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50화
52. 제4원소 (3)
“그동안 혼자서 나의 곁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지.”
가볍게 운을 떼니, 을룡은 무언가 느꼈는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곁에 있었던 단 한 순간도 영광스럽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말솜씨가 늘었구나.”
노비 출신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역시 을룡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도움은 될지라도 방해는 되지 않는다.
나는 평소 을룡이 다른 양반들에게 업신여겨지지 않고자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가 아니다.
천한 노비를 어렸을 때부터의 인연이라고 곁에 두고 있는 나의 명성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다.
“음.”
나는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너를 곁에서 떨어뜨리기 위함이 아니야. 다만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은데, 한 사람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지.”
“소인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너는 내 곁에 있는 누구보다도 능력 있고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부탁하려는 것이기도 하고.”
“하명해 주십시오.”
“이만하면 짐작했겠지. 나는 새로운 수하가 필요해. 하지만 위험한 일에 동원할 예정이니, 가급적이면 나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면 하지.”
“버리는 패입니까?”
“아니. 나를 숨기는 것은 단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일 뿐이야. 고작 버림패 따위가 필요했다면 너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겠지.”
“양해라니요…….”
을룡은 송구한 말씀이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손을 젓고 말을 이었다.
“네가 수장으로 있는 집단을 하나 만들었으면 해. 위험하고 은밀해야 할 일에 동원할 수 있는 자들로.”
“영입해야 할 대상은요?”
“미안하지만 정해둔 사람은 없어. 무책임하다고 해도 좋아. 하지만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람을 구할 수는 없으니까.”
“아닙니다. 그럼, 아무나 영입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너나 네가 다룰 사람들에게 맡길 일은 작은 심부름 따위가 아니야. 그것만 인지하고 있다면 누구를 영입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음.”
나는 쓰게 침음을 흘렸다.
막상 을룡에게 사람을 구하는 임무를 맡기긴 했으나 잘 해낼지 의문이었다. 을룡은 항상 자신을 갈고닦았으나 이런 일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어깨너머로 많은 것을 배웠겠지만…….
그렇다고 직접 가르침을 내린 것도 아니다. 을룡에게 내가 품은 복심을 친절히 알려준 적도 없다.
최선을 다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안심은 되지 않는다.
“어르신.”
을룡이 입을 열었다.
“말해.”
“그건 소인이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혹시, 소인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해주시지요.”
“뻔히 보였구나. 그래. 솔직히 말할게.”
“…….”
“막상 일은 맡겼지만 너에게 적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계기도 없이 무작정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면 더더욱.”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부하를 만든다는 것은 쉽겠는가. 수평관계가 아닌 수직관계가 만들어져야 하기에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을룡도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럼에도 맡겨 주셨다는 건 어르신께서 소인을 믿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기대에 반드시 부응할 생각입니다.”
제법 자신감이 담긴 어조였다.
그래.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에 나의 최선은 을룡을 믿고 응원하는 것이었다.
“최선을 다할 것을 알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잔소리 이상은 안 되겠지. 그럼 나는 일이 반드시 성사될 것으로 알고서 다른 일을 시작할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을룡은 마치 오체투지를 하듯, 무릎을 꿇은 채로 허리를 푹 숙였다. 예전의 철부지 같은 모습은 이제 없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만…….
예전의 모습이라곤 추호도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딱딱한 관계를, 그동안 나는 불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나와 을룡의 인연이 이어진다면 그것대로도 괜찮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사품이 담긴 상자를 찾았다. 그곳에서 검은 화살을 하나 꺼내 을룡에게 건넸다.
“이것은…….”
“내가 왕에게 받은 하사품이야. 예로부터 노궁노시(盧弓盧矢, 검은 활과 검은 화살)는 군주가 믿을 수 있는 제후에게 내리는 물건이었지. 이게 내 손에 들어왔으니 나 역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맞지 않겠나.”
“어르신!”
을룡은 두 손으로 검은 화살을 받쳐 들고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아직은 왕의 눈치를 보느라 활 한 자루와 화살 열 개를 전부 넘기기 어려웠지만……, 분명 나는 을룡에게 검은 활과 화살을 전부 넘겨주게 될 터였다.
* * *
혹한의 겨울은 어느새 절정의 시기에 다다랐다.
소복이 내려앉는 눈은 고작 하룻밤만 치우지 않아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다. 그뿐인가? 지붕에 내려앉은 눈의 무게로 천장이 내려앉는 집도 있었다.
사람이 없을 때 집이 무너진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아닌 밤중에 집이 무너져 내려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죽으면 적어도 이번 겨울 동안은 사람들이 덜 게을러진다.
회령 여진족들의 입시 일정도 정해졌다.
실수 없이 선조를 만족시키고자 열심히 교육을 받았던 김자강과 족장들은 사행을 꾸려 한성으로 향했다.
을룡은 분주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매일 이른 새벽,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떠나 날이 늦어서야 돌아왔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본 적은 없으나 바삐 돌아다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성실함이 꼭 보답을 받는 세상은 아니지만 결과물 없는 행동은 없다. 그렇게 보름 정도 바쁘게 돌아다니던 을룡이 나를 먼저 찾았다.
“어르신.”
이른 새벽이었고 동헌은 인기척 없이 한산했다. 평소 을룡은 이런 때를 틈타 관아를 빠져나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지난번 맡겨두었던 일 관련인가?”
“그렇습니다.”
을룡은 만족스러운 낯으로 답했다. 자신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제법 성과를 거둔 모양이었다.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공공연하게 나눌 주제는 아니었다.
밖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나는 을룡을 이끌고 사랑방을 찾았다.
이른 새벽답게 방안은 캄캄했다. 촛불을 켜니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고 을룡은 입을 열었다.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짧지만 확실한 보고였다. 이대로 일을 시켜도 무방하겠으나, 나는 정보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식의 불균형이 가져오는 힘의 위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인원, 신분, 남녀, 노소는 어떠한가?”
“송구하옵게도 수가 많지는 않사옵니다. 총 일곱 명이온데 전부 양인입니다. 남성은 다섯이고 여섯은 둘인데 나이는 이립(而立, 30세)에서 불혹(不惑, 40세)이 여섯이며, 한 명은 채 이립에 미치지 않았습니다.”
“성분을 보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회유한 건가?”
“소인이 대감을 모시면서 배운 것은, 지금 자신의 삶에 불만족스러워하는 사람일수록 조종하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사실이지.”
“다들 이런저런 사유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소인이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니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조선팔도 중 북방을 담당한 함경도와 평안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무척이나 낙후된 곳이었다.
험한 지형, 혹한의 날씨, 지독한 가난함.
원주민들은 조선의 질서에 굴복하고 순응한 지 백 년이 넘었으나 여전히 드세고 거칠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욱 드세고 거친 존재들이 국경 바로 너머에 있었다. 놈들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조선의 변방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좋은 환경에서도 불만은 생기기 마련이거늘 이곳 북방은 대부분에게 가혹했으며, 비교될 다른 지역도 많았다.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단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을 뿐이다.
사람이 살기에는 좋지 않은 환경이지만, 나처럼 누군가를 현혹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좋은 환경이었다.
“명령을 이행할 준비는 되었나?”
“물론입니다. 무엇이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첫 단계는 소금을 구하는 것일세.”
“얼마나 있으면 되겠습니까?”
“너무 적어서도 의미는 없겠지만 너무 많아서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겠지. 각자 환경에서 합리적인 수준으로 소금을 구매하라 명하시게.”
한성으로 떠난 김자강과 족장들이 돌아오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서둘러봐야 위험부담만 늘어날 뿐이다.
“물론 비용은 이쪽에서 처리해주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옥석을 가려내는 것도 좋겠지.”
“지원을 약속하지 않은 채로 명령만 내려둠으로써 말입니까?”
“잘 알고 있군. 자네도 알겠지만, 아랫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맹목적으로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줘야 할 때가 많거든.”
하물며 내가 을룡의 수하들에게 맡길 일들은 머리 쓰는 일도 아니다.
대체로 더럽고 지저분한 일이 될 것이며 거기에 이성이나 사고는 불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인 이상, 어깨 위에 얹어둔 게 장식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성과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뜸 소금을 사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일단 의문부터 품을 터였다.
거기서 옥석이 갈리게 되겠지.
다음 단계는 더욱 위험하고 민감한 일이다.
밀무역이니.
함부로 국경을 넘어 상행하는 자들은 불문하고 사형이다. 어설픈 놈이 끼어서 실수라도 했다간 다 죽는 수가 있었다.
‘목숨이 걸린 일을 하면서도 진지해지지 못해서 죽는다면 내 알 바 아니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거다.
밀무역을 위해 함께 움직인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확보하고 관리하고 명령을 내리느라 많은 공을 들인 을룡에게.
어쩌면 역류한 똥물에 맞을지도 모르는 나에게도.
그러니 어설픈 놈은 미리 배제해야 했다. 위험한 일을 맡기 위해서는 까라는 대로 깔 줄 알고 입도 무거워야 했다.
“다만 시험도 좋지만 가혹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끌지는 말게. 저들에게도 현실은 있으니까.”
을룡의 수하들은 최근에야 영입된 상태.
사소한 명령은 맹목적으로 수행할지 몰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데 위해가 간다면 최근 만들어진 알량한 충성심은 연기처럼 흩어질 터였다.
“시험도 좋지만 부담이 크면 휘기보다는 부러지는 법이지. 쭉정이를 걸러내는 것도 좋지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마저 걸러내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을룡은 허리를 숙이며 주의를 받들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이건 을룡의 수하를 시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과연 수하들을 얼마나 휘어잡았는가?
지위, 경제력, 물리력을 과시해서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은 잠깐이다. 어디까지나 굴복이고 보상을 위한 명령의 이행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 없이 막연히 사람을 지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을룡은 신분을 숨긴 채 포섭했기 때문에 드러낼 수 있는 패에 한계가 있었다.
과연 을룡은 수하들의 심리를 얼마나 사로잡았는가?
만일 그에게 사이비 교단 교주의 자질이 있다면, 머지않아 알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