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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49화 (14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49화

52. 제4원소 (2)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내가 말했다.

자리는 얼음장, 아니 한빙지옥보다도 더 싸늘하고 무거워진 뒤였다. 끌려간 족장이 일신을 건사하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

맞는 생각이었다.

그는 영구적인 안식을 얻을 터이니.

조선의 관리인 나와 강 너머 여진족들 사이가 완전히 수직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상하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나와 대등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착각이라도 한다면, 나는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

“소금이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나의 물음에 처음 소금 이야기를 꺼냈던 족장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자신도 건방지거나 괘씸하다는 이유로 끌려갈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평소 보여주었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일렀다.

“아니에요. 부담을 주려고 물어본 게 아닙니다. 입조가 무탈하게 진행된다면 이 사람이 포상 차원에서 손을 써줄까 싶어서요.”

“아…….”

족장은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 조금 진정이 됐는지 조금은 편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르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대들이 불편을 감수하고서 이역만리 타지를 찾아 어려운 예를 표하겠다는데. 당연히 이 사람이 마음을 써주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미리 세워둔 이원익은 물론 주변의 눈과 귀도 사라졌다. 이 정도 약속은 해도 무방하리라. 물론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조용한 장소에서 따로 해야겠지.

물론 이외에도 해줄 말은 더 있었다. 이건 한창 침울해 있는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줄 터였다.

“그대들이 불충한 적호(賊胡)들을 상대로 입조를 요구하였는데, 당연히 한 번쯤은 모범을 보여줘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말을 늘어뜨리자, 다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음 편히 알려주고 싶었으나 아직은 조심해야 했다. 나는 김자강에게 손짓해 바로 옆에 부르고는 조용히 말했다.

“조선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정당한 명분으로 정복 전쟁을 계속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이전까지는 회령 여진족들이 멋대로 조선의 이름을 팔아 확장을 꾀했다면, 입조 이후는 다르다.

적호 족장들이 미쳤다고 입조에 응하겠나?

그나마 배후가 안정된 회령 여진족들과는 달리 그들은 동족을 포식하는 늑대떼 사이에서 외줄타기 하는 신세였다.

눈치가 좋아 이쪽의 의도를 파악하더라도 선택지는 없다. 결국에는 싸우다 파멸하게 되겠지.

우려했던 것처럼 연합이 생길 거다. 회령 여진족들이 입조까지 해가며 조선과의 긴말함을 입증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신호였으므로.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힘을 쓸 뿐이다.

물론 조정의 대신들은 의문과 경계를 품을 터였다. 아무리 함경북도의 군사를 총괄하는 자라지만, 어떻게 조정의 명령도 없이 전쟁을 사주하고 지원할 수 있느냐고.

나 역시 그것을 우려하여 이전에는 힘을 쓰지 못했으나, 이제는 다르다.

나에게는 선조가 보낸 비밀 편지가 있다.

공식 명령은 아니지만 서찰에는 회령 여진족이 일으키고 내가 지원할 전쟁과 깊게 관련이 있는 지시가 적혀 있다.

내가 조정에서 견제와 공격을 받다가 이 서찰이 공개라도 된다면 선조는 어마무시한 타격을 입겠지. 그것을 의식해서라도 선조는 나를 비호할 수밖에 없다.

‘물론 놈의 성격상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연관을 부인하겠지. 마음 높고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쪽에는 제삼당이 있다.

그들이 서인 사이에서 공론을 마련한다면 서인 전체가 나를 비호 할 터였다.

경쟁 당파인 동인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나를 공격하려 들겠지만, 지금 동인 영수가 누구인가? 이산해다.

나에 의해 공신으로 임명된.

그가 나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믿음은 언제나 배신당하는 법이지만 선조와 서인을 합치면 안전장치는 이미 두 개나 있다.

“하하하하…….”

나는 웃으며 김자강을 밀어냈다.

내막을 알 리 없는 다른 족장들은 나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르겠지만, 김자강이 고개까지 끄덕이니 좋게 느껴진 듯 했다.

확장이 절실하던 족장들이니 예상처럼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을 거다. 나아가 소금까지 공급받는다면 다시금 충성을 가슴에 새기겠지.

거스르는 자는 처벌하되 따르는 자는 후하게 포상한다. 당근과 채찍. 간단하지만 아랫사람을 다루는 강력한 원칙이다.

“귀찮기만 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합시다.”

나는 잔을 들었다.

모두들 안도를 되찾은 표정으로 함께 잔을 들어 보였다.

간만에 술이 달았다.

* * *

여진족 족장들은 하루빨리 한성을 방문하기를 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최대한 서둘러 입조하려는 것이다.

족장들이 자리를 비운다는 말이 돌아봐야 부족의 안위에는 도움 되지 않을 테고, 또 서둘러 갔다 와야 확장 전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대뜸 내가 보낸다고 한성에서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보고를 하고 일정을 잡아야 했으며, 선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족장들을 교육할 필요도 있었다.

이들은 내가 보내는 것이지만 선조는 족장들이 자발적으로 감화되어 찾아온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 했으니까.

거기서 말실수라도 했다간 선조가 까라는 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찍히는 수가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족장들이 잠시 기다리게 된 동안 나는 다른 일을 진행했다.

“소금이라.”

그들의 무역 총량을 제한하는 건 평안도 관찰사와 조정이다. 심지어 조정은 식량과 소금을 너무 과하게 주어서 명에게 한 소리 듣지는 않을지도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사사로이 무역 총량의 허들을 올린다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이다.

전적으로 나의 수족인 을룡에게 전담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소금을 전달할 수 있었다. 무역 대금은 온전히 나의 호주머니에 들어오게 되겠지.

위험부담이 크지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다만 음지의 경로를 이용하면서도 직접 행보를 드러내는 것은 불필요한 위험 감수다.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이지 위험을 감수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최대한 나는 밀매에서 관계가 없는 존재로 보일 필요가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나 대신 움직일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결국은 을룡을 통할 수밖에 없나.’

하지만 을룡은 이미 내 수족으로 얼굴이 많이 팔린 상태였다. 가까운 곳으로 출타할 때는 물론 감영이나 병영에서도 착 달라붙어 있으니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밀매 현장에서도 직접 움직이고 있다가 발각이라도 된다면 큰일이지.’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선택지는 둘뿐이다.

하나는 내가 개입해서 을룡을 살리는 것이다. 지위가 있으니 고작 밀매 현장의 관련자를 빼내는 건 일이 아니다.

대신 약점이 잡히겠지.

쓰디쓴 손해였다.

다른 선택지는 손절하는 것이다. 나는 을룡을 믿었으나 을룡은 주인의 위세를 믿고 경거망동하다 그 죄악이 발각됐다는 느낌이다.

을룡은 설령 나의 지시를 이행하다 잡히더라도, 자신으로 인해 내가 발목 잡히는 것은 원치 않을 터였다.

다른 말은 나오지 않을 테고 약점이 잡히는 것을 감내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수족을 잃게 되겠지.

나아가 을룡은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호위로서의 정체성을 굳힌 탓에 근래에 들어서는 많이 재미가 없어지긴 했지만.

그를 잃는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물론 약점이 생기는 쪽도 내키지 않기는 매한가지지. 막상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을룡을 손절할 테고, 을룡 역시 그러기를 바라겠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다.’

을룡을 쓰더라도 최대한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써야 했다.

지시만 전달한다던가.

물론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을룡이 부릴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또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밀매에 투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경성에 와서 만든 인연이라곤 죄 관리거나 관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밀매와 같은 위험천만한 불법 행위를 감수할 만용은 물론,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혼자 짊어질 의리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수하가 많았거나, 주변에 발 넓은 수하가 하나만 있었어도.’

다른 일이었다면 여진족 족장들을 쓰겠지만 놈들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해관계도 있으니 저들에게 이익만 된다면 어떤 일이건 개입할 만용은 있겠지만 의리까지 기대하기는 힘들다.

내가 영수로 있는 제삼당의 일원인 병마평사 이원익은…… 불법적인 일에 협조하지는 않겠지. 의리는 있을지라도 나의 명령에 무턱대고 응할 만용은 없는 자였다.

안동 권씨? 내가 안동 권씨의 실질적인 가주인 처조부 영의정 안동부원군 권철을 꽉 잡고는 있지만 함경북도에 안동 권씨가 있기는 한지 의문이다.

분명 밑에 수하는 적지 않게 두고 있는데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남들이 본다면 나라 안팎으로 세를 뻗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부족하겠냐고 타박이라도 하겠군.

“게 아무도 없느냐.”

조용히 부르자, 게 아무도 있던 방문 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을룡이었다.

잠 잘 때 빼고는 나를 항상 호위하니, 사실 나의 이러한 부름은 을룡을 부르는 전용 호출이나 다름없었다.

“들어와. 할 말이 있으니.”

“예.”

-드득.

습기로 뒤틀린 문이 문지방을 긁었다. 사랑방을 오갈 때마다 소리가 나서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이제는 적응한 지 오래였다.

내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할 것임을 직감했는가.

을룡은 주변의 시선을 살피고는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다시 끌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번에는 미약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번에 위험한 일을 하나 할 생각이라서.”

“말씀만 해주십시오.”

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너무 위험해서 너를 투입하고 싶지는 않아.”

“소인은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내가 단호히 말하자 을룡은 더 이상 나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무릎 꿇고 앉은 채로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이래서 나는 을룡을 잃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을룡만 아니라 수하라면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리고 위험한 일에 점차 연루될수록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모두를 지키겠다는 건 억지고 욕심이겠지.

그리 착한 생각은 할 생각도 없거니와 이유도 합리성도 명분도 없다. 이미 회령 여진족을 구원하는데 조선 백성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사용하지 않았나.

다만.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나아가 감수해야만 하는 수하를 새로 만들 수는 있겠지. 이들은 이전의 어떤 집단과도 다른 색다른 성향의 조직이 될 거다.

적어도 한동안은.

나를 완벽하게 해줄…….

네 번째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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