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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51화 (15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51화

53. 빛과 소금 (1)

달포가 지났다.

과장 조금 보태서, 소피를 보면 실시간으로 얼음 기둥이 만들어질 정도의 맹추위도 이제는 한풀 꺾였다.

그리고 여진족 족장들이 돌아왔다.

“강녕히 계셨습니까, 어르신.”

대표인 김자강이 인사를 올렸다.

한성에서부터 시작해 경성까지 꼬박 말 타고 오느라 피곤할 법하지만 김자강이나 다른 족장들의 얼굴은 밝았다.

살도 찐 느낌이었다. 먹을 게 항상 부족한 북방은 설령 족장이라 할지라도 사치스러운 폭식은 용납될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쏙 들어간 볼살과 두드러진 광대뼈는 강 너머 여진족들의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만큼은 아닐 듯 했다.

“한성에서 대접을 잘 받았나보군요.”

“송구한 말씀이지만, 그렇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바쁘다는 이유로 어떠한 일정도 잡히지 않은 새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어야 했지만, 이후로는 연회와 만찬의 연속이었습니다.”

“전하께서 그대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무한한 영광일 뿐입니다.”

극진한 대답과는 달리 상투적인 어조였다.

김자강은 이미 정황을 알고 있었다.

선조는 나를 통해 그들을 불렀으며, 여진족 족장들이 자신에게 감화되어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러 왔다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오래 붙잡고서 연회와 만찬을 거듭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초면에 불과한 여진족 족장들 따위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동네방네 소문을 내기 위해서.

‘거의 한 달 반인가. 오가는 동안 걸린 시간을 제외하면 그보다는 짧아지겠지만 참 오래도 물고 뜯고 맛보고 즐겼군.’

호강이야 했겠지만 구경거리가 되었으니 자존심 강한 그들이 마냥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주변에 눈이 있어서인가.

김자강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입을 열었다.

“조선에 대해 부족의 원로들이 이따금 해준 말이 있지요. 조선의 수도는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비할 곳이 없고, 왕이 기거하는 장소는 마치 하늘의 궁전을 지상으로 옮겨놓은 듯하다고요.”

“직접 보시니 어떠십니까? 원로들의 말이 맞습니까?”

“예. 틀린 말이 없더군요.”

김자강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금칠을 늘어놓으니 관아 식구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마치 이런 반응이 나와야 했다는 듯.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내가 말했다.

“회령까지는 금방이지만, 도성에서 여기 경성까지 오느라 많이들 피곤하실 테지요.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압니다만, 입조까지 한 사신단에게 문제가 생기면 안 됩니다.”

쉬다 가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이었다.

선택권도 거부권도 없었지만 김자강은 이 일방적인 관계가 싫지는 않은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

“감사할 뿐입니다.”

김자강도 내심 나와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었을 거다.

나는 그들이 선조의 비위를 성실하게 맞춰주는 대가로 소금과 확장전쟁 재개를 약속했다. 일을 했으니 대가를 챙겨야지 않겠는가.

“병마평사, 족장들을 객사로 안내해주세요. 인원에 맞춰서 술과 고기도 내어주고.”

“알겠습니다.”

“김자강 그대는 이 사람이랑 잠시 봅시다.”

“예.”

접대는 이원익에게 맡기고서 나와 김자강은 동헌으로 향했다. 동헌은 관아와 붙어 있어 주의는 해야겠지만 을룡이 주위를 지킬 터이니, 짧게 면담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사랑방으로 들어서 주변의 눈이 없어지자, 나는 보다 편해진 태도로 상석을 차지했다. 김자강은 내가 내어준 방석에 앉아 예를 표했다.

“어르신.”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서로 공대하는 것은 관아 뜰에서도 다르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한성에서 오래 머무르셨는데.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몇몇 관리들이 북평관(北平館)을 찾아와 북방의 근황을 물어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최대한 말을 가려서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뿐입니까? 전하와 접촉은 없었는지.”

노고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명목상 김자강과 일행은 선조에게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한성을 찾았지만, 나나 선조는 전말이 다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선조는 나를 이용하면서도 동시에 견제하는 자였다. 나에 의해 도성으로 보내진 족장들을 형식적으로만 대했을까?

어떻게든 나와의 관계에 대해 캐물었을 터였다. 어떤 계기로 도성으로 보내지게 되었는지를.

“왕이 직접 저를 찾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아랫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수염이 없고 몸이 갸날픈 자들을 내시라고 한다지요.”

“맞습니다. 그들이 전하를 곁에서 보필하는 자들이지요.”

직접 나서지는 않았나.

물론 대조선국 국왕이나 되는 인물이 변방 족장 따위를 제 발로 찾아간다는 건 체통이나 위엄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며,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기 마련이다.

단지 선조는 절실하지 않았을 뿐이겠지. 아니면 혹시라도 자신이 직접 사신을 찾아갔다는 말이 나올까 우려했다거나.

그가 소극적이었다는 건 좋은 징후다. 김자강도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니까 책잡히기 쉬운 소리는 하지 않았겠지.

“고생하셨습니다. 꼬박 달포가 넘는 일정에 노고가 많으셨겠군요.”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돌아가겠다는 것도 한사코 거절하면서 일정도 알려주지 않았지요. 그러다 부를 일이 생기면 대비할 틈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구경거리라도 된 기분이더군요.”

모두의 앞에서 했던 말과는 달랐다. 이게 그의 솔직한 감상이겠지.

김자강이 쓰게 웃었다.

“신하들은 왕 앞에서는 친절했지만 왕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는 경멸 어린 눈빛을 보내더군요. 노골적으로 조선을 찬양하는 말을 유도했고 뒤에서 수군대는 일도 잦았습니다.”

“이 사람 역시 조선의 관리지만, 대다수 조선의 관리들은 선민의식이 강하지요 여진인과 왜인들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도 심하고요.”

“송구한 말씀이지만 다시 경험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는 가급적 배려해드리지요.”

우려했던 부분도 확인했겠다, 공허한 약속을 끝으로 나는 김자강이 기대하고 있을 이야기를 꺼냈다.

“일전에 드렸던 말씀입니다만. 소금의 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불만 가득했던 김자강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확장도 중요하지만 내정도 중요하다. 소금은 여진족 사회에서는 금과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조선의 소금 무역량이 줄어들어 바로 국경에 붙어 있는 번호에서도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

이러한 때 적절한 양의 소금이 확보된다면 세를 더욱 쉽게 확장할 수 있으리라.

‘물론 내가 제공할 소금의 양이 판세를 뒤집을 정도로 크지는 않겠지만.’

내가 김자강과 회령 여진족들에게 바라는 역할은 어디까지나 만주 방면으로 ‘나’의 세를 뻗칠 수 있는 발판이다.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강해져 지금의 수직적인 관계를 탈피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국외의 존재로서 나의 구속력이 제한적인 그들이라, 아쉬울 구석이 없어지면 연을 끊는 것은 쉬운 일이니.

괜히 여진족 내에서도 나만의 세력을 확보하겠다 생각해 둔 게 아니다.

“소금은 이미 준비되었고 많은 양은 아니지만 당장의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겁니다.”

“어르신의 배려에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도 알겠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소금을 줄 수는 없어요. 조만간 접촉이 있을 겁니다. 단순한 공여가 아니니 적당한 대가를 마련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어떤 게 좋겠습니까?”

조선이 대여진족 무역에서 주로 대가로 받는 것은 목축과 사냥의 부산물이다.

조정에서는 용처가 많고 조직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말을 선호했지만, 짐승의 가죽도 마다하지는 않았으며 필요하다면 식량으로 쓰일 고기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챙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품들이었다.

고기야 말할 것도 없고, 말이나 가죽이라도 부피가 크고 관리가 힘들어 내가 조용히 접수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품이었다.

나에게는 부피에 비해 가치가 크고 관리하기 쉬운 상품이 필요했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상품이 여진족에게도 없지는 않았다.

바로 보석과 귀금속이다.

하지만 보석은 안 된다.

특징이 두드러지는 녀석들이라 환전도 어렵고 자산에 조용히 녹이기도 힘들었다. 해답은 오직 귀금속, 그중에서도 고액 수표처럼 쓰이고 있는 은이야말로 유일한 해답이었다.

“은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합의가 끝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령의 개인적인 공간인 동헌에서 여진족 족장과 같은 손님을 오래 데리고 있다간 주의를 끌기 쉬웠다.

오늘은 여기까지.

김자강도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 사람과 그대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요.”

“하하.”

“음, 방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볍게 덧붙였다.

“소금이 항상 부족하리란 건 압니다.”

마치 돈이 얼마나 있건 부족한 것처럼. 여진족 사회에서는 곧 돈이나 다름없는 소금은 얼마나 있건 부족했다.

“공급을 늘릴 수는 있어요. 그대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아…… 얼마나 마련해 주시건, 대금을 확보하는 대로 차근차근 정산하겠습니다.”

“그것도 좋지만 선결과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오.”

“일단 해란강까지 확보해 주세요. 그래야 가능한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김자강은 아쉬운 기색이었으나, 굳이 캐물어서 나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는 않았다. 현명한 행동이다.

해란강까지 확보해 달라는 것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회령 여진족들은 적절한 전쟁 명분을 등에 업고서 해란강까지 세력을 확보하겠지만, 그 전에 동쪽 해안을 확보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염전을 만들 생각이었다.

염전(鹽田)!

어떤 방식의 염전이 될지는 모른다. 흔히 알려진 통상적인 염전을 운영하려면 한반도에서 최적의 기후가 갖춰진 남해 지역에 만드는 것이 최적이다.

하지만 나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고 임지는 남해와는 이역만리 떨어진 북방이었다.

한여름마저 미지근할 뿐인 이곳에서 미래의 염전을 구성한다는 것은 꽤나 숙고해야 할 일이이다.

그러나 방식이 어떻건 소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해안을 확보해야 했다. 암염이 산출되지 않는 동북아 일대에서 소금을 구할 방법은 오직 바다뿐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김자강과 회령 여진족들이 나서야지.’

놈들이 해란강에서 보다 세를 확장하여 동쪽 해안까지 확보해야 나는 염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 된다면 함경북도의 국경지대를 김자강과 동료 족장들이 에워싸는 셈이다. 위협적이지만 완충지대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 해란강보다 동쪽인 영역은 내가 직접 관리할 생각이니까.

소금 밀매를 통한 비공식 수입 창출도 좋지만 국경을 오가는 것은 위험하다. 또 생산지를 직접 관리하는 것이 소금 생산에 유리하지 않겠나?

물론, 명분이다.

내가 땅을 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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