자리의 결말도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빠질 수는 없었다. 병마절도사 사실상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이번 중재로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김자강과 조선군이 힘을 합친다는 최악의 결과보다는 나으리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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